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어기제로 시작되다.
반쪽짜리 터닝포인트였던 나의 광복 3월 1일
고등학교를 자퇴하곤 5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여전히 집에선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 폭언과 모든 집안일, 어린 동생 케어, 누워 있는 게
제5년 동안의 일상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전 점점 망가져 가고 있었습니다.
얼굴엔 생기를 잃고, 어떤 표정을 짓는 것도 어색할 정도로 얼굴 근육은 무표정인 그대로 굳어진 채 그렇게 살아갔습니다.
그렇게 5년이 지난 2월 어느 날 문득 잠자리에 들려고 누워 있었습니다.
매일 하루의 15시간 이상 잠을 자던 때였기에 잠이 오지 않자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만 생각이 나던 중 갑자기 한 생각이 제 머리를 스치자 갑가지 온몸에 불안감과 두려움에 몸이 떨렸던 것 같습니다.
'이런 상태로 평생을 살게 되는 걸까?'
이 생각이 스치자 눈물조차 나지 않았던 저는 울음이 났습니다. 그렇게 소리 내어 울어본 적은 지금까지도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눈물이 멈출 것 같으면 제 허벅지를 주먹으로 치며 그렇게 몇 시간을 울었습니다.
이때까지의 모든 감정들을 토하듯이 그렇게 울분에 받쳐 모든 것을 쏟아냈었습니다.
그러곤 또 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여기에 있으면 벗어날 수 없어. 이곳에서 나가야 해. 나가야 해. 나가야 해.'
또다시 전 도망칠 생각을 했습니다.
그게 저의 최선이었습니다.
학교를 그만둔 것처럼 또다시 전 제 방어기제인 회피를 생각했습니다. 아빠와 싸울 생각조차 못 했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저를 또 도망가게 만들었습니다.
아마도 제가 벼랑 끝에 있을 때면 스스로가 저를 살리기 위한 방법으로 회피를 선택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퇴를 할 때도 죽기 직전의 마음상태였고, 집을 나가야겠다고 생각할 때도 죽기 진적의 몸부림이라고 생각합니다.
회피가 나쁘단 걸 알지만 그때의 전 그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제 책임을 버리고 전 그렇게 집을 떠났습니다. 23살의 어린 나이에 말이죠.
그렇게 집에서 도망쳐 나온 날이 3.1 절이었어요. 기억이 나는 게 3.2일부터 교육을 받기 위해 1일에 집을 나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꼭 제 인생의 광복을 위해서 3.1 절 운동하듯이 그렇게 힘겹게 나왔습니다. 그날이 제 인생의 완벽한 터닝 포인트였고 이제 행복만 남았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반쪽짜리 터닝포인트였어요 세상에 저를 나올 수 있게 했고 그날의 전과 후의 생활과 감정은 많이 달라졌지만 근본적인 우울은 해결되지는 않았기에 끊임없이 저를 옥죄어오고 괴롭혔어요...
부산에서 경북 상주로 떠났습니다. 부산에 있는 것조차 치가 떨릴 정도로 싫었기에 전 번호를 바꾸고 제 수중에 30만 원이라는 작은 돈을 가지고 무작정 도망쳤습니다.
남동생이 성인 될 때까지만 기다리려고 했지만 제 숨통이 끊어질 것 같아서 전 아빠에게 내일 집을 나가 독립하겠다고 말을 하고는 그렇게 옷 몇 벌을 들곤 버스를 탔습니다.
그때 아빠의 딱 한 마디 대답은
' 너 알아서 해라.'였습니다.
누가 보면 며칠 놀러 간다고 생각할 정도로 저의 짐은 한 없이 작았습니다.
다행히 골프장 캐디로 기숙사 생활을 할 수 있어 그곳에서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전 23살 처음으로 돈을 벌고, 자유가 생겼고, 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힘이 생겼습니다.
처음엔 너무 힘들었습니다.
골프에 골자도 모르는 제가 캐디를 하기 위해 한 달간의 무보수 교육을 받아야 했고, 30만 원으로 한 달을 버티느라 굶어야 했으며, 일을 나가도 온통 모르는 것뿐이라 항상 의기소침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전 돌아갈 곳이 없었기에 이 악물고 버텼습니다.
