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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절에가다 Apr 18. 2024

환대, 사람 되기와 되게 하기

<사람, 장소, 환대> 김현경

사람이 된다는 것은 그림자를 갖는 것과 같다 



그림자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모든 살아있는 것이라면 그림자는 당연히 존재한다. 그림자가 있으려면 해가 있어야 하고, 해가 없는 밤이 되면 그림자는 사라진다. 밤에도 불빛에 의지해 그림자를 만들어 낼 수는 있으나, 그 불빛은 해를 대신할 수는 없다. 해가 뜨면 우리와 형체가 동일한, 그러나 세밀한 면면이 지워진 실루엣, 그림자가 우리를 따라다닌다.


그림자의 존재가 의미하는 것은 지금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있다는 것이고, 이 세상에 우리의 자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림자가 없는 사람을 그 누구도 상상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림자가 없다는 것은 죽은 사람에게나 해당하는 것이니. 죽은 사람은 우리 눈앞에 형체를 드러내지 않기에 그들의 그림자도 볼 수 없다. 그림자가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다.


이 책은 '그림자를 판 사나이'라는 소설에 관한 내용으로 시작한다. 사나이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듯 그림자를 팔게 되고 그림자 없이 지내게 된다. 그림자가 없이 산다는 것은 타인에게 혐오를 불러일으킬 만한 일이 되고, 결국 사회 안에 사람으로 머물기 위해서는 돈보다도 그림자가 중요하다는 비상식적인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돈보다 중요한 그림자. 사회 안에 사람으로 머무는 데 필요한 그림자, 타인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필수적인 것, 그림자. 이 소설에서 이야기하는 그림자는 어떤 의미일까. 살아있는 사람에게만 혹은 살아있는 생명체에게서만 볼 수 있는 그림자, 죽은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그림자는 이 세상에서, 이 사회에서 어떤 의미일까.


이 책의 저자는 그림자를 성원권과 연결 지어 설명한다. 성원권은 한 사회나 집단의 구성원이 될 자격을 뜻하는데, 한 사람이 사회 안에서 성원권을 가진다는 것은 그 사람의 그림자가 존재한다는 의미이고, 그림자는 곧 사회 안에 그 사람의 자리가 존재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태어난 모든 인간에게 그림자가 있듯이, 태어난 모든 이들에게는 성원권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 이 사회 안에 자리매김할 수 있는 성원권은 그림자의 존재만큼이나 모든 이들에게 주어져야 하는 필수적인 것임을 뜻한다. 그림자가 없는 사람을 상상하기 어렵듯, 성원권이 없는 사람은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강한 메시지기도 하다. 이 사회에 구성원으로 자리할 수 없다는 것은 그림자가 없는 죽은 사람과 동일하다는 의미가 아닐까.


책에서는 '사회적으로 죽은'이라는 표현을 쓰며, 성원권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 설명했다. 사회에서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는, 자신의 자리가 없는, 사회적으로 죽은 그런 부류의 인간들. 예를 들어, 미국 남부 흑인 노예들, 유교 신분 사회의 노비 혹은 가부장제 아래의 여성들, 전쟁터 속의 군인들, 총체적 시설에서의 재소자들 등. 그들이 과연 그 시대 그 사회 안에서 사람의 자격이 있다고, 구성원으로 자리매김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들은 소모품이었고, 교환가능하고 소유 폐기 가능한 물건이었다. 그들에게는 그림자가 없었다. 성원권이 없었다. 살아있으나 죽은 상태였다. 인간이긴 했으나 사람은 아니었다.



환대란 주는 힘을 주는 것이며, 받는 사람을 줄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지금도 여러 곳에서 그림자 없이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많다. 이 사회 안에 자리매김하지 못하고, 투명 인간 취급을 당하는 사람들. 그림자가 있다 하더라도(성원권이 있는 듯 보이는) 빈번하게 투명 인간 취급당하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이 시대 이 땅에서 자주 소외되고 자주 배제되며 자주 배척당하는 어떤 이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림자가 있는 사람들도 자신의 그림자를 사수하고 차지하기 위해서 타인의 그림자를 짓밟고 자신의 그림자를 더 크게 보이게 하려고 치열하게 싸우고 있으니. 사회 안에서 그림자가 없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의 그림자는 무척 부풀려져 있다. 그들은 때로는 직접적으로, 때로는 양의 탈을 쓴 모습으로 그림자 없는 이들에게 폭력을 일삼으면서. 그러면서 죽을 때까지 내 그림자는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 허황된 상상을 한다.


