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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절에가다 Dec 11. 2023

놀자 놀자 어려서 놀자

요즘 우리 아이들, 제대로 놀고 있나요?

며칠 전 집 앞마당에서 비가 그치길 기다리며 잠시 숨어 있던 개미들이 총출동하여 대지 위를 기어 다녔다. 10살 아이 눈에 포착된 먹잇감들의 향연. 그냥 지나칠 수 없지. 이 아이는 누구도(개미들) 원치 않는 향연에 초대되었다. 자발적으로, 기쁨에 눈을 희번덕거리며 아이는 그 초대에 응했다.

향연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가지, 무사들의 대결을 구경하는 것. 아이는 먼저 개미 무사 두 마리를 찬찬히 고른다. 그러곤 무사 한 마리에는 다리를, 또 다른 무사 한 마리에는 몸통을 떼어낸다. 이미 온몸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두 무사를 마당 한쪽 흙으로 뒤덮인 경기장에 배치한다.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 두 무사는 삶이 곧 죽음이고 죽음이 곧 삶인 듯 싸움을 시작한다. 몸통이 뜯긴 무사가 이내 숨통이 끊길 줄 알았더니, 와우 끝까지 안간힘을 쓰며 버틴다. 되려 다리 하나가 뜯긴 상대 무사를 먼저 물어뜯고 놔주지 않는다. 엎치락뒤치락하면서도 완강하게 버틴다. 이내 환호성이 끊이질 않는다. 10살 아이 눈은 더욱더 희번덕거리며 빛이 난다. 그리고는 한 가지 교훈을 얻게 되는데. ‘끈기,’ 끈기라는 교훈. 두 개미 무사에게서 집요하고 처절한, 죽음을 불사하는 끈기를 배운다.


“엄마! 얘네 진짜 끈질기네!!”


그러는 동안 아이는 줄곧 두 무릎을 꿇고 향연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 아이의 모습에 지나가던 어르신들은 시선을 거두지 못하시고 말씀하셨다.


“무릎 꿇고 뭐 하냐. 엄마한테 혼나는 거냐. 허허”


아이는 머쓱해하며 “아닌데요!!”라고 응수하고, 생각지도 못한 말씀에 나도 웃음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정말 무릎 꿇고 혼나는 아이처럼 보였다. 게다가 집안이 아니라 집마당에서 무릎 꿇고 고개는 푹 숙인 채 혼이 나고 있는 10살 어린이. 사실 내막은 이러했다. 아이는 무릎 꿇어 개미 무사들의 대결을 줄곧 주도하고 있었고, 나는 그 대결의 불청객마냥 계단에 앉아 아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향연이 어서 끝나길, 어느 어떤 무사라도, 그 무사들을 싸움질시키는 그 누구도 어서 빨리 대결을 끝장내고 흩어지길 고대하며…


나는 한 술 더 떠서 아이에게 부탁한다.

“땡땡아, 그 상태에서 두 손 번쩍 들고 있을래? 그럼 훨씬 개미 싸움 구경꾼들이 많아질 텐데…”



‘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라는 책을 읽은 적 있다. 아이들에게 놀이가 밥이라니, 이토록 매력적인 제목이 있을까 하며 책을 펼친 적이 있다. 평소 나는 아이에게 놀이가 답, 유일무이한 답이라는 생각에 가정에서부터 그것을 실천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을 보고 나서는 생각을 바꿨다. 아이들에게 놀이는 답이 아니라 밥이라고. 풀어야 할 문제가 주어졌지만 그것을 외면하고 회피한다면 굳이 놀이라는 답을 내고 실천할 필요가 없으니, 앞으로 놀이는 답이 아니라 내 아이에게 꼭 먹여야 하는 밥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건강하게 자라기 위해 꼭 필요한 먹을거리. 필수 영양소. 한국인에게는 밥심이란 게 있으니.


하지만 아이가 자라면서 뭔가 모를 불안과 걱정이 내 안에서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특히 아이가 학교란 곳에 가기 시작하면서는 그 불안과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줄곧 나를 따라다녔다. ’이렇게 놀아도 될까. 이렇게 놀기만 해도 될까…’ 그리고 빠지지 않는 ‘다른 아이들은 지금 이 시간에…’ 방과 후에 줄곧 놀이터에서 함께 뛰놀던 아이들의 친구들이 하나 둘 사라졌다. 놀이터에는 갓난쟁이 아가들만 해맑게 엄마와 술래잡기를 하고 있다. 아가들을 피해 다니느라 아이는 제대로 놀이터를 접수하지 못한다. 미끄럼틀은 거꾸로 올라가야 제맛인데 엄마들이 위험하다며 제지한다. 같이 놀 친구도 없는데 신나게 뛰놀 곳도 없다. 몇 번을 혼자 빈둥거리더니 더 이상 놀이터에 가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놀 틈이 있어도 아이는 제대로 놀 수가 없다.


