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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시 Sep 22. 2022

술술 읽힌다고, 술술 써지는 건 아닐거야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다. 그럼에도 첫 술에 배부르고 싶다. 뭔가 방법이 있을 거야. 첫 술에 배부를 수 있는 기막힌 요술. 세상에는 이런 메시지가 판을 친다. 나 또한 여지없이 기적을 바라고 있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어제와 다르게 술술 써지는 글쓰기 실력을 갖고 싶다. 하늘에서 초능력이 나에게 뚝 떨어지는 마법을 바라는 것이다. 영화에서 많이 봐왔다. 갑자기 지능이 높아져 주식으로 돈을 손쉽게 벌어들이고, 갑자기 손끝에서 거미줄 같은 끈끈한 줄이 나와 세상을 구하고, 갑자기 사람들의 속마음을 읽어낼 수 있는 기묘한 능력 덕에 사람들의 인기를 얻어내고. 나에게도 이런 마법이 생기지 않을까. 오늘 써내려간 글이 책으로 발간되어 세상 사람들이 읽어주고, 작가를 환대하고,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달콤한 꿈. 한창 기분 좋게 상상하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유명하면 사람들이 나를 알아볼 테고, 가끔 길가에 쓰레기도 버리는데 비윤리적인 행동을 한다며 따가운 눈총을 받고, 급한 마음에 얌체처럼 주차해 이웃이 민원을 넣고 공공연히 세상에 알려진다면, 길가에서 주전부리도 곧잘 하는데, 사람들이 날 알아본다면 어쩌지. 나는 완벽하지 않고, 불완전한 사람으로 실수도 곧잘 한다. 나도 모르게 남들에게 해가 되는 행동도 했을 것이다. 언제나 상처 주는 쪽은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니. 유명세도 감당할 만한 그릇이 되어야 한다. 지극히 내향형에 가까운 나 같은 사람은, 너무 알려져도 속 시끄러워서 견디지 못한다. 결론이 내려지자, 글쓰기에 힘이 빠졌다.


에세이부터 써볼까. 제목이 훅해서 손에 잡아 든 에세이 책들은 술술 잘 읽힌다. 도수가 높지 않은 부드러운 맥주를 들이켜면 목구멍에서 미끄러져 내려가듯, 에세이의 문장은 걸림이 없이 부드럽게 읽힌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단어로 의미 있는 문장을 써내려가는 작가를 질투한다. ‘나도 이런 생각 했었는데, 먼저 써버렸네.’ 질투의 본질은 부러움이다. 부럽다는 말은 실은 나도 하고 싶다는 뜻. 이런 에세이라면 나도 쓸 수 있겠다, 용기를 갖게 되었다. 에세이 책이 범람하고, 누구나 쓸 수 있다고 현혹하고 있었다. 욕망하던 나는 현혹에 덥석 사로잡혔다. 에세이를 무작정 쓰기 시작했다. 


막힘없이 쉽게 읽힌다고, 그 글을 쉽게 썼다는 것은 아니다. 직접 글을 써보지 않은 사람들은, 퇴고의 과정을 상상하지 않는다. 퍼뜩 머리에 떠올려지는 생각들을 쓰면 글 한편이 짠하고 완성될 거라고 짐작한다. 내가 그랬다. 한 번에 써지지 않는다고 어린애처럼 푸념한다. 뭘 몰라서 그러는 거니 너그러이 이해해주길. 아마도 나처럼 첫 술에 배부르고 싶은 사람들이 적지는 않을 것 같다. 주변에서 한 번 써보고 안된다고 이내 포기한 사람들을 숱하게 봐왔다. 그들을 잡고 말했다. “유명한 작가들도 자기가 쓴 첫 원고는 쓰레기라고 했어요.”    


혼자서 글을 쓰다 보니, 초고까지는 대충 쓸 수 있었다. 하지만 글 한편이 완성되기까지는 많은 퇴고가 필요했다. 기분에 따라 초고를 써내려간 후, 다시 글을 매만지려 하면 그때부터 머리에 쥐가 나는 것처럼 저렸다.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몰라 나 몰라라 제쳐두었다. 노트북 폴더에는 초고만 잔뜩 쌓였다. 그동안 썼던 초고를 꺼내 다시 읽어봤다. 도통 무슨 말을 하려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초고를 쓸 때는 가슴의 울렁임이 있어 숨 가쁘게 썼지만, 흥분이 사라진 채 차분한 정신으로 마주한 초고는 어설픈 낙서에 불과했다.  


어설픈 낙서지만, 다시 회생시키고 싶었다. 낙서를 잘 다듬고 다듬어서 누군가에게 가 닿는 글로 탈바꿈시켰으면 했다. 초고를 한 편 꺼내 살폈다. 어디서부터 고쳐야 하는지가 아니라, 처음부터 다시 고민해야 했다. ‘도대체 내가 말하려는 게 뭐냐구!’ 


초고는 덜 익은 생각의 날림이었다. 이제부터가 정말 시작이다. 힘들다고 제쳐두었던 생각을 천천히 깊은 호흡으로 할 시점이다. 초고는 단서만 주고, 훌훌 떠났다. 다시 새로 쓰는 글이 되었다. 글을 쓰면서 생각들이 조금씩 익어갔다. 퇴고가 반복되면서 비로소 내가 뭘 말하려고 하는지 보이는 듯 했다. 더 선명하면 좋겠지만, 여기까지다. 명확한 글을 쓰려고 하다가는, 한편의 글이 완성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내가 느끼고 경험한 것을 충분히 전달했다면, 딱 거기까지가 내 이야기라 느꼈다. 


완성된 글 한편을 에세이 잡지에 기고했다. 채택이 될까, 안될까. 시험을 치르고 성적을 기다리는 수험생처럼 마음을 졸였다. 며칠이 지나 결과를 알 수 있었다. 첫 글은 운이 좋았는지, 바로 채택이 되었다. 우편으로 도착한 에세이 잡지를 펼쳐 제일 먼저 내 이름을 살폈다. 내가 쓴 글, 이 글을 쓴 사람이 바로 ‘나’라는 것을 실감하고 싶었다. 가족들에게 잡지를 보여주며 “이 글을 내가 썼어” 자랑도 했다. 글이 채택된 대가로 소정의 상품을 받았다.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기프트카드였다. 이 카드를 받아들자, 통장에 월급이 찍힐 때보다 더 짜릿했다. 글을 쓰고 보상을 받는 다는 것에 으쓱했다.   


기고는 이어졌다. 기고를 하면서 수 없는 퇴고를 견딜 수 있었다. 물론 나의 글이 채택 되지 않을 때도 많았다. 비중으로 따진다면 채택되지 않을 때가 더 많았다. 역시나 글쓰기에는 재능이 없구나. 좌절했다. 방방 들떠 자랑하던 나는 사라졌다. 채택이 되면 방실거리고, 채택이 되지 않으면 힘이 빠지고, 글쓰기의 재미를 잡지에게 빼앗겨버렸다. 다시 정신을 차려야 했다. 기고의 이유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글 한편을 완성하고 싶어서였다. 기고 덕분에 글 한편을 완성하는 과정을 오롯이 겪었고, 배움의 공간으로서 충분했다. 그 사실을 깨닫자, 기고의 횟수는 점차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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