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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절에가다 Mar 21. 2024

‘우리냐 나냐’ 딜레마, 선택과 책임

<견딜 수 없는 사랑> 이언 맥큐언

"우리는 무엇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을까?"

<견딜 수 없는 사랑> 12쪽




인간의 본성, 이기심 or 이타심


내 시야에서 그리 먼 거리가 아닌 곳에서 열기구가 추락하고 있다. 열기구 바구니에는 아이가 한 명 타고 있고, 또 다른 한 사람이 열기구 바구니 밖 밧줄에 매달려 있다. 나는 오랜만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막 소풍을 즐기려는 중이었다. 나와 상관없는 사고를 눈앞에서 목격하고 나는 과연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


이 책의 도입부는 이렇게 시작한다. 박진감 넘치는 도입부에서부터 작가는 독자의 시선을 이야기 속으로 빨아들인다. 도입부를 읽는 독자는 이미 열기구 사고의 공동 목격자가 된다. 그리고 작가는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여러분은 어떻게 행동하시겠습니까?"


소설은 보통 그야말로 소설적인, 사실이 아닌 허구 혹은 상상을 이야기한다. 가끔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이야기를 그릴 때도 있지만, 이 소설의 도입부는 나에게 비현실적인 소설과 같았다. 열기구 사고를 목격한 주위 사람 모두가 열기구 쪽으로 달려갔으니 말이다. 나와 상관없는 사건 사고에 휘말리고 싶지 않은 것이 대부분 사람들의 솔직한 심정이 아닐까. 가해자나 피해자가 아닌 목격자가 되는 것조차 성가신 일이다.


소설 속 주인공 '조'는 사고 직후 열기구 쪽으로 달려간 5명 중 한 명이다. 달려간 모두가 열기구에 연결된 밧줄을 잡았고, 돌풍에도 밧줄을 놓지 않으려 버텼다. 그럼에도 상황은 악화되어 누군가가 밧줄을 놓게 되고, 우연히 만난 이 사람들의 연대감은 점차 희미해지며 하나 둘 밧줄을 놓는다. 의사였던 존 로건만이 유일하게 끝까지 밧줄을 붙잡았고 하늘의 한 점이 되어 날아간다. 열기구 추락 사고는 한 명의 사망자를 남기고 그렇게 마무리된다. 나와 상관없는,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하려 끝까지 버틴 존 로건은 정말 '이타심의 불길'인 것일까. 그의 존재가, 그의 죽음이 인간의 본성이 이타적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일인 것일까. 그렇다면 나머지 밧줄을 놓은 사람들은 인간은 이기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가 될 것인가. 인간의 본성은 과연 이기적인 것일까, 아니면 이타적인 것일까.


모두가 밧줄을 놓지 않았다면, 모두가 살 수 있었다. 모두가 로건처럼 생각했다면, 누군가의 죽음 없이 모두가 로건이 될 수 있었다. 모두가 공포감에 휩싸이지 않을 수 있었다면, 모두가 죽기를 거부하지 않았다면 모두가 영웅이 되어 행복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타인의 죽음보다 나의 죽음이 더 두렵고, 공포스럽다. 타인의 죽음보다 나의 삶이 더 고귀하다. 심지어 바구니 속 손자보다 할아버지 본인의 삶이 더 중요했던 것처럼. 유일한 희생자, 존 로건은 유일하게 인간의 본능을 뛰어넘은, 이타적인 인간의 본성을 신뢰하고 위기에 빠진 인류를 구할지도 모르는 한 영웅의 모습과 같다고 한다면 비약일까.


저자는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우리에게 묻는다. 달리고 있던 그들은 무엇을 향해 달리고 있었을까.



