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한계

by 홍시

언어는 과연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가. 문득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말을 아직 배우지 않은 어린아이들의 눈이 왜 그렇게 맑은지, 그 이유를 생각하다 보면 언어가 주는 편리함만큼이나 빼앗아 가는 것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언어가 없어도 사랑을 주고받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오히려 더 명확하고, 더 확실하다. 어린아이와의 눈 맞춤, 포옹, 몸짓과 발짓, 심지어 콧구멍을 벌렁거리는 사소한 움직임 속에서도 사랑은 또렷하게 드러난다. 설명이 없어도, 해석이 없어도 마음은 이미 전해진다.


그런데 언어에 능통해질수록 어른들은 사랑 앞에서 망설인다. 이것이 사랑인지 아닌지 재고, 따지고, 분석한다. 이제는 심리상담 전문가의 언어 없이는 자신의 감정조차 판단하기 어렵다고 느낀다. 나의 행동이 사랑인지 아닌지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스스로를 불신한다. 분명 느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확신하지 못한다.


언어는 똑똑함의 상징이며 사회생활의 기초다. 그러나 표면적인 언어만으로 진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언어는 ‘그럴듯하게 연기하는 데’에는 유용하지만, 진심이 오가는 순간에는 오히려 방해가 된다. 마음은 분명 그렇지 않다고 느끼는데도, 입 밖으로 튀어나온 다른 말 하나가 모든 것을 흐트러뜨린다. 그 언어는 곧 나의 세계가 되고, 나는 그 세계를 해석하느라 복잡해진다. 언어가 없던 순간에는 분명 확실했던 것들이, 말이 붙는 순간 흔들리기 시작한다.


누군가를 내 눈으로, 내 시각으로 설명하는 순간 그것은 해설이 된다. 그 시각으로 바라본 세상, 그 한 사람의 의견이 마치 내 인생 전체를 정의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진다. 내가 스스로 서사를 만들지 못하면, 타인의 정의에 쉽게 휩쓸린다. 그러나 그 정의라는 것은 대개 편협하고. 성적 하나, 결과 하나로 사람을 이러쿵저러쿵 평가한다. 해설자의 역할이 원래 그렇다. 많은 대중에게 ‘결과’를 전달해야 할 뿐, 그 안의 감정과 과정에는 관심이 없다.


수영대회에서 처참하게 레이스를 마쳤던 날도 그랬다. 결과만 보면 초라했지만, 내 안에는 이상하리만큼 자부심이 가득 차 있었다. 두려움을 뚫고 끝까지 완주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어디서든 당당할 수 있었다. 영상으로 다시 나를 바라볼 용기는 없었고, 솔직히 쪽팔리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도 나에게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 그런 감정은 금세 휘발되었다. 대신 ‘자부심’이라는 감각이 또렷이 자리를 잡았다.


수심 3미터를 덜덜 떨며 내려가던 황당한 시작, 심장이 멈출 것 같던 공포, 혼자만의 수영을 하는 배영의 외로움, 아무 생각 없이 팔을 내저으며 레일을 쳐 생긴 팔의 시퍼런 멍, 그리고 터치패드. 경기가 끝난 뒤에도 숨이 안정되지 않아 수영장을 쉽게 나오지 못해 겨우 경기장을 빠져나왔던 아찔한 순간까지. 그 모든 장면은 한순간도 잊히지 않는다. 지친 몸과 달리, 에너지는 오히려 차올랐다. 이 경험을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 강렬한 경험들은 해설자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기록으로 남지 않는 감정, 숫자로 환산되지 않는 순간들은 아무 이야기도 없는 그저 그런 행동이 된다. 내가 해설자의 언어에 귀를 기울이지 않기로 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나의 인생은 타인의 평가가 아니라, 내가 경험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사실이 머리를 꽝 내리쳤다. 내가 느끼고 통과한 순간들만이 나에게는 ‘찐’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경험조차 글로 옮겨지는 순간, 편협한 언어 속에서 그저 바보 같은 해프닝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인생의 ‘찐’은 바로 그런 바보 같은 장면들 속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완벽한 장면보다 어설픈 순간에 더 쉽게 공감하고, 영상 속에서도 일부러 바보 같은 장면을 연출하려 애쓴다.


바보 같은 해프닝일수록 진실한 경험에 더 가까이 다가가 있다. 언어로 다 담아낼 수 없기에, 오히려 더 분명한 순간들. 다시는 떠올리지 않으려 했던 그 바보 같던 나의 경험이 몸과 마음에 차곡차곡 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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