처음 사회생활과 온전치 못한 정신상태로 일을 시작해 같이 일하는 동료들 사이에서도 욕을 많이 먹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애써 무시한 채 그렇게 2년을 악착같이 돈을 모았습니다.
돈을 쓸 곳도 없었어요. 워낙 시골이라 근처 편의점에서 과자 사 먹는 정도면 돼서
2년 동안 약 5천 정도 모았던 것 같아요.
그렇게 2년 동안 많이 힘들어했어요. 아무 연고도 없고, 사회경험도 없고, 돈도 없고 맨 몸으로 태풍이 부는 바닷속을 뛰어드는 듯했어요. 하지만 한편으론 행복했어요.
방 안에서 술 취한 발걸음 소리에 두려움을 떨지 않아도 됐고, 사고 싶은 것을 살 수 있었고, 가고 싶은 곳을 갈 수 있었고 모든 것이 제 의지에 달려있다는 게 행복했어요.
수중에 돈도 있고, 주변에 친한 사람들도 생겨 마음에 여유가 생겼어요. 2년이 지나니
주변 제 나이와 똑같은 다른 여대생들이 보였고 너무 부러웠어요.
대학교는 가고 싶지 않았기에 가지 않아도 됐지만, 평범하게 아르바이트하고 연애하고 하는 것이 부러웠어요.
그래서 전 또다시 선택했어요.
일을 그만두고 다시 부산으로 돌아가는 것을요.
그렇게 이번엔 수중에 꽤 많은 돈을 들고 부산으로 가 원룸에서 생활하며 하고 싶었던 카페 알바를 하고, 운동을 하며 그렇게 일반 25살 여자들처럼 살아가며 못 갔던 여행을 실컷 갔던 것 같아요.
국내 기차 여행, 여러 해외여행등을 다니며 점점 제 자신을 찾아가는 듯했어요.
웃음이 많아지고, 얼굴에 화장도 하고 친구들과 술도 먹으며 그렇게 지냈던 것 같아요.
그때는 정말 누가 천억을 준다 해도 바꾸지 않을 행복을 느꼈던 때인 거 같아요. 하지만 마음속 한 구석엔 저의 우울은 사라지지 않았어요. 행복했지만 불행했어요.
저에겐 자유가 있지만 울타리는 없었기에 어디든 갈 수 있지만, 위험해도 구해줄 누군가가 없다는 사실이 불안했어요. 하지만 애써 외면하며 마냥 행복하고, 사랑 많이 받아 온 사람, 자존감 높은 사람처럼 행동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주변사람들은 알고 있더라고요. 옛날부터 지금까지 가장 많이 들었던 말들은
' 넌 정말 어른스럽다. '
' 독립심이 강하다. '
' 마음을 쉽게 내주지 않는다. '
' 벽이 느껴진다. '
' 뭔가 슬픔이 느껴진다. '
같은 말들을 많이 들었어요.
아마 감추려고 해도 감출 수 없는 무언가 들이 사람들에게 보였던 것 같아요.
그래도 행복했어요. 가슴속 먼가 공허했지만 그 정도 공허는 지금까지의 힘듦에 비해선 새발의 피였기에
애써 무시하며 그렇게 사이버 대학도 다니고 자격증도 따며 미래를 준비해 갔어요.
하지만 역시나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으니 시간이 지나자 저의 옛날 모습으로 돌아갔던 것 같아요.
다시 무기력해졌고, 모든 것이 재미없어졌고, 살아야 할 의미를 찾을 수 없었어요.
하지만 돈을 벌어야 했기에 계속 카페 알바를 이어가며 그렇게 힘겹게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을 때
그때 난생처음 첫 남자친구를 만났어요.
그러곤 내가 터닝포인트라고 생각했던 3월 1일이 완벽하지 않았구나를 깨달을 수 있었어요.
그 친구 덕분에요.
그 친구의 이야기는 다음 편에 계속할게요.
내가 가장 부러우면서 싫어하는 가사 한 줄
-날 진심으로 사랑해 준 첫 번째 남자는 바로 아빠니까요. < Camila Cabello-First Man 노래 >
이 가사가 그때의 아빠대사와 대조되어 지금까지도 마음이 먹먹하고 서럽습니다.
-그때 아빠의 딱 한 마디 대답은
' 너 알아서 해라.'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