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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절에가다 Mar 28. 2024

꿈과 이상을 찾아서

<달과 6펜스> 서머싯 몸

"나는 그려야 해요."

<달과 6펜스> 74쪽




제목, '달과 6펜스'


제목과 숨바꼭질이 끝이 났다. 마지막 책장을 넘길 때까지 책 속에 꼭꼭 숨겨져 있는 제목을 찾으려 했지만, 나는 이 숨바꼭질에서 영원히 술래로 남아있다. 대체 왜 작가는 독자와 숨바꼭질을 하려 할까. 아니 대체 왜 나는 누가 시키지도 않은 술래를 자처해서 이 숨바꼭질을 하고 있을까. 작가는 분명 의도적으로 제목을 숨겼을 것이다. 나처럼 피상적으로 읽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듯이. '활자 그대로가 아니라 그 안에 녹아 있는 은유와 상징을 느껴보세요'라고. 개인적으로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스토리가 마치 어떤 어려운 미술작품을 보는 듯했다. 미술관 안에 고이 간직된 오래된 그림 속에 작가가 의도적으로 숨긴 상징들과 숨바꼭질하듯이.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즐길 수 있다는 말처럼, 이 소설 또한 뭔가를 알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달과 6펜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밤하늘의 둥근 달을 상상해 보자. 어두운 밤을 밝히고 있는 둥근 달 그리고 그 은은한 달빛. 그것은 은화의 빛깔과 닮아 보인다. 은빛의 달과 은화. 하지만 달은 하늘에 떠 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아야 볼 수 있는 어떤 것. 6펜스 은화는 우리나라 100원짜리 동전과 얼추 비슷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눈을 잘 씻고 땅을 보아야 겨우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닮아 보이지만, 하늘과 땅과 같이 정반대의 어떤 것을 상징한다. 또한 보름달 아래에서 소원을 비는 행위처럼, 달의 의미는 인간의 어떤 '이상향의 추구'를 뜻하고, 반면 6펜스는 인간의 삶에서 '물질적 추구'를 뜻한다. 그러나 보잘것없는 몇 닢의 동전이다. 인간이 추구하는 천박한 세속적 가치를 작가는 6펜스라는 하찮은 동전 몇 개로 나타냈는지도 모른다. 꿈과 이상을 지향하는 삶과 물질적 가치만을 좇는 삶을 '달과 6펜스'라는 제목으로 나타내지 않았을까. 여기서 궁금증이 하나 생긴다. 왜 6일까. 또 어떤 상징이 들어 있을까.




꿈과 이상을  찾아 떠나는 여정


<달과 6펜스>는 화가 '고갱'의 인생을 바탕으로 그려진 소설이다. 주인공 찰스 스트릭랜드의 삶이 고갱의 삶을 닮아있다. 영국 런던 증권가 중개인이었고, 후에 파리에서 화가의 삶을 살아간다. 그러고는 타이티 섬에서 원주민들의 삶을 화폭에 담아낸다. 인생에서 이와 같은 대략의 큰 줄기는 두 사람이 닮아있다. 작가 서머싯 몸은 사실과 허구를 섞어 고갱의 삶을 대변하는 주인공 스트릭랜드를 창조했다. 고갱의 삶도 주인공처럼 극적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스트릭랜드는 보통의 소설에서 등장하는 꽤 극적인 요소를 가진 사람이다. 증권업을 했다면 삶이 빈곤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그 시대 보통의 평범한 가정을 꾸리며 살고 있었다. 그의 아내 또한 당시 사교계에 발을 딛여 사람들을 초대하며 사는 보통의 여성이었고. 그러다 갑작스럽게 주인공은 무일푼으로 떠난다. 가족과 부 명예들을 뒤로하고서. 그는 파리로 가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가난한 예술가가 된 채 불우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화자인 '나'는 소설을 쓰는 작가로 그의 삶에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그의 행적을 이해할 수 없어하면서도 간혹 공감을 느끼기도 한다. 자신도 소설을 쓰며 인물을 창조하고 스토리를 만들어내며 해방감을 느끼기도 하고, 자신의 욕망을 소설에 녹여내면서 자유로운 영혼이 되기도 한다면서. 혹시나 스트릭랜드도 그동안 억압된 현실에서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꿈과 이상을 찾아 자유롭기 위해 떠난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17년의 결혼 생활, 아내와 두 아이, '잘 정돈된 행복' 편안한 삶이지만 타성에 젖은 삶. 쳇바퀴 도는 마냥 변화 없이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이 오늘 같은 삶. 단지 저 멀리 있는 죽음에 하루하루 다가가는 삶. 나이 40이 불혹이라고 했던가. 스트릭랜드는 스스로에게 유혹 당한 것이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 내 꿈이었던 그 무언가를 찾아서 떠나야만 한다. 하루를 살더라도 하고 싶은 걸 하며 살자! 그동안 '땅을 향해 있던 눈을 들어 하늘의 달을 보게 된 인물', 스트릭랜드. 6펜스만 가지고 있어도 괜찮다. 달과 함께라면...


