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아홉 살 젊은 청춘을 응원하며
일의 상실은 사람을 주눅 들게 한다
고용센터는 주로 일자리를 찾거나 실업급여를 받기 위한 사람들, 즉 가장 절실한 허탈을 경험한 사람들이 오는 곳이다.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겪는 일,
노동이라는 영역에서 소외되거나 하고 싶은 일을 거부당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런 경험은 흔하지만 유쾌하지 않은 일이다. 고용센터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예민하거나 혹은 주눅 든 경우가 많다.
이런 전반적인 기분 때문에 친절이 더 깊게 깔려야 함에도 종종 우리는 그러지 못했다. 나 다니엘브레이크(일자리와 실업급여를 받기위해 센터를 찾았으나 관료적인 행태에 결국 죽고마는 영국의 일자리 제도에 대한 영화) 가 생각나는 시간들이 많다.
민원인에게 웃어 줄 수 있는 사람
스물아홉 살 청년 영규는 육아휴직을 간 직원 대신으로 1년간 계약직으로 온 청년이었다. 키가 크고 인물도 훤한 영규가 착하고 싹싹하기까지 한건 신기했다. 같이 일하는 우리한테 뿐 아니라 찾아온 민원인한테도 한결같아서 나는 한 번씩 영규가 상담하는 것을 은근히 옆 듣곤 했다.
"일자리 찾기 힘드시죠?
저랑 같이 한번 노력해봐요."
"힘드시죠? 조금만 더 노력하시면 잘 될 겁니다."
대개 영규의 상담은 이런 공감의 말들이었다. 상담 중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해주거나 민원인이 하는 말을 끝까지 귀담아 들어주었다.
일단 영규의 목소리는 톤이 편안했고 말이 빠르지 않았으며 자주 웃었다. 나는 영규 옆자리에 일하면서 민원인을 스스럼없이 진심으로 대하는 모습을 보며 관성에 젖은 나를 반성하곤 했다.
목소리 톤이 부드러울 수 있다는 것, 말이 빠르지 않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아주 작아 보이지만 민원인들에게는 편안한 느낌을 준다. 민원인은 편한 분위기면 자신의 솔직한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며 상담자와의 호흡도 잘 맞게된다. 상담에서는 이걸 라포르라고 하는데 라포르의 기본은 상담자와 내담자의 편안한 관계가 기본이다. 영규의 목소리와 자세는 내가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 처럼 진실되고 겸손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민원인을 진짜로 돕고 싶어하는 마음이 내게도 느껴졌다.
상담이 끝나면 나는 간혹 영규를 칭찬하곤 했다.
영규는 민원의 상담뿐 아니라 센터의 허드렛일도
시키지 않아도 잘 찾아서 하는 바람에 센터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었다.
그를 응원하기 위해 종종 밥을 샀다. 그에게는 커피나 밥을 사줘도 전혀 아깝지 않았다. 영규는 어린 시절 부모님을 여의고 할머니에게서 자란 저소득층 청년, 이름 없는 전문대를 졸업한 스펙이 모자란(그건 주변이 그렇게 봤지만) 청년이었지만 그의 반듯함은 어느 누구 못지않았기에 나는 진정으로 영규의 삶을 응원했다.
스펙에는 있지 않는 삶의 에티튜드
센터에는 영규 말고도 또래 공무원으로 발령받아온 청년과 신규 공무원 2명 더 있었다. 두 사람 다 부모님의 보호 아래 3년 동안 공무원 공시생 과정을
거쳐 센터로 발령받아 온 직원이었다.
서울의 유명한 대학을 졸업했고 대학원까지 스펙을 갖추었으며 서류상으로는 완벽한 청년들이었다.
