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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절에가다 Dec 28. 2023

전쟁과 사진

<타인의 고통> 수잔 손택

“전쟁을 일으키는 행위는 곧 사진을 찍는 행위인 것이다.”

<타인의 고통> 104쪽     



'타인의 고통'은 나의 고통과 함께 시작되었다. 책 앞부분에 배치되어 있는 사진들과 그림들에 한동안 눈이 머물렀다. 당황스러움을 넘어 고통스러웠고, 타인의 고통을 직면하는 것이 나의 고통을 불러오는 일임을 체감했다. 그 그림들과 사진들은 사실 익숙하지만 익숙해지고 싶지 않은 것들이었다. 신문 지상에서 혹은 각종 매체에서 오늘도 열심히 보도되고 있는 전쟁 관련 사진들과 기아 난민 사진들, 단두대 처형 장면을 묘사하는 것 같은 그림들. 그 사진과 그림 앞에서 나의 고통의 정도가 깊을수록 타인의 고통에 깊이 공감하는 것이고, 나의 고통에서 빨리 벗어나고자 책장을 넘기는 일은 단지 연민의 감정에서 더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이 책에서 말하고 있다. 오늘도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고, 누군가의 아들들은 허상을 향해 총구를 들이대고 있으며 아프리카 기아 난민들이 여전히 사지를 늘어뜨리고 외계 형상을 하고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오늘도 어제처럼 내일도 오늘처럼, 익숙한 듯 익숙해지고 싶지 않은 고통스러운 이미지들이 근거리에서 우리를 잠식하고 있다.  



고통의 증명, 사진 


"사진은 죽음을 길동무 삼아오다"


이 한 문장이 오래 남았다. 사진과 죽음이 친밀한 관계에 있는 듯한 이 문장에서 죽음을 직접 목격한 사진작가와 사진작가가 길동무 삼아온 사진을 방구석에서 가만히 바라보는 독자가 떠올랐다. 사진 속 죽음을 직접적으로 목격한 사진작가와 그 죽음을 간접적으로 목격하는 독자. 그들은 모두 사진 속 죽음과 무관하다고 여기고 있는 방관자들. 사진작가가 배달한 아침상 위의 죽음을 애피타이저 삼아 흘려 넘기는 바쁜 현대인. 그들에게서 우리 모두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흔히 전쟁 사진 속에는 누군가의 죽음이 박제되어 있고, 우리는 죽어가는 혹은 죽어 있는 존재를 사진 속에서 만난다. 사진 속 그 누군가는 죽어가는 혹은 죽은 그 상태로 박제된 채 그 속에서 영원히 존재한다. 영원히 학대받고 있는 혹은 학대받은 상태로 남아 있기도 하고 어쩌면 살해 직전의 모습으로 영원히 그 안에 머물러 있다. 사진 속에서 그 순간 그 모습 그대로 머무르기에 시간이란 요소는 피사체에게 무의미하다. 그들의 참혹한 순간이,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그 순간이 그것을 응시하는 모든 이에게 현재 지금 상태로 뇌리에 남아 각인된다. 사진 속 그들은 영원히 현재 진행의 상태에 있다.


사진은 이렇게 사진 속 이들의 고통을 증명하는 일을 담당한다. 특히나 전쟁 사진에는 총, 칼 든 군인들의 모습이 빠질 수 없고, 그들은 적이라는 존재에 의해 고통을 받고 있거나 적이라 불리는 존재에게 고통을 주고 있다. 전형적인 전쟁 사진에 아군과 적군은 잘 구별되지 않음에도 내편이 아니면 모두 적으로 간주된다. 군복을 입고 군모를 쓰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전쟁의 전형성을 띠고 있고, 내가 살기 위해 상대방을 적으로 여길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다. 아군이나 적군 모두 자국을 위해 동원된 전쟁의 또 다른 희생자들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애써 눈을 감고서. 나의 생존을 위해 타인에게 총구를 들이댈 수밖에 없는 운명 아래에 놓여있는 전쟁의 희생자들. 나의 생사가 달린 전쟁통에 그 어떤 이념이나 거대 담론은 무의미하다. 타인의 고통을 인지하는 일도 나의 고통에서 먼저 자유롭고 해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내 삶 없이는 타인의 삶도 없듯이, 나의 생존이 보장되어야 타인의 생존도 보장해야 한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쟁의 미학, 연출된 사진

