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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절에가다 Apr 04. 2024

여름이 왔고 가을이 온다

<여름> 이디스 워튼

"늘 사랑이란 혼란스럽고 비밀스러운 무엇이라고 생각해 온 채리티에게 하니는 사랑을 여름 공기처럼 밝고 싱그러운 것으로 만들어 주었다."

<여름> 193쪽

성장 소설, 계절의 변화와 함께 성장하다


미국 고전이라 불리는 소설 중에서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성장 소설은 극히 드물다고 알고 있다. 미국의 역사가 유럽에 비해 오래되지 않았을뿐더러 여성이 성장하는 모습을 그려내는 소설은 우리나라를 포함해 전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이 책이 내게 온 것도 어쩌면 우연을 가장한 운명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외형으로 알맹이를 판단하지 않아야 함에도 에메랄드빛 하늘색 바탕에 노란 활자 그리고 꽃잎을 하나 둘 부풀리기 시작한 튤립은 내 시선을 끌기 충분했다. 여름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여름을 내 안에 들여놓고 싶었다. 알맹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제목처럼 이 소설은 여름이란 계절을 책장 곳곳에 충분히 묘사해놓았다. '노스도머'라는 한적한 시골마을의 풍경과 그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과 숲, 자연을 충분히 만끽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담겨있다. 첫 장에서부터 자연의 묘사는 시작된다.

'6월의 오후가 시작되는 시간이었다. 봄처럼 투명한 하늘이 마을의 지붕들과 그 주위를 둘러싼 목초지와 낙엽송 숲에 은빛 햇살을 퍼부었다. 산들바람 한 줄기가 언덕 등성이에 걸린 하얀 뭉게구름 사이로 불어와 들판을 가로질러 풀이 우거진 노스도머 거리 아래쪽으로 그림자를 몰고 갔다.'

'그녀는 손바닥에 투박스럽게 느껴지는 산자락의 마른 풀이며 얼굴을 짓누르는 백리향 냄새, 머리카락과 면 블라우스 속을 스쳐 가는 바람, 솔송나무가 바람결에 흔들리면서 내는 삐걱거리는 소리를 좋아했다.'

백리향은 어떤 냄새일까, 솔송나무는 또 어떤 나무이고.. 풀숲에 누워 여름의 온기가 느껴지기 시작하는 늦봄의 바람을 살결로 느끼는 주인공의 모습이 자연을 닮아있다.

이 소설은 계절의 변화와 함께 주인공 채러티의 성장을 그려놓았다. 늦봄에서 시작해서 한여름을 거쳐 가을 초입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적 변화가 주인공의 성장과 함께한다. 한적한 시골 마을 작은 도서관의 사서인 채러티는 지루하고 나른한 삶을 살아가고 있던 중 도시에서 온 한 소년(루시어스 하니)을 만나 여름을 닮은 사랑을 하고 계절이 익어가듯 자신의 삶 또한 성숙해지는 한 인간의 성장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채러티의 삶은 봄의 나른함에서 시작해 타오르는 여름을 맞고 점차 익어가는 계절을 닮아있다. 지금으로 말하면 십 대 청소년인 그녀가 한여름 밤의 꿈과 같은 사랑을 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 자신의 삶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는 과정이 담겨있다.

여름이라는 계절, 사랑이 타오르지만...


한적한 시골 마을 작은 도서관에 낯선 이방인이 나타났고, 사서인 채리티는 그에게 시선을 거둘 수 없다. 줄곧 풀과 나무가 친구였던 그녀에게 낯선 이성 친구가 나타난 셈. 당시 사회적 신분이란 게 존재했기에 그 낯선 이성 친구는 자신보다 지위가 높아 보인다. 자신은 시골 마을 노스도머에서 좀 더 숲으로 깊이 들어간 '산'이라 불리는 곳에서 태어났고, 자신과 함께 지내는 로열 변호사가 데려온 아이였으니 태생이 불분명하다는 것은 당시 사회적으로 차별을 받는다는 의미였다. 시골 소녀는 도시에서 온 낯선 소년에게 으레 호기심이 생기고, 반대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호기심이 관심으로, 관심이 사랑으로 변하는 것은 순리다. 자연의 순리처럼. 그러나 서로의 관심이 관심의 표현에서 그칠 수도 있었으나, 사랑으로 이어지게 한 것은 순전히 채리티의 반응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곳을 떠나는 그에게 채리티는 "그럼 안녕히 가세요"라며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섰으니. 다음날 하니는 노스도머에 좀 더 남아있겠다는 편지를 그녀에게 전하며 그들의 호기심과 관심이 결국 사랑으로 이어지게 된다.

