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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아치우먼 May 15. 2021

그를 배반했습니다

창백한 개


 


우정이란 것에 잠시 걸음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의 꿉꿉했던 날씨와 도화지 위를 물들인 청록색 버드나무 잎이 생각나는 걸 보면 충격은 충격이었던 셈입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쯤이었을까. 여름방학 과제로 풍경화를 그려야 했습니다. 우리는 여름 내내 동네 저수지로 멱을 하러 몰려다녔습니다. 친구가 미술 숙제를 하지 못했다고 저에게 그림을 한 장 더 그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저에게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기에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습니다.



친구의 부탁이었기 때문에 더 정성 들여 그렸습니다. 도화지의 중간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조각배 모양의 점점 커지는 길 위에 버드나무가 서 있고 하늘에는 양떼구름이 청명하게 흘러가는 한가로운 풍경, 멀리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습니다. 이 그림을 받고 좋아할 친구 때문에 더운지도 모르고 몇 시간을 엎드려 붓칠을 했습니다. 우거진 녹음, 물을 많이 탄 초록, 또 노란색이 섞인 연두색까지. 여러 갈래의 초록이 도화지 안에 드러났습니다.



과제를 내는 날, 그림을 받아 든 친구는 제게 고맙다는 말을 건조하게 했습니다. 쑥스러우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친구의 그림에 비하면 되려 제 그림이 초라했지만 개의치 않았습니다. 우정은 그런 것도 양보하는 것이라고, 그때만큼은 비장했습니다.



일주일이 지나 과제 검사가 다 끝난 뒤 선생님은 우리가 제출한 그림들을 각자에게 다시 돌려주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부르며 돌려주었습니다. 친구의 이름이 불리고 선생님이 그림을 건네자 친구는  뒤돌아 자리에 앉기도 전에 그 그림을 북북 찢었고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친구에게 그 따위 그림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 보였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농담을 건넸지만 과제 검사 이후 그 그림을 돌려받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던 저의 마음도 북북 찢겼습니다.


이후 그녀와 우정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초등학교 6년 동안 같은 반을 했고, 중학교 3년을 같이 다닌 한동네 친구였지만 그림을 북북 찢던 야멸찬 얼굴이 더 오래도록 제게 남았습니다.




배반은 그런 것, 친구의 마음을 무시하고 확 밟고 뭉개기까지 합니다. 쓰디쓴 맛입니다. 눈과 코와 입을 비롯한 모든 감각들이 생기를 잃어 위와 폐에 고여있는 허허로운 냄새들이 꿈틀대기 때문에 고약합니다. 그때 제 안에 맴돌던 그 소태 같았던 마음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나를 심연 속으로 밀쳐 넣었어요.....




일생 중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인리히 뵐은 <창백한 개>에서 다룹니다.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우리의 영역이라고, 그가 크게 고함치는 듯합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창백하게 만든 것은 그 시대도 전쟁도 아닙니다. 친구의 냉담과 무관심과 경멸이었죠. 섬뜩한 경고가 심장을 파르르 떨리게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책임이 있지 않겠어요? 그런 것들, 때리는 일들, 이유 없이 죽는 것, 욕망에 우르르 몰려가는 사태, 버려지는 것들. 이것들은 모두 우리에게 책임이 있지 않을까요?



똑똑했지만 불우했던 헤롤트에게 베커는 무한한 사랑을 주며 우정을 가꿉니다. 나치 전쟁에 참여했던 헤롤트에게 베커는 구원입니다. 오로지 의지 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이었습니다. 삶의 영역이 달라진 어느 날, 베커와 연락이 끊어집니다. 불안과 죄의식이 목에 찬 헤롤트는 살기 위해 베커를 찾습니다. 그러나 목사가 된 베커는 헤롤트를 상투적으로 대합니다. 베커에게 실망한 헤롤트는 증오에 가득 차 테러와 살인을 자행하는 <창백한 개>가 됩니다. 그리고 조직에 들어온 한 여인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됩니다.



베커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베커는 목사로서, 국가로부터 봉급을 받는 공직자로서 약간의 사무적인 관심만 보였을 뿐입니다. 베커는, 헤롤트가 보았고 들었고 그리고 경험했던 모든 것, 즉 끔찍한 귀환과.... 배고픔, 혼란, 불안, 폭탄 등에 대해서는 인간적으로 완전히 무감각했습니다.


하인리히 뵐은 직설적이고 저돌적입니다. 상처를 헤집어 소독약을 들이붓는 방식이라고 해야 할까요? 냉소적이고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헤롤트를 서술하면서 동시에 베커를 암시하는 장면들이 뒤통수를 후려칩니다.


헤롤트는 자신이 들어간  그 집단과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밀착되어 있다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베커 또한 헤롤트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속했던 종교적 집단과 밀착되었습니다. 같이 대학을 다니며 어깨동무를 걸었다 하더라도 사회에 나와 다른 집단에 속하면 변하는 그런 흔한 속성들입니다.


되려 헤롤트는 자신의 죄의식에 갇혀 구원을 찾고자 했으나 베커는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목사로 관성적인 삶을 살고 있었죠. 고해하러 가라고, 기도하라고, 보다 나은 사람이 되라고 관성적인 충고만을 건넸습니다. 헤롤트는 완전히 파멸적인 분노로 빠져 들었습니다. 파멸적인 분노란 무서운 것입니다. 인간이기를 포기해 버립니다.



<창백한 개>를 읽다가 보면 헤롤트가 나쁜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베커가 용서 못할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이건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고. 아무런 죄의식을 가지지 않고 관성적으로 살고 있는 우리의 책임이라고, 그가  혹독한 언어로 말합니다.



전쟁을 직접 겪었던 작가의 문학적 씨앗은 여전히 인간이며 현실의 투명한 확대입니다. 안도현의 연탄재, 함부로 연탄재 한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라는 말이 절절하게 와 닿는 단편입니다.


 후려친 감동으로 아직도 가슴이 얼얼합니다. 마음의 떨림을 잘 간직해 보렵니다.





[단편소설]


창백한 개(Der blasse Hund)

하인리히 뵐 지음/ 정인모 옮김

1972년 <여인과 군상>으로 노벨문학상 수상을 한 독일문학의 거장, 그의 유작집


"저는 미국인이나 독일인에게서 도망치고 있는 게 아니에요, 부인. 전쟁에서 도망하는 거죠..."

-파리에서 붙들리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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