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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의 하루는 맑음 Aug 26. 2024

1. 저도 제가 만성우울증인 줄 몰랐습니다.

나의 과거 이야기




저는 만성우울증입니다. 




이 진단을 받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정신병원을 찾아가 진료를 받고 나서야 제 마음의 이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처음엔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30살의 나이인 제가 15살 때부터 계속해서 우울증이라는 아이와 함께 지냈다는 것을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받아들여졌습니다.


저의 환경은

누구에게는 조금 다른 환경이라고 생각할 수 있고, 누구에게는 같은 상처일 수 있는


제 과거를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어릴 적 기억나는 시점은 중학교 2학년 때부터입니다.

그 이전의 기억은 군데군데 기억이 나지만 또렷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15살 때부터의 기억은 지우고 싶어도 또렷이 기억납니다.


지금은 이혼이 흔한 것이 되었지만 그 당시만 해도 부모님 이혼은 반에서 왕따를 당하거나

놀림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저 역시 도대체 어떻게 소문이 나는지 몰랐지만 소문이 돌았고, 약간의 괴롭힘을 받았습니다.

처음엔 저와 같이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저를 멀리하는 게 느껴졌고 

그 이후엔 괴롭힘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도 힘들지 않았습니다. 

집에서 일어나는 일에 비해서는 새발의 피, 아니 지나가는 돌멩이보다도 하찮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런 학교마저도 제게 숨 쉴 공간이었습니다.


집은 꼭 전쟁이 막 끝난 후의 모습처럼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었습니다.

어지럽혀져 있는 물건, 오묘한 가족들의 표정, 자기 몸 하나 못 가누는 술 취한 남자 하나, 울고 있는 어린 남자아이,

눈물을 머금고 집을 치우는 두 여자 아이 이것이 저의 집 모습이었습니다.


괴상하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물론 원래부터 이러지 않았습니다.

엄마의 바람으로 이혼을 하고 아빠는 술독에 빠져 일하지 않았습니다.

그때부터 집이 괴상하게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빠는 매일 술과 함께 우리를 폭언으로 괴롭혔고

어쩔 때는 5시간 동안 앉혀놓고 이야기한 적도 있습니다.

내용을 들어보면 그냥 온통 남 탓, 우리를 향한 욕, 엄마를 향한 원망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폭력은 절대 휘두르지 않았습니다. 

단지 집안의 물건을 던지거나 부술 뿐..

오히려 그때의 전 폭력을 행사했으면 좋겠다고 항상 생각했습니다. 

그래야 신고라도 하지... 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사춘기 시절의 집의 모습은 엉망진창이었고, 학교에서는 약간의 괴롭힘이 있었고,

경제 상황에서는 돈이 없어 급식비를 1년 넘게 못 내서 졸업을 못 할 뻔까지 갔었습니다.

다행히 마지막에 큰 집에서 도움을 줘서 간신히 언니와 저 둘 다 졸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이 5년 간 반복했습니다.


성인이 된 언니는 회피를 하기 위해서인지 즐기는 건지 모르겠지만 매일 밤늦게까지 놀고 집에 신경을 놓기 시작했고 아빠는 여전했고 이제 갓 고등학생이 된 저와 초3인 남동생인 저희는

아무런 어른의 보호 없이 자라야 했습니다.


전 모든 집안일을 했고 동생을 키우고, 학교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제 꽃다운 10대는 온통 슬픔과 힘듦의 폭우 때문에 빛을 바라며 죽어가다 결국 문드러졌을 때


저는 마지막 남은 힘으로 안 좋은 선택을 하며 신께 기도했었습니다.

제발 이 지옥이 끝나길,

저에게도 평안이 오길 하지만 신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집안엔 온통 피로 번진 위액이 흩뿌려졌고 전 아무 치료도 못 받고 방안의 빨간색 피들을 비참한 표정으로

눈물도 닦고, 바닥도 닦았습니다.

