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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절에가다 Dec 21. 2023

온전한 한 명, 어린이

<어린이라는 세계> 김소영

“나는 어린이에게 우정을 주고 싶다.”

<어린이라는 세계> 152쪽        


       

어린이라는 존재, 어른의 시선    


세상에는 어린이가 존재한다. 현재 어린이라고 불리는 사람, 과거 어린이라고 불렸던 사람, 그리고 앞으로 태어나 어린이라 불릴 사람까지. 지금까지 어린이가 존재하지 않은 세상은 없었다. 한 때 어린이라고 불렸던 우리는 지금 어른으로 자리하고 있고, 다시 이 땅에 어린이를 자리하도록 하나의 역할을 부여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태어나 어린이로 살아가다 세월이 지나 어른이 되고, 어른은 다시 어린이를 태어나게 한다. 세상에는 어린이가 있고 어른이 된 어린이가 있으며 태어날 어린이가 있다.      


어린이는 인생 전체에서 어떤 범주에 속할까. 단지 나이가 어리다고 어린이일까? 얼마큼 어려야 어린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이가 많으면 어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성인에 대한 우리나라 법적 기준 만 19세가 넘으면 어른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어린이와 청소년의 구분은, 청소년과 어른의 구분은.

      

이 책 <어린이라는 세계> 안에는 어린이에 대한 다양한 생각과 시선이 담겨 있다. 아이는 서투르다, 허세 가득 부풀리기 신공을 날린다, 무서움이 많다 혹은 어린이는 대개 착하다 등. 이 말을 이렇게 바꿔볼까. ‘나는 서투르고 무서움도 많고 가끔은 허세 가득 부풀리며 말하기도 하지만 대개 착하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라고. 신발 끈을 잘 묶지 못하는 아이의 서투름에서 두꺼운 겨울 이불을 항상 가지런히 개지 못하는 내가 떠오르고, 무서움이 많은 아이 얘기에서는 여전히 혼자 밤을 지새우는 게 무서워 밤새 영화를 보곤 했던 나를 떠올렸다. 착하다는 말은 이제는 좀 반사시키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어린이뿐만 아니라 어른도 사실 마찬가지다. 어린이들이 그러하다는 생각은 단지 어른의 시선에서 나온 고정관념일 뿐, 우리 모두 그러하다.              


  

어른이라는 존재, 부모 그리고 선생님     


어린이가 존재하기에 어른이 존재한다. 어린이가 커서 어른이 되고, 모든 어른은 어린이라는 어린 시절을 거쳐왔다. 어린이를 거쳐온 어른이 어른이기 위해서는 어린이와 달라야겠지. 너와 나 하나의 개체로 존재함은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관점에서 받아들여져야 하지만, 역할의 관점에서 어른은 분명 어린이와 달라야 한다.      

어린이가 경험하는 첫 어른은 ‘부모’다. 태어나서부터 자신을 어르고 달래는 어른이 있다. 내 시선 안에 내 품 안에 다 담을 수 없는 거대한 어른이 나를 따라다닌다. 시간이 갈수록 그 어른은 어린아이의 시선에 품에 다 담을 수 있게 되고, 아이는 그 어른이 더 이상 그리 거대해 보이지 않게 된다. 아이의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도 부모지만 부모의 인생 또한 아이로 인해 달라질 수 있다. 어린이였던 자신을 회상하며 내 부모를 떠올리기도 하고, 더 나은 인생을 살기 위해 노력하기도 하고. 아이의 인생과 나의 인생 모두를 변화시킬 수 있는 일인 만큼 부모라는 존재는 ‘무거운 자리’다.      