이런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타인에게 '환대'하는 일은 가능할까. 사전적 의미로 환대란 '반갑게 맞아 정성껏 후하게 대접하다'는 뜻이다. 초대한 나의 지인을 환대하는 경우나 가족의 일원이 된 내 아이를 환대하는 경우가 떠오른다. 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환대하는 나, 그리고 그런 나의 환대를 받는 그들. 환대의 주체와 대상 모두 서로 좋은 관계의 유지를 조건으로 한다. 내가 그들과 주고받는 환대의 범위는 사실 거기에 그친다. 어쩌면 그 범위를 유지하는 것도 어느 정도 노력이 요구되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그 환대의 범위를 넓히고 넓혀 생명이 있는 모든 것에게로 넓힌다면, 인류애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존중이라고 해야 할까. 이 책에서는 사회 안에 구성원으로 자리매김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절대적 환대'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들도 이 땅에 태어났으니 그림자가 있고, 자신의 자리가 있으며 구성원으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 태어났으면 그 자체로 존엄하며 사회의 구성원으로 환대를 받아야 하고, 또 타인을 그렇게 환대하며 살아가는 그런 공동체가 이 사회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는 말.


가부장제 속 여성이 혹은 자식이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야만 환대받을 수 있거나, 혹은 고아나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정상인의 자선에 무조건 수용해야만 환대받을 수 있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환대, 순수한 환대가 아니다. 조건적 환대는 절대적 환대와 어쩌면 대립하고 대치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조건을 다는 관계가 순수하지 못한 관계라는 사실은 누구나가 인지하고 있지만, 실상 사회 곳곳에서 조건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이 책의 저자는 '환대'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환대받는 사람에게 주는 힘을 주는 것이며, 받는 사람을 줄 수 있게 만드는 것이 환대라는 것. 내가 상대를 환대하는 것에서 끝나면 그것은 진정한 환대가 아니다. 상대가 자신도 타인을 환대할 수 있게 힘을 주는 것, 즉 그도 타인에게 줄 수 있고 환대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진정한 환대라는 것. 결국 내가 아닌 타인을 위해 자리를 내어주고, 자리매김하게 도와주고, 또 다른 이의 자리를 만들도록 힘을 주는 그런 환대.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환대는 이 시대 이 세상에서 불가능하게 느껴진다.



신자유주의하에서 모욕은 흔히 굴욕의 모습을 띠고 나타난다 


이 시대 이 세상에서 환대가 더욱더 불가능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이 시대가 '신자유주의' 이론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화가 이루어지면서 신자유주의는 세계 곳곳의 모습을 바꾸고 있다. 세계는 더 이상 평평하지 않고 글로벌화되어 인간은 지구 어디든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나의 집, 나의 고향, 나의 나라에서 벗어나 어디든 가서 여행하고 체류할 수 있게 되었다. ‘어디든 갈 수 있는 것’이 뜻하는 것이 어디든 내 자리가 아니라는 의미임을 책에서 말하고 있다. 어디든 갈 수 있는 것은 어디든 내 자리가 아니라는 것이고, 내 자리가 언제라도 없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나의 집, 나의 고향, 나의 나라에서 비롯되는 나라는 정체성이 희미해지며 온전히 내 자리를 보전하기 어려워지는 세상이 바로 지금의 신자유주의 세계라는 것이다.


또 신자유주의의 대표적인 것이 소비 중심의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다. '소비는 그 자체가 투자'이며, 자신의 스펙이나 이미지를 끊임없이 만들도록 강요받는다. 또한 자본이 무한한 자유를 준다고 생각하게 만들어 돈이 곧 자유고 권력이고 힘이라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런 신자유주의 사회 구조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 대부분은 안타깝게도 필연적으로 패배감이나 굴욕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한다. 나를 바꾸긴 쉬워도 환경을 바꾸긴 어려운 일이듯, 환경이라는 구조 속에서 소시민인 개인은 아무리 노력해도 도달할 수 없는 허상을 만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사회는 구조의 문제를 개인의 자존감 결여 그 탓으로 돌리며 굴욕감을 준다.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이라며 거기서 좌절하면 너의 자존감이 부족해서다, 어린 시절 애정 결핍의 문제다, 라며 사회 구조의 문제를 숨겨버린다. 지속적으로 '자존감 올리는 법'과 같은 자기계발서가 나오고 있는 이유도 그러한 듯 보인다. 온전한 내 자리를 확보하는 일이 나의 정체성을 찾는 일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이 지점에서 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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