"늘 사랑이란 혼란스럽고 비밀스러운 무엇이라고 생각해 온 채리티에게 하니는 사랑을 여름 공기처럼 밝고 싱그러운 것으로 만들어 주었다."

사랑이란 본래가 한여름 밤의 꿈과 같아서일까. 내일이면 흩어질 모래성을 쌓은 것처럼.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고서 떠나는 그, 때마침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 그녀. 기다리면서도 기다림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그녀. 돌아오지 않을 사람을 돌아오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그녀. 결국 자신이 태어난 곳 '산'으로 떠나고, 우연히 그곳에서 처절하게 죽은 친모의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더 이상 돌아갈 곳도 돌아갈 수 있는 곳도 사라진 그녀에게 빛처럼 나타난 '로열 변호사.'

어린 자신을 데려와 지금껏 함께 살게 해주고 있는 로열 변호사는 그녀에게 보호자이자 그 이상의 역할을 했다. 채리티에게 청혼을 했었고 거절을 당했었다. 자신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듯한 보호자를 그녀는 혐오스럽게 생각했었다. 돈을 벌어 어서 빨리 그 집을 벗어날까 생각만 하면서. 누구나 행복은 곁에서 먼지처럼 작은 사소함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고 살아가고 있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한여름 밤의 꿈과 같은 사랑만이 사랑일까. 순간의 기쁨과 희열만이 사랑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것일까. 타오르는 만큼 식어버리고, 타올랐던 만큼 새까만 재로 남는다. 삶과 죽음 그 경계선에 서 있는 그녀에게 다시 다가와 손을 내밀어 주었던 로열 변호사의 마음은. 사랑이 뭘까.

대비적 효과, 차이와 간극 속 울림


봄, 여름, 가을이라는 계절적 배경에도 대비가 나타나지만, 장소에서도 나타난다. 시골 마을 '노스도머'는 한적하고 고즈넉한 시골이다. 작은 도서관이 하나 있고, 뭘 하나 사려면 마차를 타고 멀리 나서야 한다. 이곳과 대비되어 채리티가 태어난 '산'이라는 곳은 무법자들의 소굴과 같은 모습으로 묘사된다. 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자 제대로 생계를 이어갈 수 없는 사람들이 도피해서 사는 곳과 같은. 채리티가 태어난 곳은 그곳이지만, 로열 변호사 덕분에 그곳에서 구출되어 살아가고 있다. '노스도머'와 '산' 중간의 어느 폐가는 채리티와 하니가 사랑하는 장소로 이용되기도 한다. 말하자면, 문명과 비문명의 중간지대에서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진다. 마치 사회적으로 신분의 차이가 있는 두 사람이 본능에 충실할 수 있는 곳은 그곳뿐. 중간 지대의 모호한 장소에서 모호한 그들의 사랑은 예상을 벗어나지 않은 정해진 결과로 귀결되지 않았을까.

채리티와 루시어스 하니 또는 채리티와 로열 변호사 그들의 신분적인 차이도 하나의 대비 요소다.


'비록 가난하고 무식한 데다 '산'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가장 수치스러운 일인 노스도머에서 자신이 가장 비천하다는 사실을 잘 알았지만 채리티는 자신의 한정된 세계에서 언제나 여왕처럼 군림해 왔다.'


루시어스 하니는 도시에서 온 이방인이었고, 그 지역 귀족 부인의 사촌 동생이었다. 채리티는 '산'에서 태어나고 후견인 로열 변호사와 노스도머에 함께 살고 있었다. 사회적 신분에 따라 결혼하는 풍습은 그때도 마찬가지라 채리티는 하니와 끝까지 이어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마음에 품고 있었는지 모른다. 한 여름밤의 모래성과 같은 꿈이어도 좋으니 가슴 뛰는 사랑을 하고 싶다는 본능에 충실하며. 자신이 선택한 사랑에 끝까지 스스로 책임을 지는 모습은 연민만을 자아내지 않는다. 또한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잘 알면서도 로열 변호사와 함께 사는 그 집안에서는 여왕처럼 군림했다는 것이 그녀의 당당한 성격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고. 결국 한 여름의 타오르는 사랑이 지나가고 채리티는 로열 변호사에게 감사한 마음과 연민의 정을 느끼게 되고 그의 손을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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