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경꾼으로는 인생의 재미를 느낄 수 없다. 인생의 참맛은 언제나 경험자의 몫이다. 환희와 절망, 실패와 성취 같은 단어들은 하나의 맛을 가리킬 뿐이다. 그 맛들이 뒤섞이고 겹쳐지며 비로소 한 사람의 인생사가 완성된다. 멀찍이 떨어져 바라보는 구경꾼에게는 그 조합의 깊이를 알 길이 없다.
‘팔짱을 끼다’는 두 팔을 마주 끼어 겨드랑이에 손을 넣는 자세를 말한다. 심리적으로는 방어와 거부, 혹은 권위를 의미하고, 관용적으로는 어떤 상황에 개입하지 않고 지켜본다는 뜻을 가진다. 나는 오랫동안 이 자세로 살아왔다. 팔짱을 낀 채, 안전한 거리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방관자의 삶이었다.
중학교 학창 시절, 쉬는 시간마다 연예인 책받침을 꺼내 놓고 떠들던 소녀들이 있었다. 나는 그들을 팔짱을 낀 채 바라보았다. ‘저게 뭐가 좋지?’ 만질 수도 없고,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에 열광하는 일이 쓸모없게 느껴졌다. 그들의 세계에 한 발짝 들어가 볼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멀리서 혀를 차며 판단했다. 유치하고 어리석다며 은근히 아래로 내려다보았다. 물론 그런 마음을 겉으로 드러낸 적은 없다. 나는 언제나 아무 상관없는 사람처럼 조용히 머물렀다.
내 생각이 단 한 번이라도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벌어질 위험을 감당하고 싶지 않았다. 친구가 많은 편도 아니었고, 그나마 함께 밥을 먹고 집에 갈 친구마저 잃고 싶지 않았다. 왕따라는 말을 쓰지 않았을 뿐, 나는 공식적인 고립을 감당할 만큼 단단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선택한 방식이 방관이었다.
경험하지 않고 내뱉은 말들은 관계를 상처 냈고, 누군가는 그 말들로 인해 나를 떠났다. 내 편협한 생각주머니 안에서 단정해 버린 수많은 관계들. ‘내 생각만이 옳다’는 자만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행동 속에는 분명히 자리하고 있었다. 분명 내 잘못이었음에도 나는 책임을 피했다. 오해할 만한 상황이었다고, 나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스스로를 변호했다. 남에 대해 함부로 지껄여 왔구나,라는 자각이 밀려온다.
구경꾼들이 유독 말이 많은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이 내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경험하지 않았기에 생각은 꼬리를 물고 무엇이든 말할 수 있다. 다만 그 말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만은 자각하지 못한 채, 그 말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단정한다. 경험 속에서 만들어지는 해석은 오롯이 그 사람의 몫이다.
이제 나는 해석보다 질문을 택하려 한다. 팔짱을 끼고 판단하는 대신, 한 걸음 다가가 묻고 싶다. 그 사람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충분히 귀 기울이고, 공감하기를 시도하고 싶다. 구경꾼으로 남지 않기 위해, 오늘은 팔짱을 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