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고통”과
5년의 대장정이 막을 향해 다다르고 있다.
의료사고 이후, 얼마나 나는 힘들고 위태로웠었나.
무너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했지만, 온전하게 기댈 곳 없이 꿋꿋한 척 버티던 세월은 물에 불은 나무 기둥처럼 썩어갔다.
누굴 위해 살아야 한다기보단 나를 위한, 나를 먼저 생각하며 남은 인생을 살아나가야지 하는 마음으로 살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면서 외롭다고도 느껴지던 순간 왕자님을 만났고, 새로운 만남과 함께 내 발도 의인을 만나 재재수술을 받고 1년.
이젠 아프고 힘들 때 이 사람에게 기대도 되겠다고 하며 1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발에 박혀있던 핀을 제거하는 날이 다가왔다.
첫 수술 때는 부모님이 계셔서 의연한 척, 무섭지 않은 척하며 수술실에 들어갔다가, 차가운 수술실의 공기와 환한 조명에 압도되어 엉엉 울었고,
두 번째 재수술 때는 망가져버린 몸과 대상 없는 원망, 다시는 정상적인 발로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에 수없이 눈물을 흘리다,
수면 가스를 마시고 잠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익숙해진 병원 접수나 절차를 마치고 자연스레 입원 대기표를 끊고 앉았다. 그리고 그 옆에는 내 짐 가방을 들고 목발을 한 왕자님이 앉아있었다.
이제 우리는 주변에서 환장의 커플이라 불린다. 너무 사랑해서 다리 아픈 것까지 닮아가냐고 우스갯소리로 말하는데. 슬프지만 웃기다. 웃프다.
병실을 안내받고 나는 다음 오전 7시 첫 수술 시간대에 수술하게 되었다는 안내와 수술 전 동의서와 주의사항을 듣고 병실 옆에 있는 휴게공원으로 나왔다.
다리가 다 나으면 앞으로 우리가 하고 싶은 것들을 얘기하고, 그간 힘들었던 과정들을 풀어놓았다.
그래도 주변에 좋은 사람들과 응원해 주는 사람 덕에, 그리고 왕자님 덕에 이렇게 끝을 향해 가고 있다고 감사함을 느끼며 그의 팔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왕자님이 밖에서 사 온 매운 돈가스를 먹으며 수술 전 든든히 배를 채우고 푹 잠에 들려했지만,
심각하게 코를 고는 옆에 환자 때문에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수술실로 들어갔다.
수술은 간단할 줄 알았지만 생각보다 핀제거 외에 주저앉은 발바닥 뼈를 깎아내고, 유착된 힘줄을 자르는 등 다른 수술들이 추가되면서 4시간 정도 걸렸다.
마취에서도 한동안 깨어나질 못해 7시에 수술실로 갔던 나는 3시가 되어서야 정신이 들었다. 통증은 역시나 새벽부터 시작되었다.
입원해 있는 4박 5일 동안 왕자님은 성치 않은 발로 나를 간호했고, 3일 차부터 바닥에 발을 디디게 되면서
나는 왼발, 왕자님은 오른 정강이. 같이 걸으면 투명한 끈이 묶인 것처럼 이인삼각 달리기를 하는 모양새로 서로 의지하며 병원을 돌아다녔다.
이렇게 둘 다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혼자였으면 버티기 힘들고 참담했을 순간들을 함께여서 이겨낼 수 있었던 것 같다.
절뚝이고 있는데 옆에서 같이 절뚝이니 웃음도 나고, 의지할 구석도 생겼다. 우울증이 비껴갔다.
우리는 수술 시기랑 회사에서 받은 병가 시기가 달라 재활시기가 완벽히 맞진 않았지만, 일주일 정도는 재활시기가 겹쳤다.
그때 집 근처 산책을 같이 하는데 20분 걷던 거리를 둘이 1시간 넘게 걸으니 그것도 웃음이 났다.
목발을 돌려가며 사용하게 될 줄은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그래도 이번에는 정말 잘 낫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수술 후엔 ‘잘 나을까, 또 뼈가 틀어지는 건 아닐까.’ 이런 염려나 걱정을 했었는데
그럴 생각할 틈이 없게끔 왕자님이 옆에 있어줬고, 계속 나를 웃게 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같은 건 없다. 길이 이어져 있기에 터널은 만들어진다. 터널은 도착지까지 빨리 가기 위하여 만든 굴이다.
굴을 파내는 작업은 힘들다. 인생 또한 힘들다. 그래도 그려나가는 목표지점이 있기에, 그곳에 더 빨리 가보기 위해 사람들을 굴을 판다.
지면이 무너지면서 터널이 막히고, 어두컴컴한 시행착오가 이어지지만 우리는 결국, 도착지를 향해 갈 것이다.
그게 둘이어서 조금 더 기운이 나고, 피식 헛웃음을 지을 수 있는 순간이 생긴 것일 뿐.
결국, 지치지 않는 나와 왕자님은 “진정한 행복”이라는 길을 찾아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