 

“사진 없는 전쟁은 없다"라는 말은 전쟁에서 사진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게 한다. 사진 속 피사체의 고통을 증명하는 그 사진들을 통해 우리는 전쟁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다. 전쟁터에서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는 사진작가들을 통해서. 직업의식 혹은 소명의식을 장착하고서 전쟁 실상을 만천하에 알리고자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있는 전쟁 사진작가들. 최대한 객관적으로, 주관적 해석을 배제하고서 전쟁 상황을 투명하게 전달하고자 애쓰는 사진작가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그러나 수잔 손택은 말한다. 전쟁의 미학과 사진의 미학은 동일하다고. 카메라의 렌즈와 총구는 동일한 상징을 가진다고. 전쟁 상황에 카메라를 들이대 그 상황을 세세하게 기록하고자 남기는 행위나, 적군을 샅샅이 뒤져 섬멸하고자 하는 군인들의 행위는 그리 다르지 않다고. 그렇기에 사진은 아군들에게는 승리의 전리품과 같은 역할을 할지도 모르겠다. 적군들에게는 패배의 쓰라린 고통을 두고두고 기억할 수단이 되기도 하는 것처럼. 사진작가는 전쟁에 참여한 또 다른 제3의 아군 혹은 적군으로 전시 상황에 참전 중일 지도 모르겠다. 총부리는 아니지만 카메라 렌즈를 들이밀며 피사체의 고통을 카메라에 담는.


그렇기에 사진작가들은 사진을 하나의 메시지로 이용하기도 한다. 한 컷의 미학이 전쟁 전체의 미학으로 발전할 수 있으니, 그 한 컷에 심혈을 기울이게 되고 그러다 보니 자신의 입맛에 맞게 피사체의 구도나 배치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심심찮게 보도되고 있는 사진들이 어쩌면 찍는 사람의 주관성이 가미되고 조작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좀 더 사실적으로, 좀 더 현실적으로 혹은 좀 더 극적으로, 좀 더 자극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 사진작가의 예술성이 가미되는 순간이다. 예술적 혼을 사진에 드러내고자 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사진이 아니라 작품으로 변모한다.  



깨어있는 것과 읽는 행위, 타인을 공감하는 일 


그러므로 깨어있어야 한다. 우리에게 노출된 사진들을 아무런 비판 없이 마냥 받아들이는 것은 지성인으로서 마땅한 일이 아니다. 깨어있지 않고 무한정 받아들이는 것은 미성숙하고 어리석은 일이라고 수잔 손택은 말한다. 인간의 본성은 전쟁에 우호적이고 전쟁을 수단으로 타인의 고통에 병적인 호기심을 채우기도 한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인지하고 나 자신을 비롯해 깨어있으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 않았을까. 나 또한 타인에게 언제든 어떤 방법으로든 고통을 줄 수 있는 존재, 타인 또한 나에게 그러할 수 있는 존재이니.


인간은 자극적이면 자극적일수록, 극적이면 극적일수록 이상야릇한 쾌감을 느끼고, 누구에게나 관음증과 같은 타인의 나체를 보고 싶어 하는 본능이 있듯  고통 또한 곁눈질하고 싶어 하기도 한다고. 타인에게 고통을 주며 쾌감을 느끼는 것과 사진 속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고 점차 무감각해지는 것은 그다지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깨어있는 동시에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수잔 손택은 문학의 힘에 대해 호소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가 문학을 가까이에 해야 하는 이유는 꽤 호소력이 있어 보인다. 타인의 삶을 살아보는 것, 나와 다른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타인을 미세하게나마 이해하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전쟁 소설 혹은 전쟁 영화 속 어느 군인의 생생한 목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전쟁의 참상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고, 타인의 고통에 조금은 깊이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희망으로. 신문에 박제된 사진 속 전쟁 지역의 모습에 눈길 한 번 더 주고 그들의 고통을 전채 요리 먹듯 무감각하게 반응하지 않는 것. 이 고통을 야기하는 것도 당하는 것도 모두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직시하면서. 우리 개개인이 타인의 고통에 조금이라도 다가가는 일이 그럴법한 나의 고통에도 미세하게나마 공감을 받는 일이기도 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있을 법한 고통을 주는 일에 조금은 제동을 걸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이기에 변화를 꾀할 수 있다. 현실직시도 깊은 공감도 스스로를 절제하는 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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