‘아이들에게 놀이가 밥이다’에서는 ‘놀 동무, 놀 틈, 놀 터’ 이 세 가지 모두가 아이들의 놀이에 필수적이라고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아이들에게 이 세 가지 모두가 사라지고 있다. 그나마 아이들에게 유일한 놀 터였던 놀이터에는 위생상 외관상의 이유로 모래가 사라지고 있고, 학교 운동장에는 안전상의 이유로 방과 후 이용금지 팻말이 붙기도 했다. 아이들에게 놀 틈은 유일하게 학교 급식 후 20분이 전부고, 방과 후에는 놀 틈이 더 없다. 여러 가지 이유들로 여기저기 실려 다니고 있으니. 아이들의 놀 동무는 사교육 학원에나 가야 만날 수 있고, 그 속에서 동무는 없고 경쟁자만 있다. 그럴수록 놀이터는 주인 잃은 신세가 되어가고 있고. 안타깝지만 이게 아이들의 현실. 아이들은 밥을 제대로 먹고 있지 못하다. 허기만 가득한 채 몸집만 커지고 있다.


제대로 놀지 못한 아이들의 또 다른 현실 하나. 놀이에 굶주린 아이들은 점차 자신을 고립시키거나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며, 채워지지 않는 허기를 해소하려 시도한다. 스스로 사회적 고립을 자처하거나 역으로 타인의 사회적 고립을 부추기면서. 골방에서 디지털기기를 동무 삼아 손으로 잡을 수 없는 세상 속에서 떠다니고 있는 아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 아이들에게는 그곳이 진짜 세상이다. 밥을 먹지 않아도 허기지지 않고, 손으로 만질 수 없지만 함께 떠다니는 또래들이 있다. 몸집만 컸지 자신처럼 덜 자란 어른들이 무수하고, 그곳은 끊이지 않는 쾌락만 있다. 그들에게 그 세상이 진짜인지 아닌지 진위 여부는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놀 친구가 있고, 놀 동무가 있으며 그곳이 바로 놀 터다. 게다가 어떤 아이들은 그 허기진 마음을 가혹한 방법으로 다른 아이들을 가해하며 타인의 사회적 고립을 조장하는 경우도 허다해지고 있다. 심심찮게 들리는 학교 폭력은 수위가 높아지고 있고 아이들의 연령은 낮아지고 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만든 자극적인 미디어에 자주 노출되고 있고, 아이들은 자극적인 쾌락만이 현실이라 여긴다. 점점 타인을 공감하지 못하고 타인은 자신의 쾌락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아이들은 자라며 점차 확장될 더 큰 사회에 안착하기 위해 지금 이 순간도 매일매일 작은 사회를 경험하고 있다. 가정이라는 가장 최소한의 사회부터 유치원, 학교라는 사회를 거치며 성장 중이다. 어떤 사회든 그 속에는 나를 포함한 타인이 항상 존재하고 그들과 상호작용을 하며 아이들은 세상을 배워간다. 가정에서는 부모와 형제자매, 가정 밖에서는 또래 친구들과 선생님을 포함한 어른들과 소통하며 그들과 관계를 맺는다. 그러한 관계 속에서 익힌 배움의 씨앗을 가지고 아이들은 더 큰 세상 속으로 걸어갈 수 있다. 부모님께 눈물 쏙 혼이 나 보기도 하고, 그날 잠자리에서 서로의 마음을 내보이기도 하며 사과를 하기도 하고 받아주기도 하고. 또래와 놀며 다투다 갈등을 해결해 보기도 하고, 해결 못한 감정으로 며칠을 고민해 보기도 하고, 그러다 우연한 기회로 다시 놀기도 하고. 해마다 다르게 만나는 다양한 선생님에게서 다양한 배움과 결실을 경험하기도 하면서 사회를, 사회 속 자신을, 사회 속 타인을 알아가는 일. 아이들에게 놀이가 밥이라는 것은 다양한 소통의 기회, 즉 타인과의 상호작용의 경험이 필수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일은 앞으로 더 큰 사회 속에서 타인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아이들을 위한 일이기도, 우리 모두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 아이들에게 실컷 놀 틈을 주고 그 틈 속에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경험하게 하자. 사람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 홀로 태어나지 않았고, 혼자 일어서지 않았다. 모두가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제대로 놀 수 있는 틈, 그 속에서 타인이란 존재를 만나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어른의 역할이 아닐까. 실천은 언제나 가정에서부터 그리고 나부터. 그것은 아이들에게 밥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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