충격적인 사고 이후의 삶, 신앙과 과학


열기구 추락 사고 후 주인공 '조'의 삶은 달라진다. 사고의 목격자이자 생존자로서 그는 그 사건을 삶에서 떨쳐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나 조는 과학도였지만 혹여나 신이 있다면 이타심으로 선한 존재인 존을 죽게 두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찬 상상을 하며 그 사건에 더 깊이 다가간다. 밧줄을 놓았던 자신의 죄책감으로 인해 과학이 아닌 신에게 도움을 구한 순간, 역시나 '잔인한 중력'이라 말하며 존 로건의 주검을 마주하고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 그때 '패리'라는 다른 생존자는 조에게 함께 신께 용서를 구하고 기도하자고 요청하지만, 조는 무신론자이자 과학도로 확고히 그를 거부하고 배척한다. 그때부터 조의 삶은 온전히 패리와 연관되어 이어진다. 어쩌면 충격적인 사고 후 조의 회피기제가 패리에게 몰두하게끔 작동하고, 과학의 대상처럼 패리를 하나의 분석의 대상으로 몰고 간 것일지도 모른다. 신이 있다면 선한 존재 존을 사망하게 만들지도, 자신을 죄책감에 고통받게 하지도 않아야 한다는 비논리적인 자기 확신이 패리를 더 혐오하게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그럴수록 패리는 조에게 더 집착한다. 마치 조가 신을 믿게 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처럼 느끼고, 자신을 사랑하지만 신에 대한 불신으로 조가 자신을 거부한다고 착각하며.


우연한 사고에 우연히 연루된 그들의 운명에서 과연 신앙이나 과학이 어떤 역할을 할지 의문이다. 나를 사랑하듯 타인을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신앙과 '잔인한 중력'으로 산산조각 난 타인을 사랑한 한 남자의 종말에 과연 신앙이나 종교가 인간의 우연적인 운명에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지가 궁금해진다. 타인을 사랑한 유일한 희생자의 존재, 그 유일한 희생자를 만들어낸 나의 불가피한 선택, 그를 제외한 모든 이가 생존하게 된 비논리적인 상황. 누구를 비난할 것이며, 누구를 추대할 것인가. 어떤 선택이 합리적인 판단이고 판단 착오라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의 우연적인 운명에 어떤 잣대를 들이댈 수 있을까.



견딜 수 없는 사랑


이 소설의 제목은 '견딜 수 없는 사랑'이다. 견딜 수 없으니 벗어나야만 하는 사랑. 너무 사랑해서 견딜 수 없을 수도, 혹은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 곁에 둘 수 없는 사랑일 수도. 조와 클래리사는 7년 간 동거한 사이다. 우연한 열기구 사고에 그들의 사랑은 변질된다. 변함없을 듯한 두 사람의 사랑이었지만, 충격적인 사고를 경험한 후 그들은 자기 안으로 침잠한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조는 사고의 후유증처럼 한 인물(패리)에게 몰두하고 집착하게 되고, 사랑의 힘으로 극복하고자 한 클래리사는 그런 그를 이해할 수 없다. 마치 삼각관계가 된 듯한 관계에 조와 클래리사는 서로를 불신하게 된다. 어떤 관계든 위기가 오면 서로를 더 깊이 알게 된다. 깊이 알게 되어 더 단단해지거나 혹은 그 반대이거나. 다른 성향이 더 도드라보이기도 하고, 그래서 관계의 틈은 더 벌어지게 되고. 견딜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사랑이 견딜 수 없게 되는 순간. 그래서 벗어나야만 하는 사랑으로 변질될 수도 있지 않을까.


또 다른 사랑은 조와 패리. 조는 패리를 드클레랑스 증후군으로 분석하고 지속적으로 그를 거부하고 배척한다. 줄곧 혐오하고 배척하는 것도 관심의 표현이라고 하면 비약일까. 사랑을 갈구하는 패리가 스스로 관심의 대상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불러오는 그 여파. 나를 거부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망상의 씨앗이 상대가 자신을 거부하면 할수록 점점 뿌리 깊게 자라는 어떤 사랑. 그 사랑을 더 깊이 파버리려 노력할수록 그 대상에 대한 생각만 가득한 조. 견딜 수 없어 벗어나고 싶은 사랑과 너무 사랑해서 견딜 수 없는 사랑.


열기구 사고의 유일한 희생자, 존 로건에 대한 아내의 사랑 또한 견딜 수 없었다. 남편의 죽음에 삶이 풍비박산 났지만, 남편의 부재에 대한 고통보다 남편의 불륜을 의심해야 하는 상황이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럽다. 불신이 확신이 되고 사실이 된다면, 그의 부재가 아닌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았음에 슬퍼하고 고통받을 수밖에 없다. 견딜 수 없어 벗어나야만 하는 사랑이 되고, 더 이상 사랑해서는 안될 사랑이 되는 것이다. 다행히도 존 로건은 끝까지 선한 존재로 남았다. 그는 가정적이고 이타적이며 용감한 사람으로 판명되었다. 존 로건의 아내는 앞으로도 죽은 남편을 너무 사랑해서 견딜 수 없는 사랑을 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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