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시 Sep 24. 2022

글을 쓰면 집안일은 엄마 몫

글을 쓴 이후부터 집안일의 파이가 야금야금 커져 내 몫이 되어가는 것 같다. 직장맘으로 지낼 때는 남편과 집안일을 분담하는 편이었다. 칼 자르듯 역할을 분담한 것은 아니다. 그렇게까지 철두철미하진 못하다. 대신 서로의 어려움을 조금씩 인정하고 음식을 내가 하면 설거지는 남편이, 세탁기의 빨래를 내가 돌리면 건조대에 빨래를 너는 것은 남편이 하게 됐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집안일의 파이를 아이들에게도 조금씩 할당했다. 잔소리로 하라 하면 투정하며 도망갈 게 뻔해서 교묘하게 게임처럼 만들어서 은근슬쩍 자기 분량의 설거지를 하게 만들었다. 게임처럼 위장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아이들은 내 머리 꼭대기에 앉아서 언제나 내가 집안일을 하게 만들었다. 아이들을 당해낼 재간이 없으니 내 몸을 더 움직일 수밖에 없다.


비교적 다른 집보다 집안일을 많이 거드는 남편이다. 여느 집의 남편 이야기를 들어봐도 내 남편만큼 집안일을 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나는 만족스럽지 않아도, 이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수긍하는 게 맘 편하다. 여전히 남편은 집안일을 자기 몫이라 여기지는 않는다. 아내가 직장일로 바쁘니, 도와줘야지. 선심을 쓰듯 생색을 낸다. 그 생색에 마지못해 반응하거나 심드렁하면 이내 남편은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직장맘일 때는 집안일로 종종 싸웠다. 근본적인 담론을 꺼냈다간 서로의 감정만 상한다. 적당히 어르고 달래는 게 상책이다. 결혼생활 10년이 훌쩍 넘어가니 싸워도 해결되지 않는 일이 있음을 받아들인다. 생색을 내고 싶어 하는 남편의 마음을 헤아린다. 과한 칭찬까진 버겁고, ‘고마워’ 한마디 정도는 건넬 수 있다. 약간의 진심도 섞였기에 완전 거짓은 아니다. 


직장을 그만두고, 글을 쓰면서 남편이 했던 집안일까지 어느새 내 몫이 되어버렸다. 혼자서 음식을 하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고 빨래를 널고, 집안의 청소까지 분주히 해가고 있었다. 집안일의 파이가 모두 나에게 배당되자, 글쓰기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것처럼 되어가고 있었다. 


‘나 글 써야 해요!’ 좀 더 강하게 말했으면, 남편도 성화에 못 이겨 집안일을 했을 것이다. 나는 강하게 말하지 못했다. 항시 글을 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글을 쓰기 위한 준비가 다소 필요하다.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는 건 기본이며 옵션으로 체력부터 시작해서 더 열거할 수 있지만 그건 차차 설명하기로 하고 그 준비과정까지 주장하기에는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었다. 생업으로 나서기 위해 전투적으로 준비하는 일도 아니고, 가끔 매체에 기고하는 정도로 만족하니 남편에게 집안일의 파이를 넘기지 못했다. 글을 쓰는 사람은 시간이 남는 사람으로 보이니, 집안일에서 도망갈 수 있는 핑계가 없었다. 직장이라는 방패막이가 사라지니, 순식간에 집안일이 쓰나미처럼 나에게 밀려왔다.


이대로 적응이 되었다면 아마도 난 전업주부를 자처하고 집안에서 묵묵히 집안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적응되지 않았고, 적응하고 싶지도 않았다. 혼자만 집안일의 파이를 맡기 싫었다. 글쓰기가 이어질수록 나에 대한 의심만 증폭되었다. 에세이 잡지에 기고를 할 때는 나름 신도 났지만, 기고만으로는 글쓰기가 지속될 수 없었다. 어차피 직업적으로 할 수 없는 일이라면, 다시 직장을 구하고 싶었다. 집안일을 나눌 핑계로 직장만 한 게 없었다. 구인공고를 살펴 경력을 살려서 갈 수 있는 직장도 찾았다. 지원서를 몇 군데 내고 기다렸다. 취업을 하기 위해 지원서를 냈는데 마음의 뒤편은 취업이 되지 않았으면 했다. 


