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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절에가다 Nov 27. 2023

당신의 호의에 ‘감사합니다’

모르는 타인이 베푸는 호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방풍 커튼을 열어젖혔다. 겨울에 없어서는 안 될 방한용 필수용품, 우리 집 방풍 커튼들. 이날은 토요일이라 느지막이 열어젖혔다. 거실 창문엔 성에가 끼어있다. 11월 들어 가장 춥긴 추운 날씨인가 보다. 늦잠뿐 아니라 어제저녁 화려한 음주(+가무)로 인한 숙취 덕분에 오늘 아침이 주말임을 알 수 있었다. 뜻하지 않게 어제저녁 우리 부부는 오사카를 다녀왔다. 지난 여행지 오사카에서 마셨던 캔 생맥주를 한 캔 두 캔 따면서. 오사카에서의 황홀경을 재현하며. 귀가하는 남편 손에 편의점 봉지 한가득 쟁여져 있었던 캔들을 몽땅 마셔버리면서.      


“가자! 오늘 오사카로 떠나는 거야! 가자!”     


배달의 민족답게 역시나 오늘의 배달 음식, ‘보쌈과 쟁반국수’가 도착하고, 그날의 주인공, 캔 생맥을 알현한다. 기대감에 부푼 남편은 캔맥주 뚜껑을 똑, 딴다. 그러다 이내 눈동자가 흔들리며 낯빛은 어두워진다. 두둥. 보리차의 등장. 동그랗게 따진 캔 속에 채워진 거품 없는 누런 보리차. “뭐지! 이기 아닌데...”라며 캔을 요리조리 살핀다. 예감은 항상 틀리지 않는다. 기대감에 방방 들뜰 때부터 알아봤다. 순식간에 남편의 엉덩이가 들썩인다. 냉동실에 잠시 넣어둔 맥주들을 꺼낸다. 그러고는 어미 새 마냥 맥주들을 품기 시작한다. 생맥주를 캔으로 마실 수 있게 특별히 고안된 그것들을. 그랬다. 적정 온도. 적정 온도가 필수였다. 분화구에서 뿜어 나오는 거품을 알현하기 위해서는 적정 온도를 맞춰야 했다. 맥주의 생명은 차가운 온도이지만, 생맥주의 생명은 거품이다. 거품을 위해 적당히 차가운 온도가 필요했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어제의 흔적이 싱크대 안에 널브러져 있었다. 숙취가 더 진해진다. 어서 희석시켜야 한다. 그러나 집에는 마땅한 게 없다. 어쩔 수 없지. 롱패딩을 욱여 입고 집을 나섰다. 한국인의 해장 끝판왕, 라면을 사러 이 추위를 무릅쓰고 편의점으로. 어제 남편이 데려온 오사카가 있는 곳으로, 이번에는 해장 끝판왕을 건지러.      


편의점은 이런 곳인가. 가족수대로 딱 라면 세 개만 사려했는데, 애초의 계획은 무의미한 곳. 가지런히 진열된 먹을 것들이 여기저기서 나를 부른다. 다시 정신줄을 부여잡고, 통통한 라면 세 개와 위를 편안하게 해 줄 마시는 요거트 세 개를 사서 계산대에 올렸다.

계산을 하시던 편의점 주인아저씨는 내 얼굴을 쓱 한번 보더니, 이내 계산을 마치고서 주섬주섬 옆에 있던 빈 상자를 만지작댔다. 그러고는 상자 안에 들어있던 초코빵 세 개를 꺼내 “가져가서 드세요.”라며 건넸다. 순간 내 머릿속에 지진이 일어났다.   

  

‘뭐지? 왜 주는 거지? 요즘 재래시장도 그냥 주는 경우가 없는데... 한 톨의 정도 느낄 수 없는 이런 곳에서 이런 호의가?’     


나는 반사적으로 빠르게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고 말했다. 그는 나를 다시 한번 힐끗 내려다보았다. 나는 머쓱함을 넘어 대체 이건 무슨 상황인지 가늠이 안 돼 또 한 번 멈칫했다. ‘라면도 세 개, 요구르트도 세 개를 사서 그런가?’ 머쓱함에 그냥 하나만 집어 들고 나오려 했지만, 결국 세 개를 다 가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손님 주려고 놔둔 거라는 말씀에...     