어린이에게 또 다른 어른은 ‘선생님’이다. ‘가장 일상적으로 만나는 전문가’이며 ‘유일하게 만나는 지식인’(118쪽)이기도 하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어린이를 사랑으로 가르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149쪽)라고. 얼핏 들어서는 내 아이가 이런 선생님을 만나지 않았으면 한다. 하지만 저자는 본인의 마음이 너무 헤프기에 사랑을 주기 시작하면 자신을 보호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을 퍼주어 금방 파산할 것 같다는 말과 함께, 독서교실에서 아이들에게 유료로 수업을 제공하는 입장에서 어린이들에게 사랑을 보상으로 주는 일은 불공정 불공평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저자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나는 어린이에게 우정을 주고 싶다(152쪽)’라고. 우정을 주고받는 어린 제자와 선생님이라니, 이렇게 멋진 관계가 또 있을까. 내 아이가 만난, 혹은 만날 선생님들과 아이가 우정을 나눌 수 있는 관계로 발전했으면 좋겠다. 나부터 내 아이와 깊은 우정을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널 우정 한다.              


 

어른은 어린이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3부 세상 속 어린이’ 부분에서는 사회 속 어린이를 조망하면서 어린이와 함께 살아갈 세상 속 어른의 역할에 대해서 생각하게 했다. 존대 언어가 존재하는 우리나라, 어른에게 존댓말을 써야 하는 어린이라는 주체. 이미 상대와 위계적인 관계에 놓이는 어린이라는 사람. ‘존댓말을 하는 쪽은 자기감정을 표현하기보다는 상대가 표현한 감정을 알아차리고 대응한다 (191쪽)’,라고 저자가 언급하듯 위계가 있는 대화에서 감정노동을 하는 주체는 어린이다. 예의범절이라는 거대단어 앞에서 어린이들은 감정노동을 하고 있다. 서열을 파악하고 눈치를 보며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 어휘를 고른다. 저자가 말한 대로 경험은 어른들이 더 많은데 어린이들이 존댓말을 하며 책임을 더 많이 지고 있다.      


김현경의 <사람, 장소, 환대>라는 책에서처럼, 태어난 모든 사람은 사회 속에서 온전한 자신의 자리를 가져야 한다. 너도 나도 하나의 자리를 차지해 사회 구성원으로 존재해야 한다. 어린이들도 마찬가지. 온전한 한 명의 자리가 어린이들에게 주어져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책에서는 약자 혐오와 차별의 태도라는 이름으로 현실을 고발한다. ‘노키즈존’ ‘노배드페어런츠존’이라는 단어들이 우리 삶에 스며들어 어린이를 소외시키고 있다. 자신의 자리를 고수하기 위해 타인을 배제하고 소외시키는 삶이 당연시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한때 키즈였던 사람들이 앞으로 키즈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들이(노실버존이 있다고 들었다) 키즈를 허용하지 않고 키즈는 배제하는 것이 바람직한 사회일까. 그럼 키즈들은 어디서 공공예절을 배워야 할까. 키즈카페에서 다른 키즈들과 함께 뒹굴며 놀며 배우는 문화, 더 이상 자라지 못하고 그 상태 그대로 멈춰 있는 키즈들.     

 

저자는 부드럽지만 강하게 촉구한다. ‘약자에게 안전한 세상은 결국 모두에게 안전한 세상이다. 우리 중 누가 언제 약자가 될지 모른다. 우리는 힘을 합쳐야 한다(219쪽)’라고. 우리나라 출생률이 제로에 가까워질 날이 얼만 남지 않았다고 사회 전반에서 아우성이지만, 과연 우리가 어린이들을 온전한 한 명으로 제대로 대우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어린이들이 어른에게 존댓말을 하는 것이 동방예의지국에서 당연한 일이지만, 어린이들은 그 당연한 호의를 어른들에게 베풀고 있다. 위계적인 대화에서 나름의 감정 노동을 하면서 아랫사람으로서 책임을 다하고 있다. 하지만 사회 속에서 어린이들의 자리가 온전한지는 모르겠다. 사회가 잘 굴러가게 하기 위해 책임만 부여받은 오늘날의 어린이들. 종종 소외되고 배제되는 약자로 존재하는 어린이들. 간혹 어린이들의 순수함을 이용하고 대상화하는 어른들, 그들의 오락의 소재로 쓰이는 어린이들. 어른이 된 우리는 과연 어린이를 제대로 대하고 있는지 자문해 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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