가끔 그들에게도 밥을 샀다. 그들은 센터 업무를 하찮게 여기는 듯했다. 자신의 어려운 말들을 민원이 잘 알아듣지 못하면 가끔 화를 내거나 귀찮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날은 내가 오랫동안 교육을 다녀온 뒤라 나 때문에 그들에게 더 많은 업무가 부과되었으리라는 짐작으로 영규와 신규직 공무원 2명에게 점심을 샀다. 그러자 영규가 맨날 나에게 점심을 얻어먹었다며 커피를 사겠다고 했다. 내가 괜찮다고 손사래를 쳤으나 영규는 기어이 커피를 샀다. 영규보다 내게 밥을 더 많이 얻어먹은 것은 공무원이었지만 그들은 내게 단 한 번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그런가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영규보다 월급을 더 많이 받았던 두 공무원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영규가 사주는 커피를 얻어 마셨다. 큰돈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때 스펙이 충반한 자의 뻔뻔함과 가난한 자의 예의를 경험했다.
두 공무원은 늘 월급이 적다고 불만이었다. 2천만 원을 주고 산 중고차의 할부금을 갚아야 하며 공무원에게 맞는 옷을 사야 하며 친구들과 해외여행을 다니기 위한 모임 회비를 내야 했다.
그러나 월급 180만 원으로 할머니와의 생활을 꾸려가야 하는 영규는 계약기간이 끝날 때를 대비해 적금을 넣으면서도 툴툴거리지 않았다. 영규는 늘 새로운 일이 자신에게 주어지는 것을 기뻐했다.
그날 영규에게 얻어마신 커피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고 향기로운 커피였다.
두 공무원은 뜨내기처럼 또 다른 곳으로 발령받아 갔다.
흔한 카톡 인사하나 남기지 않고 언제 내가 당신들을 다시 만나랴 하는 쌩한 바람처럼,
머문다 간 흔적도 없이.
아무도 우리는 그들을 입에 오르내리지 않았다.
영규도 1년의 계약기간이 지나 센터를 나갔다. 나는 영규에게 시험정보와 시험공부 방법을 일러주었고 다른 팀장님은 공부할 공간을 제공해 주었으며 점심 밥값을 내주었다. 모두들 영규의 이별에 꼭 다시 센터로 들어오라고 하나같이 열띤 응원을 보내 주었다.
그래도 기죽지 않는
계약직 영규와 공무원이 된 청년들을 보며 자식을 잘 키운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고민하게 되었다.
좋은 차, 안정적인 직업, 높은 연봉, 승진, 출세...
현재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추구하는 사람.
그것들보다 사람에 대한 예의를 차릴 줄 아는 사람, 상대방에 공감할 줄 아는 사람.
현재를 고맙게 생각할 줄 아는 사람.
우리 아이들에게 영규 이야기를 자주 해주었다.
딱 영규처럼만 자라주면 좋겠다는 욕심이 들었다.
영규가 두 공무원 속에서도 기죽지 않았던 것이
나는 더 고마웠다.
치매 할머니를 부양해야 하는 영규는
안정적인 직장을 갖고 싶어 했지만 생계를 이어가며 공부를 해야 했다.
그리고 여러 번 낙방했다.
"선배님, 괜찮아요. 또 하면 돼요."
오히려 영규가 나를 위로했다.
정말 속상해 내가 눈물이 나올 뻔했다.
겨울이 제일 싫다는 영규, 주택이라 샤워하기 싫을 정도로 집이 춥다고 했다.출근 전 할머니 점심식사를 챙겨놓고 나온다는 영규는,
새로운 일을 하며 또 다른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영규가 꼭 잘되길, 성공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펼칠 수 있는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기를 바랬다.
근래 내가 만난 가장 멋진 청년, 영규였다.
나는 아직도 그의 아름다운 삶을 응원하고 있다.
# 알고보니 괜찮은 사람이란게 별게 아니더라.
일이 많은 동료 일을 같이 나누고, 곤란한 일이 생기면 같이 나누고... ..
아, 나누는 게 많은 사람이구나!
너, 참 괜찮은 사람이구나!
당신 참 괜찮은 사람이에요,
그런 말을 듣게 하고 싶고, 듣고 싶다.
쫄보로
살기는 싫으니까, 훌륭하게까지는 아니더라도
괜찮게는, 괜찮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