그때생각했습니다. 이것조차 나에게 허락하지 않는구나 그럼 그냥 살아보자 라구요.

그래도 야자가 필수인 학교덕분에 집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제야 약간의 안정적인 공간에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저에게도 드디어 빛이란 것이 들어오나란 생각이 들었었습니다.


하지만 잠시뿐이었습니다.



집의 무게들을 피하려고 하면 할수록 저를 짓눌렀고, 먹구름이 약간의 새어나오는 빛도 가차 없이 가려버렸습니다.

저의 간절한 버팀은 또다시 한계에 부딪혀 제 마음 그릇이 산산조각 나기 일보직전이었습니다.

그럴 당시 저는 친구와 아주 사소하고 사소한 말다툼을 했습니다.

그것이 제 마음을 구제 불능으로 만들었습니다.

기다렸다는 것처럼 말이죠.. 아니 기다린거 같아요.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제가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전 그 이후 바로 자퇴를 결정했고, 집에서 칩거생활을 했습니다.

불행 속에서도 나름 행복하다 느끼면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는데 그것조차 없어졌습니다.

두려움도 불안도 공포도 없었습니다. 그냥 인형처럼 멀뚱멀뚱 눈을 떠 있거나 아님 죽지 못해 밥을 먹는 게 다였습니다.


전 또다시 안 좋은 선택을 했습니다. 

말라비틀어진 눈동자로 방안의 틈새를 모두 테이프를 붙이고는

연탄에 불을 붙이고 또 신께 빌었습니다. 살려달라고, 나를 제발 데려가달라고 빌며 눈을 감았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 이름이 죽음이겠지만, 저에겐 희망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늘은 제 편이 아니었습니다. 신은 여전히 절 데려가지 않았습니다.

원망도 들지 않았습니다. 그저 역시나 안 되는 구나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저의 낭랑 18세에서 23살 아름답기만 하던 그 나이에 저는 그렇게 흘려보냈습니다.

그때의 기억을 돌이켜 보면 없습니다. 떠올리기 싫어서 피하는 것이 아닌 그냥 통째로 사라졌습니다.

그때 한 거라곤 계속 누워있었던 것뿐이라 기억날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혹시 아시나요?


계속 누워만 있으면 머리가 욕창이 생기기 직전까지 간다는 것을? 저는 느껴봤습니다.

움직일 수 있고 너무 건강한 20대 여자의 머리도 계속 누워 있다 보면 욕창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요.

저도 경험하고 싶지 않았어요.


절 더 슬프게 만든 건 제가 그런 상태인데도 부모에게 아무 도움을 받지 못하고 어린 동생을 케어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제가 만성우울증에 걸린 다양한 이유 중 몇 가지입니다.


이후에 저는 벗어나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습니다. 

물론 죽음을 선택하고 싶었던 적은 많았지만, 결국 제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살아보려고 행동을 취할 수 있는 힘을 기르기까지 무려 5년이란 시간이 필요했었습니다.


제 경험들이 누군가에게 위로와 약간의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란 생각에

이렇게 타자기에 손을 올려 써봅니다.


저도 아직 극복 중에 있지만 한 마디 하고 싶습니다.


살아가세요.

살아가세요. 




 오늘 하루를 버틴 모든 사람들에게..

혹시 여름의 능소화를 아시나요?


능소화는 온갖 뜨거운 햇살과 폭우 같은 시련을 맞이하고 아름다운 주황색꽃을 피웁니다.

당신이 꽃을 피울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응원합니다.

그리고 꽃이 안 피면 어때요. 

그래도 이름마저 이쁘디 이쁜 능소화인건 변함이 없는걸요.

저도 아직 꽃 피우지 못한 능소화입니다.

아직 저의 인생에 여름이 오지 않았나 봅니다.

하지만 이제는 기다릴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다려보려고 합니다.





저의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우울증 극복기를 보면서 얻어갔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이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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