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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절에가다 Jan 27. 2024

<그릿 육아> 그릿은 재미에서 나온다

하루 탁구 5시간을 치는 아이, 작가지망생을 가르치는 작가선생님

긴긴 겨울 방학도 곧 끝이 난다. 잠깐 며칠 등교를 하고 또다시 봄방학이지만, 개학이라는 말에 가슴 설레는 것이 나만의 일은 아니다. 다행히 아이도 개학을 기다린다. 학교에서는 덜 심심하다는 말을 하면서.


아이의 심심함이 내 탓과 같았던 때가 있었다. 외동이라 더 심심한가, 형제들과 울고 웃으며 그 나이 겪아야 할 희로애락이 있어야 할 텐데, 같은 생각들이 머릿속에 차올랐고, 결국 나는 아이 옆에 바짝 붙어 아이의 형이 되기도 때론 동생이 되기도 하며 오랫동안 아이의 놀이 상대가 되었었다. 온갖 상황을 만들어 그에 맞는 대화를 주고받으며 매일 역할 놀이를 하던 때가 있었다.


다행히 지금은 엄마 대신 함께 놀 상대들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학교에 가면 어찌 됐든 급식을 함께 먹는 친구들이 있고, 점심 먹고 난 후 짬시간 같이 딱지를 치는 친구들이 있어 심심해하지 않는다. 방학이 되니 심심한 나머지 되려 학교에 가는 게 낫겠다는 말을 하는 걸 보니 내심 다행이라 여기게 된다.


항상 겨울방학은 추위로 인해 집콕 기간이 길 수밖에 없지만, 올해 아이는 행복해 보인다. 겨울에도 덜 심심할 수 있는 최고의 놀이감이 하나 있다. 그동안 학교에 다니느라 실컷 하지 못했던 운동, 탁구. 학교를 다닐 때는 다음날을 위해 적당히 운동을 하고 돌아왔다. 에너지가 많은 아이가 에너지를 남겨둔 상태로 집에 오는 날이 많았다. 그렇기에 방학이 되어 즐거운 이유 하나는 단지 온 에너지를 소진하며 실컷 탁구를 칠 수 있다는 것. 일주일에 세 번, 월 수 금 중에 이틀 15분 레슨을 받고, 나머지는 모두 자유 탁구 시간. 자유 탁구 시간이 3시간에서 4시간이 되더니 5시간을 넘어서 며칠 전에는 6시간을 찍었다.

2시부터 8시까지.


사실 함께 탁구를 배우고 있는 나는 15분 레슨 후 잠깐 렐리 정도 하다 슬며시 사라진다.


"엄마, 근처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그리로 와.."


그때부터 나에게 아이의 방학 중 유일한 나만의 자유시간이 주어진다. 엄마의 이 꿀맛 같은 자유시간을 익히 아는 듯, 엄마의 행복을 몹시도 빌어주는 듯, 엄마가 있는 장소로 오는 아이의 시간이 점차 늦어지다 결국 같은 자리에서 나는 6시간을 앉아 있게 되었다.

6시간. 누구는 맘껏 운동을 해서 즐겁고, 누구는 실컷 자유를 누려서 행복하다.

일주일에 3번 6시간 자유로울 수만 있다면 아이와 긴긴 겨울 방학도 거뜬히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렇게 좋은 놀이감이 어디에 또 있으랴. 날씨에 구애받지 않고, 안전한 실내에서 형 친구 심지어 어른들과 함께 땀 흘리며 즐길 수 있는 놀이가. 초등부 탁구 우승 2연패의 신화를 이어가기 위해서 아이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발바닥에 땀이 흥건해질 정도로, 허기를 잊고서 탁구를 치고 있다.


6시간 동안 운동을 하고 멀찍이서 나를 향해 걸어오는 아이의 모습은 마치 '러너스 하이'라는 걸 시각적으로 표현한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뻘건 얼굴에 힘이 풀린 듯한 두 눈, 하지만 화색이 돌고 생기가 맴도는 얼굴이었다. 살짝 미소 지으며 나에게로 오는 아이의 모습을 영원히 내 눈에 넣어 두고 싶었다. 좋아하는 그 무엇에 뛰어들어 허기를 잊을 정도로 미친 듯이 몰두하고 돌아온 아이의 얼굴을. 내 눈에 꼭 박아 넣어 가끔 쏙 올라오는 엄마의 불안함을 잠재울 수 있는 용도로.