직장에 다니면 글을 쓰지 못할 게 뻔했다. 직장 다니면서 글까지 써서 책을 출간한 작가도 있지만, 나는 그 작가가 아니다. 직장에 다니면서 집안일까지 하게 되면, 모든 에너지를 소진했다. 다른 일에 투여될 에너지가 없었다. 가까스로 직장에 다니기 위해 체력을 유지해야 했다. 그마저도 잘 되지 않아 체력은 바닥을 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더 잘 쉬려고 애썼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새로운 일에 도전한다는 생각만으로 이미 피로했다. 직장에 다닌다면 글쓰기를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결론에 다다르자 아쉬움이 컸다. 


나는 지금 왜 직장에 다니려고 하는 거지. 집안일 때문에! 그렇게 해서 내가 얻는 것은 뭐지. 집안일을 남편하고 나누면 만족이 되는 건가. 꾸역꾸역 직장에 다니면서 일을 할수록 나는 늙어가겠지. 현실에 안주하고 내 안에 꿈틀거리는 호기심의 불씨를 꺼트리는 조건으로 내가 얻는 것은 무엇일까. 고작 집안일을 나누는 거. 그 대가로 나는 하고 싶은 글쓰기를 버리겠구나.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이 글쓰기를 포기하는 것인가. 


혼자서 끙끙 속앓이를 한다. 나에게 좀 더 솔직해보기로 작정하고 질문을 이어간다. 포기하고 싶지 않다. 글쓰기에 미련이 남아 있다. 더 쓰고 싶고, 이제 성공이나 명성은 바라지도 않는다. 그런 결과는 내 소관이 아니다. 내가 꿈꾸는 모습은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서도 일상 속에서 자연스레 글쓰기를 하는 것이다. 마치 아침에 습관적으로 양치를 하듯, 안 하면 허전한 그런 무의식적 습관이 되길 바라는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취업이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많은 나이가 걸림돌이 되어 탈락되었을 때는 다소 충격도 받았다. 경력 단절 여성으로서의 패배감도 맛보았다. 나 정도의 경력이라면 쉽게 취직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던 직장도 부딪히니 현실의 벽이 꽤나 높았다. 탈락의 고배를 확인할 때는 우울했지만 한편으로는 안심했다. 


지금의 글쓰기가 어디에 어떻게 이로운지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힘겨운 산을 오르고, 쉬고, 가끔은 내려가기도 하면서 글쓰기 근육이 붙는다는 것을 미약하게나마 확인하곤 한다. 하얀 바탕의 화면만 보면 겁을 내던 내가 ‘처음은 겁부터 나지, 당연해 그래도 한 글자만 쓰기 시작하면 그때부턴 글이 글을 쓰게 만들지’라며 겁내는 나를 지나쳐간다.   


뛰어난 이야기꾼도 아니고, 작가로서의 타고난 자질이 보이는 것도 아니다.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하는 것만 같다. 누군가가 자꾸 나의 손을 잡고 계속 가보자고 한다. 작가가 아니어도, 많은 사람들이 읽어주지 않아도, 그래도 써보라고 다독인다. 보이지 않는 그 위로가 힘이 되었다. 


더 이상 집안일의 파이를 줄이기 위해 엉뚱한 지원서를 쓰지 않는다. 집안일의 파이를 줄이기 위해 나대로 꾀를 부리고는 있다. 일이든, 아니든 글쓰기에 명분을 붙여서 남편과 아이들에게 스리슬쩍 집안일의 파이를 나눈다. 만만치 않지만, 글을 위해서라면 감수할 만한 귀여운 과제이다.  


이전 03화 술술 읽힌다고, 술술 써지는 건 아닐거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