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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시 Sep 30. 2022

쓸데없는 시간을 보낸다

노트북의 키보드를 타닥타닥 두들기면 흰 바탕 위에 글자들이 수를 놓듯, 박힌다. 생각이 이어져 나오기도 하지만, 어떤 경계를 지나면 ‘이게 내 생각이었나’ 싶은 낯선 단어들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한 문장이 만들어지고, 문장이 또 문장을 불러들여 한 문단이 된다. 한 문단은 또 문단을 잡아끌어 결국에는 한 편의 이야기가 된다. 이해가 잘 되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이야기도 많다. 글 쓴 노력이 아까워 공개적으로 내보이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 쓸데없는 짓만 하는 것 같다. 쓸데없는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인정이나 성취를 바라고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글을 쓴다는 행위 자체에 매료되어 시간의 흐름도 의식하지 못한 채 빠져 있다. 정신이 들어 문득 시계를 보고는 헐레벌떡 학원에서 돌아오는 아이를 데려오기 위해 부랴부랴 마음이 급해진다. 아이들의 엄마인 것도 잊었다. 글 쓰는 행위 속에서 엄마는 없었다. 글 쓰는 사람만 존재했다. 이제 글 쓰는 사람에서 깨어나 ‘엄마’가 되어야 한다. 학원에서 나오는 아이를 차에 태우고 집으로 향한다. 현재를 살아가는 아이는 학교에서 화분을 만들었다며 환하게 웃는다. 조잘대는 아이의 입술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다. 태권도를 해서 온몸에 땀이 흠뻑 젖어 끈적거리는 땀 냄새도 엄마가 되면 향수보다도 향기롭다. 어쩔 수 없는 애 엄마이다.  


글 쓰는 사람이 되어간다. 꼭 해야 할 일들을 줄여나갈 수밖에 없다. 슈퍼우먼도 아니고, 아니 슈퍼우먼도 결국 인간이라면 모든 일을 다 잘할 수는 없다. 버릴 수 있는 일, 나중에 해도 되는 일, 편리함에 기댈 수 있는 일들을 추려 맡긴다. 엄마의 몫이라 악착같이 부여잡았던 살림들을 내어놓는다. 미련은 없다. 남편과 아이들이 분담해서 해주길 바라는 것도 나의 욕심이었다. 빨래는 세탁소에, 음식은 간단 식품을 구입하고, 청소는 대강 한다. 


글쓰기도 마찬가지가 되어간다. 오늘 쓰면 다행이고, 내일로 미루어도 괜찮다. 전체적인 리듬이 좀 느려졌다. 바쁜 걸음이 줄어들었다. 눈앞에서 스쳐갔던 풍경도 슬로우 모션으로 천천히 움직인다. 무의미하게 지나쳤던 이미지들이 조금씩 입체적으로 느껴진다. 다채로운 색깔이 보이고, 공기의 질감에 따라 달라지는 냄새를 맡고, 미세해진 손끝과 피부의 결로 촉감을 느낀다.


글쓰기를 멈출 때가 더 많아졌다. 미래를 위한 준비도 내려놓았다. 손에 잡히지도 않는 미래, 라는 게 도통 뭔지 중요치 않아졌다. 하늘빛이 맑은 아침이면 가벼운 옷을 걸치고 산책을 나선다. 걷기도 하고, 자전거 페달을 밟기도 하고, 달리기도 한다. 그날의 몸 컨디션과 날씨와의 케미에 따라 적당히 움직인다. 집 근처 저수지가 있다. 대략 5km 둘레길로 시골에 있어 찾는 이는 많지 않다. 드문드문 강아지를 앞세우고 걷는 이들을 종종 본다. 


산책을 하다 보면, 메시지를 듣곤 한다. 듣는다는 표현보다는 가슴에 와닿는다, 라는 표현이 더 가깝다. 말로 오고 가는 소통은 분명 아니다. 순간에 전해지는 느낌 같은 것. 연기처럼 왔다가 금세 사라져 ‘이게 뭔가’ 싶다. 혼자 공상하는 버릇 때문인가. 별거 아닌 것처럼 넘겼다. 글쓰는 사람으로 지내면서 내 안의 언어가 확장되고, 사고가 확장되고, 감각이 확장되었다. 그러면서 그 기묘한 메시지의 느낌은 더욱 분명하게 다가왔고, 더 이상 메시지를 무시할 수 없었다. 


가슴에 와닿은 메시지들을 차곡차곡 모으고 있다. 혼자만 꿀컥 삼킬 수도 있지만, 이내 배설되어 표현될 게 분명하다. ‘나’라는 몸을 통과해서 언어로 번역하면 언젠가는 세상에 내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때는 있겠지. 서두를 필요는 없다. 나도 모르게 글쓰고 있을 내가 쉽게 상상이 되니.


글쓰는 사람이 되면서 자연스레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아이들은 엄마의 잔손이 필요치 않을 만큼 웬만한 일은 스스로 할 수 있다. 아침 8시만 되면 학교로 향한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돌봐주는 덕에 나만의 시간을 만끽할 수 있다. 오늘따라 가을 햇살이 따사롭다. 벼들은 누렇게 익어 고개를 숙인다. 길가에는 집주인이 심어 놓은 코스모스가 붉은색, 주황색, 노랑 색을 뽐내며 완벽하게 어울려 있다. 어느 것도 튀지 않아 눈에 거슬리는 게 없다. 자연스러움은 늘 그랬다. 각자의 모양새를 뽐내면서도 누구 하나 도드라지지 않고 적절하게 어울려 있다.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나’도 그렇게 어울렸으면 했다. 


뭘 쫓으며 살아온 것일까. 인생의 반환점을 맞이해서야 쓸데없는 시간을 받아들인다. 겉으로는 여유 있는 척했지만, 내면에서는 언제나 종종거렸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바쁘게 쫓았다. 할 수 있는 일은 많았다. 처음이 어렵지 시작이 반이었다. 처음이라는 두려움의 턱만 넘어서면 그 뒤의 일은 그럭저럭 헤쳐나갈 수 있었다. 그 이후에는 잘 되길 바랬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인가. 스스로를 의심하며 하루를 버텼다. 


아침에 일어나 습관적으로 양치를 하고, 쓸데 있는 시간을 촘촘히 짜서 지냈다. 쓸데없이 지내는 시간이 없어야 했다. 끊임없이 뭔가를 하고, 움직인다. 그래야만 하루의 끝이 뿌듯했다. 아이를 키울 때는, 비록 직장을 다니지 않아도 돌봄을 하고 있다는 엄마로서의 정체성이 나를 지탱했다. 어떻게 잘 키울 수 있을지 고민했다. 아이는 자신만의 색깔로 자랐다. 엄마의 기준만 들이밀지 않으면 아이는 아이의 그릇만큼 행복을 만들어냈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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