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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절에가다 Dec 20. 2023

<마음이 자라는 순간> 한살이

식물이 자라듯, 곤충이 성장하듯

1학년 봄, 그때도 강낭콩을 심었다

올해 봄 분갈이를 했다. 얼추 자란 강낭콩 줄기가 하늘을 찌를 듯하여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아이와 한 화분에 강낭콩 3개씩을 심었었고, 일주일이 되는 날 분갈이를 했다. 아이는 올해 4학년 과학시간에 식물의 한살이에 대해서 배웠고, 모둠별로 강낭콩을 심었다고 했다. 벌써 꽃을 피우고 있다는 말과 함께 집에서도 키우고 싶다고 했다.

1학년 입학하자마자 코로나가 한창이었던 그때, 학교에서 하지 못했던 강낭콩 키우기를 집에서 열매 꼬투리가 될 때까지 키웠던 적이 있다. 그 후로 3년이 지났다. 분갈이를 하며 문득 흘러간 세월을 체감한다. 아이는 그때보다 자랐다. 혼자서 씨앗을 심고 물을 주었고 분갈이도 곧잘 한다. 손도, 발도, 키도 그리고 마음도 자랐다. 여전히 자라고 있고 앞으로 더 자랄 것이다.


아이가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때가 종종 떠오르기도 한다. 아이의 성장을 실감한 이런 순간에.

아이의 걸음마 시절 부모는 아이를 줄곧 따라다니며 아이의 동선을 함께 한다. 위험 요소가 있는 곳은 미리 앞서 차단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곳에서는 아이가 한껏 자유롭도록 지켜보기도 한다. 아이의 시선에 함께 머물러보기도 하고, 아이의 놀이 친구가 되어주기도 한다. 부모가 되는 것은 어린아이가 되어보는 일이기도 하다는 듯이.

4학년 봄 분갈이

그러다 아이는 자란다. 머물러 있지 않고, 조금씩 아주 조금씩 자란다. 마치 식물이 싹을 틔워 조금씩 아주 조금씩 자라듯. 하루가 다르게 자라 있는 강낭콩 줄기처럼. 강낭콩을 키우며 아이의 성장을 실감한다. 식물의 한살이가 내 아이의 압축된 성장과 같아 보인다. 비록 내 아이는 강낭콩보다 훨씬 더 자라야겠지만. 더 오래 지켜봐야겠지만. 그리고 아이가 자라는 만큼 부모 또한 그만큼 더 자라야 서로의 성장 속도가 얼추 맞춰질 수 있겠지만. 하지만 아이와 다르게 부모는 어쩌면 어제의 자리에 머물러 있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아이의 어린 시절의 너와 나의 모습 그대로, 아이의 놀이 친구였던 모습 그대로, 노심초사 아이를 따라다녔던 그때 모습 그대로. 강낭콩 줄기처럼 쭉쭉 자라 있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도 부모의 눈에는 아이의 어린 시절이 겹쳐 보며 그때 모습 그대로 내 아이를 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제보다 오늘 더 자라 있는 아이와 어제에 머물러 있는 부모. 훌쩍 자라 있는 아이와 더 이상 자라지 않는 부모. 아이와 강낭콩을 키우면서 강낭콩의 성장이 아이의 성장과 다르게 보이지 않았고, 아이의 성장에 부모의 성장 또한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기도 했다.  


3학년 가을 애벌레를 데려왔다

집에서 강낭콩 씨앗을 심어 열매를 맺는 것도 지켜보았지만, 아이는 장수풍뎅이도 키워본 적이 있다. 작년 가을 아이가 3학년이었을 때, 아이는 곤충에 잠시 빠져있었을 때가 있었다. 특히 장수풍뎅이와 사슴벌레, 그 둘의 싸움 장면을 우연히 보게 되었고 이내 매료되었다. 단연 그리스로마 신화의 영웅 헤라클레스의 이름을 딴 '헤라클레스 장수풍뎅이'를 가장 좋아했다. 이름처럼 가장 힘이 세고 커다란 뿔을 가진 멋진 장수풍뎅이. 덕분에 당시 아이는 사슴벌레 풍뎅이류 백과사전에 푹 빠져 모르는 곤충이 없었고, 결국 여주 곤충박물관에서 장수풍뎅이 애벌레 두 마리를 데려왔다. 한 마리는 번데기가 된 채로 굳어버렸고, 다른 한 마리는 다행히 건강하게 날갯짓을 하는 것까지 볼 수 있었다.

애벌레에서 번데기, 성충

식물은 아침 눈뜨면 조금씩 키가 자란 모습을 보며 성장하고 있음을 느꼈다면, 곤충은 그것보다 훨씬 더 오랜 인내심이 필요했다. 흙속에 파묻힌 애벌레는 꿈틀거리다 번데기가 되기 위해 어느 순간 움직임을 멈춘다. 100일의 기도처럼 3개월 동안 미동도 하지 않고 애벌레는 번데기가 되는 과정을 거친다. 아이는 호기심 가득 애벌레 두 마리 중 한 마리를 자주 흙속에서 꺼내 쪼물딱하다 일찍 하늘나라로 보내버렸고, 그 슬픈 경험으로 3개월을 꾹 참아 나머지 한 마리가 성충이 되는 모습까지 볼 수 있었다. 정말이지 경험은 아이들에게 배움을 준다.


