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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절에가다 Jan 25. 2024

<취향 존중 육아> 낯설다 반복하다 낯익다

무한 반복하는 아이의 취향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기나긴 겨울 방학, 심심해하던 아이는 심심한 채로 심심한 무료함을 즐겼다. 무료함을 책으로 달래면 얼마나 좋을까만은, 독서가 힐링이자 희열인 것은 나만의 일. 아이는 독서를 제외한 다른 모든 활동이 힐링이자 희열인 듯하다. 책을 아무리 사다 날라도 꿈쩍도 하지 않는 아이 곁에서 나는 언젠가부터 더 이상 아이를 위해 책을 사지 않는다.


책 이외에 어떤 것이 아이의 눈길을 사로잡는지 나는 보통 우리의 일상에서 관찰한다. 여전히 서로 밀착된 일상을 공유하며 지내고 있고, 그래서 서로의 취향을 가까이서 알게 된다. 불균형적인 사랑의 역학은 여기에도 적용되는지, 아이는 엄마의 취향에 대부분 관심이 없다. 반면 엄마는 아이의 취향에 시선을 멀리 둬보지만, 온 세포는 아이에게로 향해있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다.

7,8 살 무렵, 뱅크샷을 날리던 아이

아이는 지금보다 훨씬 어린 시절부터 그랬다. 뭔가에 꽂히면 한 자리에서 미동 없이 줄곧 그것만 했다. 기어 다닐 즈음 플라스틱 그릇 뚜껑을 보면 기저귀 찬 엉덩이를 철퍼덕하고 앉은 채 뚜껑을 돌리고 또 돌리고 또 돌렸다. 4살 즈음에는 플레이도우를 가지고 손으로 조물딱거리며 세, 네 시간을 내리 앉아 있기도 했고, 지하로 이어지는 투명 엘리베이터만 보면 수십 번을 오르내리며 이곳저곳을 관찰해야만 했다. 한 때 당구 경기 시청에 빠져있을 때는 책으로 당구대를 만들고 블록공을 연필로 때려 시종일관 당구를 하기도 했다. 자려고 누우면 천장이 당구대로 보인다는 얘기를 듣고 블록공을 아이와 함께 쓰레기통에 버려야만 했다. 뭐 하나에 빠지면 주구장창 반복해야 직성이 풀이는 아이의 습성을 그때 나는 잘 알지 못했다.



지금도 이 아이, 꽂히면 반복하는 습성은 여전하다. 꽂히면 한동안 그것만 주구장창 반복하기에 나는 마음을 졸인다. 제발 잘 좀 꽂히자. 언제나 내 바람과 다르게 아이는 엄마가 원하는 방향과 다르게 나아가는 듯 보인다. 꽂혔으면 하는 책들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우연히 만나게 된 영상들에 말이다. 아뿔싸 또 꽂혔다.


방학 동안 아이가 즐겨본 영어 영상, 넷플릭스의 '하이퍼드라이브.' 우연히 발견한 이 시리즈를 아이는 매일 보고 또 보고 있다. 보고 또 보다 직접 해보고 싶었는지 과월호 잡지들을 가져다 길을 만들고, 색종이로 개구리를 접어 하이퍼드라이버의 경주용 자동차를 만들었다. 두 시간 동안 가만 앉아서 만든 경주용 개구리들이 하이퍼드라이버가 되어 잡지로 이어 만든 트랙에 나섰다. 리그전을 하다 토너먼트번을 하다 우승자를 가리겠다고 몇 시간 동안 개구리 엉덩이를 손톱으로 퉁기고 있다. 손톱은 어느새 갈라져 있었다.


또 한 번은 또 다른 영상에 빠져 줄곧 보고 또 봤다. 유튜브에서 우연히 3d 펜과 유토로 거북선을 만드는 영상. 건축 혹은 조형 전문가처럼 보이는 남자의 두 손이 쉴 새 없이 움직이며 거북선을 만들어 가는 영상이었다. 이 아이 또 발동했다. 보고 보고 또 보다 보니 만들만하다 여겨졌고, 그러다 만들고 싶어진 것. 영상에 나오는 그 사람은 전문가처럼 보인다는 말을 여러 번 전했지만, 자신도 할 수 있다며 거북선에선 자신도 전문가라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허세 가득 기대가 지나치면 실망이 큰 법이라는 걸 나는 잘 알기에(내 아이는 머릿속에 환상이 가득하다), 이걸 어떻게 만드냐며 엄마는 절대 못하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절대’라는 말의 무게가 아이에게 오기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이의 실망에 대비해 불쑥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엄마, 난 할 수 있어!”

