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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절에가다 May 14. 2024

<취향 존중 육아> 아이의 시선을 따라서

또 얼마큼 세월이 흐르면 너를 더 이해할 수 있을까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어린이날을 맞아 '그래비트랙스' 행사 소식을 접하고 일찍부터 바삐 움직였다. 체험이 있는 행사라 오픈 시간에 맞춰 가야 그리 붐비지 않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부모들 마음은 언제나 동일하다. 특히 내 자식을 위해서라면, 내 아이의 뜻깊은 추억을 위해서라면 아침 일찍 채비는 문제 되지 않는다. 약 40분간 트랙 만들기 체험을 하고 아이는 필요한 부품들을 모조리 골라 어린이날을 기념했다. 집에 있는 것들로는 제대로 된 트랙을 만들 수 없다면서, 필요한 부속품들을 여럿 골랐다. 그것들이 들어 있는 종이 가방을 들고 입꼬리가 하늘까지 닿을 듯 한 걸보니, 마치 명품숍에서 쇼핑을 하고 나온 것만 같다.


"아들아, 넌 매일이 어린이날이 아니니?"라고 건넸더니, 쇼핑백을 끌어안고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른다. 할 말을 잃고 올라간 입꼬리를 내리질 못하는 걸 보니 정말 필요한 걸 사준 것 같다. 외동인 아이에게 인위적인 결핍을 주려고 애써보지만 매번 실패다. 내일이 어린이날이니 특별히 오늘은 너의 올라간 입꼬리를 굳이 애써 내리려 하지는 않겠어!

나는 사랑 표현에 돈이 개입하는 것을 무척 경계한다. 돈이 개입하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사랑이란 걸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받고 있는 사랑을 주고 있는 나의 입으로 아이에게 설명하는 것이 구차할 때가 많지만, 나는 그렇게라도 아이에 알려주고 싶다. 체감하기 어렵겠지만, 머리를 써서라도 네가 이해하길 바라면서.


그동안 아이는 시간이 날 때마다 하나 둘 필요한 부품들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기본팩을 산 건 꽤 오래되었는데, 방치 상태에 있던 걸 다시 꺼내게 된 계기는 <어린이 과학동아> 잡지. 어린이 과학 잡지에서 '그래비트랙스'를 이용하는 만화가 연재되면서 아이는 다시 트랙의 세계로 들어섰다. 한때 연재되었던 만화 '야구왕 허슬기'라는 야구 스토리 덕분에 그때부터 야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한국 시리즈 중계 하이라이트를 시간 날 때마다 보곤 했다. 이번에는 '그래비트랙스' 만화 덕분에 아이는 다시 트랙 만들기에 빠져들었다.



요즘 아이들 문해력이 낮아 걱정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많이 들린다. 그 우려의 목소리에 내 목소리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아이들 주위에는 책 보다 훨씬 재미있는 놀잇감들이 널려 있다. 집안 곳곳에 스마트한 기계들이 자신을 봐달라 아우성이다. 손가락 터치 하나로 무한히 팽창하는 우주에 들어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깜깜한 우주에 수없이 반짝이는 별들이 네모난 화면에 가득하다. 별 하나를 터치하면 또 다른 별이 나타나고 그 이전보다 더 반짝이는 별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 별들은 내 말초 신경을 자극하고 나는 그 안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이 이 무미 건조한, 죽어 있는 듯 보이는 책이란 것을 손에 들고 그 책장을 넘길 수가 있을까. 심심할 겨를 없는, 어디나 화면으로 가득한 삶을 살고 있는 아이들이 '심심한데 책이나 볼까?'가 될 수 있을까? 이야기에 흠뻑 빠질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지만, 아이들은 그 본능을 굳건히 지켜낼 수 없다. 아이들이 이야기에 재미를 느낄 수 없는 것은 아이들 잘못이 아니다. 문해력이 낮은 것은 아이들 잘못이 아니다. 너희들은 잘못이 없다.


그렇다면 모든 책은 이로울까. 어떤 책이라도 아이들의 성장에 도움이 될까. 문해력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전인격적인 발달에 도움이 될까. 요즘은 '학습 만화'라고 해서 학습과 만화를 연결시켜 아이들의 이해를 돕는 책들이 많다. 만화를 수단으로 사용하지만 역사와 문화를 아우르는 전반적인 내용이 담겨있다. 내 아이가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학습 만화 덕분. 초한지 삼국지 그리스로마신화 등 아이는 만화로 세상을 알아갔다. 야구 스포츠의 승률 계산도, 작은 스트라이크 존에서 이루어지는 인생철학도 모두 만화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또 트랙을 원하는 대로 이어 붙여 생각한 대로 구슬을 구르도록 하며 머릿속 생각을 밖으로 구현할 수 있는 이 놀이의 시작도 만화를 통해서다. 만화책이 문해력 키우기에는 어떨지 모르겠으나, 아이들에게 지적 자극을 줄 수 있는 수단으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어릴 적, 또래 남자아이들 모두가 좋아하는 레고 만들기는 아이의 취향이 아니었다. 엉덩이 힘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다. 그때가 4살이었나. ‘플레이도우'라는 찰흙처럼 생긴 걸 가지고 3~4시간은 거뜬히 앉아 가지고 놀던 아이였다. 찰흙 덩어리를 넣어 국수를 뽑아내는 기계를 수십 번 가지고 놀기도 했다. 레고에 관심을 갖게 하려고 한창 좋아하던 자동차를 조립하는 레고를 사줬더니, 결국 엄마인 내가 레고 조립에 흠뻑 빠져 재미를 느끼기도 했다. 그 당시 내 아이는 왜 레고를 좋아하지 않는 걸까?라는 질문이 내게 숙제처럼 따라다녔었다.


세월이 지나 내 아이를 보니 이제는 좀 보인다.


설명서대로 하나하나 따라가며 하나의 완성체를 만드는 건 아이에겐 재미가 아니었다. 이미 정해진 목표 지점으로 가는 긴 여정이 지루하고 답답하기만 했을 것이다. 아이는 매번 설명서를 보지 않고 마음대로 만들고 싶어 했다. 급한 성격 때문은 아닌가 해서 나는 옆에서 레고 부품을 하나하나 찾아주며 하나의 결과물이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려 했다. 아이는 이내 엉덩이를 바닥에서 떼어내고 돌아다니곤 했다.


보드게임도 마찬가지였다. 보드게임에는 엄연히 지켜야 할 룰이 있다. 게임 설명서를 보다 말고 자기가 규칙을 정하겠다고 게임 룰을 바꾸기 일쑤였다. 자신이 더 재미있게 만들어보겠다며.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게임 룰을 바꾸기도 하면서.


그때는 몰랐다.

아이가 뭐든 본인 마음 가는 대로 하려는 듯 보였고, 설명서대로 룰대로 하지 않는 아이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이의 시선을 따라가려 아이의 생각을 읽으려 부단히 애썼음에도 내 아이를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아이는 3시간을 내리 앉아 트랙을 만들었다. 지난번에는 바닥판 6개로 만들더니 이번에는 새로 사 온 것들을 다 합쳐 바닥판 9개로 만들었다. 2층을 3층으로 확장해서 만들고, 구슬이 구를 수 있는 레일 수도 3개에서 4개로 확장했다. 어린이날을 기념해서 전문가들이 만들어 전시해 놓은 11 m 레일 트랙을 보고 온 것이 자극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며 아이는 머릿속으로 상상한 길을 실제로 이어가며 만들어 갔고 이후 자신이 만든 완성품을 보고 흡족해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설명서는 안중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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