이번 겨울 방학 엄마의 불안함을 잠재우는 아이의 재미 또 하나가 있었으니, 자기 주도 글쓰기. 아이는 방학 동안 보통은 즐겁지 않을 글쓰기를 즐겁게 했다. '이은경' 선생님이 집필한 글쓰기 책 10권을 가지고서 그날 원하는 것을 골라 글을 썼다. 원래는 자유글쓰기, 생각 글쓰기, 논술 쓰기 이렇게 세 권을 마련해 아이가 그날 원하는 대로 골라잡아 자유롭게 글을 쓰도록 준비했다. 하지만 이 아이, 책 표지 안에 쓰여있는 단계별 글쓰기 교재들을 보고서 모두 다 가지고 싶어 했다. 가지고 싶다? 소유하고 싶다? 소유만 하고 보기만 하겠다는 말? 그래 뭐든 그냥 보기만 해도 도움이 될 것 같지만, 아이의 글쓰기 책 소유 욕구가 신기해 총 10권을 모두 구매해버렸다.

뭐든 레벨을 좋아하는 이 아이

아이는 10권을 모두 찬찬히 둘러보더니 제일 어려운 단계로 보이는 '교과서 논술 매운맛'을 원한다고 했다. 원한다? 쓰기를 원한다는 말? 아니면 날 쓰게 하겠다는 말? 아이는 가르치는 것을 좋아한다. 탁구도 글쓰기도. 특히 엄마에게 가르치는 것을 좋아한다. 아이가 어린 시절 둘이서 선생님 놀이를 많이 해서 그런가, 그때나 지금이나 날 가르치려 든다. 날 닮아 가르치면서 희열을 느끼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나 다를까. 엄마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자기 주도 학습에 끼여있는 글쓰기를 나와 함께 하고자 했다. 혼자 하면 재미없다나. 공부를 재미로 하냐는 말이 목젖에 걸려 달랑달랑했지만, 아이의 글쓰기를 위해서 이 한 몸 던져야 할 때라는 사실을을 엄마의 촉이 신호를 보낸다. 나는 흔쾌히 정드래곤쉽(아이의 필명) 작가 선생님 수하 작가 지망생으로 들어가 글쓰기를 배웠다. 정드래곤쉽 작가 선생님은 자주 내 논리를 꾸짖으시며 글쓰는 방법을 가르쳐주셨다. 소피아님 글은 논리가 맞지 않는다, 했던 얘기 또 한다, 핵심만 얘기해라 등 상당히 자주 지적질을 하셨다. 그러려고...


작가 지망생을 가르치는 작가 선생님

작가 선생님도 내 앞에서 글을 쓰셨다. 이은경 글쓰기 책 중 가장 어려운 단계, '교과서 논술 매운맛'을 골라 쓰셨다. 민식이법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촉법소년에 대한 내용도 알게 되었다. 반면 나는 말랑말랑한 일기 같은 글을 선호해 '주제일기쓰기' 혹은 '표현글쓰기'를 골랐다. 작가 선생님의 성화에 마지못해 '교과서 논술 순한맛'을 한 번 쓰기도 했다.

그리고 정드래곤쉽 작가 선생님의 수하 학생 중 우리 집 나머지 한 명. 필명을 갖고 있지 않은, 작가 선생님과 똑닮은 남자가 있었으니, 작가 선생님의 열정에 못 이겨 주말 글을 몇 편 써 내려갔다. '내일 죽는다면'이란 글을 정성 들여 써서 정드래곤쉽 작가 선생님을 울리기도 했고, '코로나 재난 지원금을 가난한 사람에게 더 주어야 한다'라는 주장에 합리적인 근거 세 가지를 모두 대며 논리적인 남자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세어보니 방학 동안 정드래곤쉽은 18편의 글을 썼고, 나는 10편, 남편은 3편을 썼다. 이 아이가 이렇게 즐겁게 글을 쓴 적이 있었던가. 글쓰기 책 10권을 찬찬히 살피며 자신의 글쓰기 실력은 최고 레벨이 적당하다며 가장 매운맛의 글쓰기 책을 골라 써내렸갔다. 아이의 허세가 가끔 엄마의 불안함을 잠재우는 효과가 있다. 허세 가득한 아이의 자만심, 하지말라 하면 더 하고 싶어하는 청개구리 심보, 아이의 생활 모든 요소에 없어서는 안 될 재미. 이 삼박자가 아이를 쓰게 만들었다. 자기주도력에 재미는 필수적이다. 열정과 노력의 함수, 그릿을 키우려면 우선 재미가 있어야 한다. 재미가 열정을 키우고 끈기를 키운다. 글쓰는 나의 일상에서 글쓰는 재미가 나를 키우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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