소설이라 가능한 것일까. 고갱의 삶 또한 주인공과 비슷했을 것이다. 소설 속 인물만이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도 가능한 일이다. 타성에 젖은 삶을 박차고 나가 내가 꿈꾸던 일을 하고자 밑바닥 인생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있을지도. 용기의 문제일까. 아니면 꿈이 없는 것이 문제일까. 런던에서 파리, 타히티로 꿈과 이상을 찾아 떠난 주인공의 삶이 마냥 극적이라 치부하기에는 뭔가 좀 씁쓸하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소설 속 주인공이 되고픈 마음만 있을 뿐, 실은 마음속 저편에 저항감이 가득하니 말이다. 지금 이 순간도 핑계대기 바쁘다. 이래서 안돼 저래서 안돼... 혹은 나는 꿈같은 거 없어...




예술이란 것에 대하여


파리에서 만난 또 다른 화가 더크 스트로브는 유일하게 그의 천재적인 예술성을 알아본다. 스트로브는 근근이 그림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화가지만, 자신이 가지지 못한 위대성을 그에게서 본 것이다. 예술에 대한 감식안은 있으나 그리 재능이 없는 스트로브는 그를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스트로브 또한 가업인 목수를 뿌리치고 화가가 되겠다고 고향을 떠나왔다. 현재 돈이 되는 그의 그림과 돈이 되지 못하고 알려지지 않은 스트릭랜드의 그림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할까. 천부적인 소질을 가진 예술가는 정말 살아생전 빛을 보기 어려운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스트릭랜드를 포함하여 그 천재적인 예술가들의 공통점 또한 성격적으로 결함이 있어 보이고.


결국 스트릭랜드는 진리와 자유를 추구하는 '영원한 순례자'를 자처하며 파리에서 타히티 섬까지 건너가게 된다. 타히티 섬에서 진정 자신의 열정적인 예술혼을 불태우게 된다. 타히티라는 곳은 '태고의 삶이 아직까지 태곳적 그대로 영위되고 있고,' '현재의 즐거움만이 더 뚜렷이 느껴질 뿐'인 곳이다. 그리고 '늘 미소 짓는 모습으로 정답기만' 한 곳이며 '날은 뜨겁고 색채는 현기증을 일으키는' 곳이기도 하다. 원시적인 아름다움이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 그 섬이었던 것이다. 그곳의 원주민들과 자연 생태가 그가 그리는 그림의 피사체가 된다. 그림 속에는 순수성을 지닌 영혼들이 하나 둘 담기기 시작한다. 나병으로 인해 두 눈을 볼 수 없을 지경이었으나 그는 마음의 빛으로 벽면을 그림으로 채운다.


역시나 천재적인 예술가의 전형처럼 스트릭랜드 또한 죽은 후에 그의 예술성이 알려지게 된다.


"스트릭랜드 본인도 그게 걸작인 줄 알았을 겁니다. 자기가 바랐던 걸 이룬 셈이죠. 자기 삶이 완성된 거예요. 하나의 세계를 창조했고, 그것을 바라보니 마음에 들었겠죠. 그런 다음 자부심과 함께 경멸감을 느끼면서 그걸 파괴해 버린 거죠."(329쪽)


그는 마지막 열정을 불태웠던 벽면 그림을 스스로 창조하고 스스로 파괴해 버린다. 자부심과 함께 경멸감을 느끼면서. 유작이었던 마지막 작품을 남기지 않고 왜 스스로 파괴해 버렸을까. 창조와 파괴를 반복하는 예술가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렇기에 그를 더 위대하게 기릴 수 있지 않을까. 혼연일체가 된 그 작품을 우리 각자가 상상하게 하면서, 꿈과 이상을 좇아 살았던 한 예술가가 우리 모두에게 하나의 과제를 남겨 둔 것처럼. 혹은 죽음 앞에서 인생무상을 느끼게 된 한 예술가의 마지막 포효이지 않았을까. 꿈과 이상을 찾아 여기까지 왔다, 예술에 모든 걸 바치고 나는 이렇게 한낱 흙으로 돌아간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흩어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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