결국 다 가지고 나올 거였으면서, 두 번이나 거절한 내가 민망해 재빨리 문을 열고 나왔다. 밖은 여전히 추웠고, 아직 11월이니 그리 칼바람은 아니었다. 집에서 나설 때는 그리 춥더니, 집으로 돌아가면서는 앞지퍼를 열어젖혔다. 상대방의 낯선 호의. 그럴 곳이 아닌 곳에서 그럴 사람이 아닌 사람에게 받는 낯설고 어색한 호의.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왜라는 물음표만이 떠다녔다.    

 

‘왜 주지? 유통기한은 괜찮나? 분명 진열해 놓아도 될 만한 물건인데 왜 공짜로 주는 거지?’      

    

집에 도착하고, 내가 겪은 상황들을 아이와 남편에게 전했다. 내가 이뻐서 편의점주에게 초코빵 세 개를 받았다고, 우스갯소리를 해본다. 아이는 고개를 푹 떨구고, 남편은 맞장구를 쳐준다. 모두가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타인의 호의. 하지만 나는 불편했다. 더군다나 모르는 이에게 받는 호의는 더더욱. 타인의 호의에 의심과 불신이 앞섰다. 타인의 호의에 이유와 근거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그 호의에 뭔가 보상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마냥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 없었다.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들었다. 겨우 초코빵 세 개에 두 번의 손사래와 거절을 받은 그는 어땠을까. 눈으로 확인한 세상의 각박함에 더 머쓱하진 않았을까.   

  

한때 아이와 주말마다 산을 타면서, 산에서 만난 등산객 어르신들이 항상 우리를 보고 먼저 인사를 해주셨다 “안녕하세요!” 혹은 아이에게 “안녕! 씩씩하네 고 녀석!” 이라며 주머니에서 군것질거리를 꺼내 주셨다. 아이는 매번 “괜찮아요...”라며 사양하곤 했었다. 그 말에 어르신들은 산에서는 그냥 받아도 된다며 손에 쥐어 주셨다. 아이는 그때 이후로 산에서 받는 사탕이나 젤리는 받아서 먹기도, 다시 나에게 주기도 했다.

실은 아이가 학교에서 이렇게 배웠단다. 다른 사람이 주는 것은 절대로 받으면 안 된다고. 특히나 먹을 것은 더더욱. 알지 못하는 사람이 호의처럼 베푸는 행위가 나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알 수 없는 게 사실이다. 특히나 학교 앞에서, 힘없는 어린아이들에게 악한 감정을 갖고 그럴듯하게 베푸는 호의는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될 수 없다. 현실은 아이들을 상대로 악한 호의들이 일어나고 있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라고 해야 할까. 이 씁쓸한 괴리. 타인의 호의를 어떻게 구별하고 판단할 수 있을까. 산에서 만나는 등산객이 베푸는 호의는 모두 호의적일까. 편의점 주인이 건네는 공짜 초코빵은 무조건 ‘감사합니다’라고 으레 받아야 하는 걸까. 호의를 받는 사람의 생각도 이럴진대, 베푸는 사람은 또 어떤 생각으로 베풀 것인가. 모두가 똑같이 베풀지 않으면 간단한 일일까. 세상이 각박해졌다고, 세상이 변했다고, 그래서 모두가 ‘노’라고 하는데, 나 혼자 ‘예스’라고 외치는 것도 무모하게 느껴지고. 베푸는 게 되려 상식에서 벗어나 보이고, 그래서 모두가 더 이상 베풀지 않는 세상. 특히 모르는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더. 서로가 거리 두기만 하는 세상을 모두가 바라고 꿈꾸고 있지는 않을 텐데. 세상은 점점 모두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듯하다. 편의점 주인아저씨가 건네준 초코빵을 보고 있자니, 한 번에 ‘감사합니다’로 응답하지 못한 내가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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