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아치우먼 Dec 09. 2020

 요리 못하는 며느리가 사는 법

시엄니와 24년째 합가, 이렇게 삽니다



배고픔이 최고의 소스다.

-세르반테스


아이 셋을 키운 내가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요리는 딱 두 가지밖에 없다. 황태 볶음과 김치볶음밥. 그 나머지는 어째 어째 하기는 하지만 맛이 없거나 아예 맛이 전혀 없거나이다.

아님 우리 가족들의 미각이 조금 예민한 편인지도. 아무튼 내가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를 하면 다들 기대하고 먹어주기는 하지만 결론은 재료비가 아깝다, 사 먹는 게 낫다로 끝맺어진다. 폭탄 맞은 부엌 모양새에 시엄니는 이리저리 맴돌며 내가 흘린 흔적들을 주워 담느라 바쁘시다.


며느리에게 부엌을 맡긴 시엄니의 불안함이 그대로 내 등을 따라다닌다.

결혼한 지 25년 째인 나는 요리를 못하기 때문에

시엄니 봉여사의 그늘 아래 빌붙어 산다. 빌붙어 산다고 하면 에이, 모시고 사는 거겠죠, 했다가 삼시 세 끼를 시엄니가 다 차린다고 하면 약간 표정이 달라진다.


뭐야. 시어머니를 부려 먹잖아.

나쁜 며느리네.


같은 현상도 어떻게 바라보는 가에 따라 판단의 차이가 있기도 하지만, 자신의 가치관으로만 타인의 삶을 재단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부려 먹는 게 아니라 각자의 영역을 완전히 보장하는 겁니다. 음식의 영역에 제가 어설프게 간섭하기 시작하면 시엄니는 스트레스를 받아요. 또 제 의견과 부딪히게 되죠. 메뉴 선정부터. 때문에 아예 노터치. 시엄니의 주도권을 완전하게 보장합니다. 생활비로 어머니가 북을 치든 장구를 치든 저는 그냥 따라만 갑니다. 시엄니의 영역에 침범하지 않습니다.

24년 동안 우리는 이렇게 조율했습니다.

밥은 봉여사. 청소는 양아치 며느리



여전히 나쁜 며느리인가?

시엄니와 24년째 같이 살면서 터득한 거리두기의

비법이다. 정통적인 고부관계를 나와 봉여사의 특성에 맞게 재해석하고 세팅했다.

대신 설거지는 내가 한다. 서로가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을 퍼즐 맞추듯이 채워가는 방식.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 24년의 시행착오를 거쳐 나름 큰 그림을 완성해 가고 있다. 이런 원활한 역할분담을 완성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아마 같이 살지 못했을 것이다. 같이 살기 위해 서로가 양보하고 배려해야 한다는 법칙은 가족이든 사회든 똑같이 적용된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결혼할 때 솔직히 고백했다.

저 요리 몬해요.

못하는 것뿐 아니라 취미도 없어요.

시댁 근처에 신혼살림을 차렸고 출근하기 전 시댁에 들러 아침밥을 해결하고 출근했다.

다행히 봉여사가 음식을 아주 감칠맛 나게 잘했다. 내가 못 가진 것을 시엄니가 가졌기 때문에 나는 빌붙어 살아도 되겠다는 본능의 냄새를 맡았다. 남편에게 말도 없이 첫 아이를 낳자마자 짐을 싸들고 시댁으로 들어와 버렸다. 그로부터 24년이 흘렀다.



대학시절 룸메이트가 요리를 대박 잘했다.

대학에서 만난 친구와 학교 앞에서 같이 자취를 했다. 그녀는 고향이 삼천포였는데 나와 동갑인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음식 솜씨는 대장금 수준이었다. 고향집에서 들고 온 생선으로 내장을 빼고 비늘을 쳐서 생선찌개를 끓여주면 정말 개운하고 맛있었다. 그녀의 음식 솜씨 때문에 우리 자취방은 친구들의 아지트로 변모했다.


라면 하나를 끊여도 파와 콩나물, 버섯을 넣고 시원하게 끓여냈다. 그녀의 음식을 먹어 본 사람들은 모두 그녀에게 따봉을 외쳤다.


니는 요리 잘해서 진짜 시집 잘 가겠다.

