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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시 Oct 04. 2022

몸을 움직여 머릿속을 비워낸다

흔히 엉덩이로 글을 쓴다고 말하곤 한다. 몸을 움직이며 쓸 수 없으니 진득하니 의자에 앉아 쓰는 수고를 표현하는 것이다. 엉덩이를 오래도록 붙일수록 끈덕지게 글이 삐져나온다. 쓸 수 없다고 포기하고 싶은 심정이어도 엉덩이를 붙이던 습관이 손을 움직여 글을 쓰게 만든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 글 쓰는 습관을 붙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인내의 시간일 수도 있다. 고통이 성장통임을 알아챌 수 있으려면 나름 경험치의 분량이 몸에 쌓여야 한다. 글 쓰는 고통이 끝이 아님을 몸으로 이해시켜야 한다. 


나 또한 여전히 엉덩이로 글쓰기가 어렵다. 어릴 때부터 도통 의자에 앉아 있는 꼴이 없었다. 말 수는 적었지만 몸은 꽤나 활동적이었다. 학교가 끝나면 골목길에서 해가 저물어갈 때까지 몸을 움직이며 놀았다. 작은 공간에서 깨작대는 소꿉놀이도 아니고 온 동네를 헤집고 다니며 뛰어 노는 것을 즐겼다. 시험공부를 위해 엉덩이를 붙여야 할 때도, 곧잘 서서 입으로 중얼거리곤 했다. 노트에 연필로 써내려가기 보다 글자를 입으로 낭송하며 머릿속으로 집어넣었다. 의외로 효과는 좋았다. 공부는 엉덩이로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학창시절의 나는 깨달았다. 


글쓰기는 어떨까. 엉덩이가 들썩들썩 밖으로 나서자고 옴찔거린다. 그럴 때마다 ‘역시나 글쓰기는 내 팔자는 아닌가봐’ 한탄하곤 했다. 그럼에도 쉽사리 포기가 되지 않으니 나름의 방법을 찾아야 했다. 엉덩이가 들썩일 때는 과감히 몸을 움직였다. 어릴 적 뛰어 놀았던 감각의 세포들이 되살아났다. ‘야호!’ 신이 나서 몸은 더 격렬히 움직여졌다. 일상 속에 수영이, 자전거가, 달리기가 자리했다. 적당히 때에 맞춰 오늘 입을 옷을 고르듯, 오늘의 운동을 선택해서 움직였다. 


몸이 움직여질수록, 뇌세포들도 함께 움직여지는 것 같았다. 단조로웠던 글쓰기가 점차 다채로워지고 있었다. 매일의 순간들이 새롭게 다가왔다. 가뿐 숨을 쉬며 움직일 때마다, 머릿속은 텅 비어갔다. 글을 쓴다는 핑계로 머릿속의 주머니에 생각들을 가득 채웠다. 꽉 찬 생각들 때문인지 거울속의 내 얼굴표정은 무겁기만 한다. 물속에서 한바탕 수영을 하다보면 채웠던 생각들이 서서히 비워졌다. 마치 뇌가 없이 몸이 움직이는 것 같다. 아무 생각 없는 상태가 되니, 한결 몸이 가벼웠다. 수영을 마치고 샤워실 거울에서 마주한 내 얼굴 표정은 가볍다. 가벼운 표정의 내 얼굴이 참 예뻐 보인다. 붉게 열기가 오른 볼과 투명한 눈동자, 온몸에는 적절한 수분으로 촉촉하다. 


격렬한 움직임 덕분에, 세상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었다. 머릿속 생각주머니를 적당히 비워내어 나를 새롭게 알아갈 수 있었다. 익어가야 하는 생각들도 있다. 이런 생각들은 몸 깊숙이 보관한다. 의지를 갖고 하는 일은 아니다. 오래 묵은 생각들이 내 몸속 복잡한 회로를 타고 어딘가에 안착한다. 가만히 머물기도 하지만, 핏줄을 타고 흐르기도 한다. 가끔은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것들도 존재한다. 가슴으로 느껴야 되는 것들. 아쉽지만 가슴에 새겨둔 여리한 감정들은 좀처럼 남아있지 못하고 휘발된다. 부지런히 엉덩이를 붙이지 않으면 어젯밤 꿈처럼 어떤 조각도 기억에 남지 못한다. 이 부분은 나도 어찌하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다. 엉덩이를 붙이는 습관이 몸에 배면 좀 나아지려나.

엉덩이만으로 글을 쓴다는 말은 개인마다 다르다, 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글쓰기에 있어 꼭 ‘해야 한다’라는 것은 없다. 저마다의 취향, 저마다의 맥락, 저마다의 방식이 있을 뿐이다. 종종 어떻게 글을 써야 하는지, 물어올 때마다 머리를 긁적이게 만드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내 글쓰기 방식은 내 삶의 결과 함께 성숙한다. 내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때로는 삶의 방식이나 나에게 던지는 질문들이 더 중요해진다.


요즘은 기술의 발달로 엉덩이를 붙이지 않고 쓸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음을 부정하진 않는다. 허리가 점점 부실해지는 현대인들을 위해 서서 일할 수 있는 책상들이 있고, 누워서도 노트북을 사용할 수 있고, 심지어 스마트폰 만으로도 글을 쓸 수 있다. 그만큼 글을 쓸 수 없다는 핑계도 적어진다.


한 해, 한 해가 지날수록 체력이 바닥을 찍고 있음에도 글을 쓸 수 있다고 자만했다. 손가락 움직일 정도의 힘은 많은 노력이 없어도 가능한 것이니까. 글쓰기의 경험이 많지 않은  초짜의 섣부른 생각이었다. 글이 써지지 않을 때면 학창 시절 읽지 못한 책을 탓하고, 써보지 못한 글을 탓했다. 체력을 탓하진 않았다. 체력과 글쓰기를 연결해서 떠올릴 수 없었다. 매체에서 보는 작가들은 골방에 틀어박혀 온종일 글을 쓰는 것 같았다. 간신히 생명줄을 유지할 만큼의 식사만 보급되면, 기계처럼 글을 쓰는 것처럼 보였다.


되돌아본다. 글쓰기를 멈췄던 그 수많은 순간들. 그때의 내 체력은 그야말로 ‘간신히’ 생명줄을 유지하는 정도였다. 간신히 일어나고, 간신히 일하고, 간신히 엄마 노릇을 할 수 있었다. 그 외의 일들은 할 수 없었다. 조금만 앉아 있어도 허리가 아팠고, 날씨가 조금만 사나우면 감기로 골골 앓았다. 학창시절의 활동적인 몸은 엄마가 되면서 까마득히 잊고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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