그 한 마리를 키우며 아이는 반려인(?) 반려동물이라는 존재에 대해 절절히 경험했다. 외동인 아이에게 이 장수풍뎅이가 어떤 의미였을지 어떤 친구였을지 형제보다 더한 존재였음은 상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아이는 그에게 이름을 지어줬다. ‘장수클래스’라고. 장수풍뎅이와 헤라클레스를 결합한 이 멋진 이름을 아침마다 애절하게 부르면서 눈을 떴다. 집을 만들어주고, 놀이목을 넣어주었다. 곤충 젤리를 먹이며 무럭무럭 자라게 했다. 학교에서 돌아와서는 장수클래스를 통에서 꺼내 만지작거리며 놀았다. 작은 사육통 안이 답답할 것 같다며 속상해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자연으로 보내주기는 아쉬워하며 내 손안에 두고 즐겼다.


특히나 이 녀석은 이름값을 톡톡히 하며 우리 가족에게 즐거운 오락거리를 제공해 주었다. 어스름 저녁이 되면 그 좁은 사육통 안에서 푸드덕푸드덕 날갯짓을 했다. 깜깜한 밤마다 수상한 소리를 내며 존재감을 드러냈으니, 엉덩이를 씰룩거리다 딱딱한 겉 날개를 살짝 벌려 그 속에 자리한 얇은 날개를 펼치며 자유롭게 비상하려 시도했다. 자유로운 영혼이 되고자 밤마다 시도하는 그는 ‘장수클래스.‘ 사육통 세상이 태어나자마자 전부인,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숨겨져 있는 본능을 감출 수 없는 그는 장수풍뎅이.


아이가 물었다.     

"엄마, 장수풍뎅이가 지능이 높다고 하는데, 얘는 왜 바보같이 자꾸 날려고 하지? 좁은 사육통 안에서.. “


적절한 답을 찾으려 고민하다 나는 아이에게 말했다. 좁은 세상이지만 매일 밤 날기 위해 시도하는 장수클래스가 너와 닮았다고. 시도하고 도전하려 노력하는 너와 닮았다고. 더 큰 세상을 꿈꾸며 비상하려는 장수클래스와 너는 무척 닮았다고. 너의 마음에 밤마다 날갯짓하는 장수클래스가 자리하는 것처럼 앞으로 너의 삶도 그처럼 멋지게 비상하길 바라며. 장수풍뎅이의 본능과 너의 삶의 당위성을 연결 지으며.


안타깝게도 장수클래스는 한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장수풍뎅이의 본능을 좁은 사육통 안에 오래 가두는 것은 순리를 거스리는 것이었다. 밤마다 비상하려 시도한 장수클래스는 우화 한 지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딱딱히 굳어버렸다. 애벌레가 우리 집에 오고 넉 달이 지난 어느 날에.


미동 없이 딱딱하게 굳어버린 장수풍뎅이를 마주하고 내 아이는 한동안 초점을 잃은 채 주저앉아 있었다. 아이의 두 눈은 벌겋게 번져 있었고, 슬픔이 관통한 아이의 가슴은 투명했다.


"엄마, 입맛도 없고 밥도 먹기 싫고 아무것도 하기 싫어.."     


이를 어쩌면 좋을까. 아이는 죽음이란 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영원히 함께 있을 것만 같았던 그 무엇이 한순간에 차갑게 굳어버렸다.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다. 더 이상 날갯짓하지 않았고 더 이상 만나지 못한다. 함께 한 어제는 이미 추억이 되어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고, 내일은 또다시 혼자다. 그것이 내 삶에 존재하지 않았던 그때처럼.


방법이 없었다. 아이를 슬픔에서 구해낼 방법이. 누군가의 죽음은 그런 것이니. 애도하는 시간은 마음을 준 만큼 길어질 것이니. 처음으로 자신의 온전한 마음을 준 아이의 그에 대한 애도의 크기는 가늠하기 어려웠다.

방법은 있었다. 내가 쓰곤 하는 방법. 슬프면 슬픈 만큼 비워내고 게워내고, 기쁘면 기쁜 만큼 드러내고 표현하는 방법, 그것은 글쓰기. 내 안의 모호한 감정을 종이 위에 뱉어내고 감정을 손으로 쓰면서 치유되는 신비한 쓰기라는 세계. 나는 아이에게 권했다. 지금 너의 슬픔을 뱉어내어보라고. 드러내서 슬픔을 종이 위에 던져버리라고. 어떤 글이든 상관없다고.


아이는 거부하지 않았다. 뭐라도 해야 했다. 아이는 거침없이 써 내려갔다. 마치 슬픔의 감정을 하나의 작품으로 승화하는 한 마리의 어린양처럼.


"엄마, 나 동시 썼어.. 근데 진짜 쓰고 나니까 좀 나은 것 같아.. “



우리는 장수클래스를 집 마당 앞뜰에 묻어주었다. 아이가 등하교하며 매일 인사할 수 있는 적당한 장소에. 그리고 마지막 인사를 했다.


 "잘 자.. 편히 쉬어. 우린 함께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내일 학교 가는 길에 들를게. 안녕. “


아이는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더 자란다. 식물처럼, 곤충처럼, 살아있는 그 무엇이든 그것처럼.


3학년 아이의 자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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