야, 그거 반페미니적인 발언이야. 그럼 요리 못하면 시집 못 가? 왜 요리는 여자만 해야 하냐고?

내가 라면을 먹다가 눈을 희번덕이며 대들었다.

설거지를 하며 양은냄비를 냅다 처 박았다. 요리를 못하면 설거지라도 해야 해서 요리한 그녀의 뒤치다꺼리는 내 몫이었다. 매번 요리한 그녀는 칭송받고 설거지하는 나는 콩쥐가 된 기분이었다.


나는 요리해주는 남자 만날 거야.

아님, 요리사를 둔 남자를 만나든지.


그렇게 비슷한 맥락으로 살고 있다. 요리사 대신 요리해주는 시엄니랑 살고 있으니. 착한 늑대가 요즘 조금씩 봉여사의 요리를 배우고 있다. 나보다 입맛이 더 예민하고 먹는 것에 관심이 많은 남편은 퇴직 후 조리사 자격증을 가지고 싶어 한다.


뭐야? 요리해주는 남자를 만난 거잖아!

인생은 끝을 봐야 한다더니, 양은 냄비를 던지며

다진 내 소망은 진짜로 이루어지려 하고 있다.

요리는 여자만 하는 게 아니라 잘하는 사람이 하는 거다. 다만 오랫동안 했던 사람이 더 잘할 확률이 높고  관심 있는 사람이 더 잘할 수 있다.


며느리고 엄마고 아내이지만

<나를 요리해야 한다>는 틀에 가두지 않는 가족의 이해는 참 고마운 일이다.  

전통적인 역할분담을 벗어던지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잘 알기 때문에 매우 고맙고 감사하다.

물론 이해의 과정까지는 내 요리의 결과물이 참담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지금도 내가 라면 물 올릴까? 하면 모두들 우르르 뛰어나와 나를 말리거나 올린 물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시어머니의 노동에 빚지며 살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한 끼의 식사를 창조해 낸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두뇌회전과 육체적 노동이 필요한가도. 일곱 식구의 삼시 세끼를 책임진다는 것이 얼마나 고된 노동인지도 안다.

어무이, 혼자 살믄 이래 밥 해 묵겠나?

안 해 묵지. 그냥 대충 김치에 물 말아먹고 말지.

우리랑 같이 사니까 요래 반찬도 많이 하제?

너거 먹이려고 하는 거지.


맞다. 덕분이다. 시엄니는 우리 먹이려고 갓김치도 담그고 갈치도 굽고 미더덕 된장국도 끊인다. 우리는 또 시엄니 덕분에 따뜻한 밥 한 끼를 먹는다. 남이 뭐라든 나는 음식 못하는 며느리지만 싸가지 없는 며느리가 아니라 이해받는 며느리다.


옴마야, 오늘 콩나물 뭇국이 예술이네.

그 말 한마디에 봉여사는 기분이 좋아진다. 손자 밥 위에 봉여사가 발라주는 갈치를 내가 재빠르게 내입으로 휘리릭 가져간다.


저...저, 갈치도 발라줘야 되나?

아이다. 착한 늑대가 발라 주겠지 뭐.

남편 얼굴만 쳐다본다. 금방 내 밥 위로 가시 없는 갈치가 올라온다. 개기는 것이 주특기인 내가 양아치 며느리로 불리는 이유는 이런 것들 때문이다.

양아치 며느리, 이러시면 안되고요!

두번째 갈치 강탈에서는 큰 딸에게 걸렸다. 내가 발라 준다니까. 착한 늑대가 열심히 생선을 바르고 있다. 그 옆으로 시엄니가 갈치를 모르는 척 내 그릇에 얹는다. 이러고 24년째, 아직 공동 생존기에 이상 징후는 없다.



딸 같은 며느리, 삑! 아닙니다.

며느리는 며느리고요, 사람인 며느리입니다.

못하는 것도 있는 사람 며느리요.



주말에 시엄니랑 찐한 커피 한 잔 하러 가야겠다.

기브엔 테이크의 법칙은 모든 사람 관계의 공통된 법칙이니 삼시 세 끼에 대한 보답은 확실하게. 내가 또 돈은 봉여사에게 잘 쓴다.


담에는 이 카페로 한번 같이 가보시게요



이전 03화 에스프레소를 애쓰지마소로 외우는 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