3d 펜으로 만든 거북선 뼈대


5시간을 한 자리에 앉아 거북선의 뼈대를 조형하고 있는 장인 한 사람. 이 아이는 정말 지(자기) 좋은 거 해야 한다. 아이의 엉덩이를 무겁게 하는 방법은 아이 지 좋은 거 찾아주는 것. 하라 하면 절대 하지 않을 이 아이, 본인 스스로 할라치면 물불 가리지 않을 이 아이. 아이의 머리에는 멋지게 완성될 거북선이 둥둥 떠다니고, 만들어지고 있는 내 앞의 거북선 뼈대는 뭔가 모르게 영상 속과 달라 보이지만, 그럼에도 유토로 뼈대 위를 덮으면 된다는 생각에 3d 펜을 열심히 움직였다. 엄마의 직감은 대부분 빗나가지 않는다. 영상 속 전문가의 3d 펜과 어린이용 3d 펜이 좀 달라 보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내심 모르는 척했다. 환상으로 가득 차 있는 아이에게 옆에서 뭐라 뭐라 하는 것은 엄마의 잔소리나 개입으로 밖에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눈을 질끈 감고 못 본 척 모르는 척 바쁜 척하는 나란 엄마.

아이는 뼈대에 유토를 붙이다 아니 다시 떼어내다, 그러다 씩씩 거리는 소리와 함께 5시간의 대장정의 결과가 쓰레기통으로 직행!

아이의 두 눈은 벌게져있고, 양손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유토와 필라멘트를 탈탈 털어내더니 노트북을 가지고 침대방으로 직행!

방에선 갑자기 역사스페셜의 진행자가 거북선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소리가 퍼져 나오고…

아이는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머릿속에 가득 차 있던 환상을 밖으로 밀어낼 시간. 5시간의 꿈이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을 받아들일 시간. 혼자 마음을 삭힐 시간.


아이에게 살짝 다가가 건넸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란 말이 있어. 우선 시도를 했으니 실패도 성공도 있겠지. 실패든 성공이든 과정도 중요하겠지. 무수한 실패는 실패가 아니라 성공으로 가는 과정이자 어머니야.”

아이는 다행히 내 말에 “캬”라는 감탄사로 응수했다.


아이가 기억하기를 바란다. 앞으로 숱한 실패가 있더라도 실패는 실패가 아니라 과정이자 성공의 어머니란 사실을. 시도가 있었기에 실패의 쓰라림도 있다는 것을. 그 쓰라림이 두려워 시도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않길. 실패를 실패로 받아들이지 않길. 지난한 실패는 앞으로 있을 찰나의 성공을 위한 그림자와 같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이렇게 또 우리들의 긴 겨울 방학이 지나간다. 아이가 어린 시절 주구장창 하나만 반복하는 아이가 신기했고 궁금했다. 의아하기까지.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같은 영화를 수십 번 보고, 같은 운동을 하루에 5시간씩도 한다. 갔던 곳을 또 가길 원하고, 갔던 여행지에 또 방문하길 원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다른 영화를 보고자 부탁하고, 다른 운동을 시도하도록 권유하고, 가보지 못한 낯선 여행지를 가고자 노력한다.

또한 아이의 새로운 시도에 박수쳐주고 아이가 실패하면 더 박수쳐준다. 실패도 낯선 경험이니까. 낯선 경험도 반복되면 낯설지 않게 되니까. 더 이상 낯설어 낯선 것을 시도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무수한 실패 역시 너의 반복하는 습성으로 극복하길 바라며. 속상한 감정 툴툴 털어내고 다시 나아갈 수 있도록 말이다. 너의 반복하는 습성이 실패에도 적용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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