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관한 한 정말로 변하는 것은 없다

아문센

by 양아치우먼


브리츠에서 나오는 음률에서도 뭉근한 습기가 베어나는 장마의 한 철, 나는 이전과 다르게 여름을 몹시 거추장스러워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가라앉고 열망이 꺾인 그런 시간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으며 그녀의 단편들을 커피처럼 읽었다. 향은 맡지 않고 습관적으로 입으로 가져가는 방식이, 소설들을 닥치는 대로 눈으로 가져가는 것이 커피처럼이다.



"요즘은 적당한 나이가 되고 적당한 조건을 갖추면

누구나 제도권 안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잖아요."



내가 알았던 그녀는 좋은 조건의 남자를 차버렸다. 집안의 재력과 남자의 직장도 나쁘지 않은 편이었지만 7년간의 연애에 과다할 정도로 기운을 쏟으며 종지부를 찍었다.

"정말 헤어졌다니깐요."

아이스커피를 홀짝이며 그녀는 매번 그렇게 말했다.

어느 날이었던가 내가 물었다. 헤어진 진짜 이유가 납득이 되지 않는다고, 그녀는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럼에도 계속 그 남자와 만남을 이어간다는 게 죄책감이 든다고.

"왜?"

"편하긴 한데 사랑하지는 않는 거 같아서요."

"그럼 사랑한다는 건 뭔데?"

"모르겠어요. 근데... 설렘이 없어요."

"7년을 만났는데 당연한 거 아닌가?"

"..... 처음부터 그런 게 없었던 거 같아요."



1년 뒤에 그녀는 가슴이 설레는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 제도권의 잣대로 보자면 7년을 사귀었던 남자보다 조건이 떨어지는 형편이었지만, 그녀가 결혼할 때만큼은 잇몸이 보이도록 환하게 웃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여행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고 했다.


Bon voyage: 봉 부아야주

즐거운 여행이 되기를.



몇 년 후, 그녀를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너무 지쳐있었다. 생기 있게 흘러내리던 머리를 삐죽삐죽 아무렇게 묶은 모습은 모든 걸 짐작케 했다. 독박 육아로 우울감마저 든다며 둘째는커녕 최대한 빨리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다시 일을 할 거라고 장담했다.

"설레는 건?"

"언니, 내가 그때 내가 잠시 미쳤는가 봐요."

"여행하는 기분이 든다며?"

"무슨? 개 코 같은 소리!"

와인 기운이 퍼지자 철딱서니 없던 자기를 왜 보고만 있었냐고 나를 원망했다. 내가 말했다.

너는 그때 이랬어.


그들은 그저 그들이 모르는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

그들이 모르는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일들, 그들이 모르는 시간에 일어나는 일들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뿐이었다. 그것은 그들에게 방해가 되었고 그들을 성가시게 했다. 그들은 기회만 있으면 라디오 뉴스를 끄고 음악을 들었다.


너는 내가 어떤 말을 하든 듣지 않았어. 내가 말하지 않은 게 아니고. 그렇지만 또 다른 위로가 필요하니내가 새로운 위로를 해 볼게.

"아마도 네가 7년 사귀었던 남자와 결혼을 했더라도 지금의 모습과 별반 다르진 않을 거야."

그녀가 무릎을 치고 배시시 고개를 젖혀 웃으며 말했다.

"그렇죠? 그렇겠죠?"


그날 우리는 두 팔을 벌려 누구든 껴안는 마음으로 어떤 조건이든 어떤 세상이든 내가 가장 행복하다는 최면을 걸며 싸구려 와인을 맘껏 마셨다. 그녀도 나도 거의 3년 만에 홀로 된 외출을 감행했던 탓이어서 취하는 게 그날의 유일한 목적이었기 때문에.

삶에 관한 한 정말로 변하는 것은 없다.


사랑에 관한 한 정말로 변하는 것은 없다.





[단편소설]


아문센

디어 라이프 중의 단편소설

지은이 <앨리스 먼로>, 문학동네

엘리스 먼로는 2013년 단편소설가로 처음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에피나니(epiphany), 그 충돌의 순간에 주인공은, 그리고 독자는 삶에 대한 비밀을 깨닫는다. 어떤 진실이, 혹은 어떤 진리가 번갯불 같은 번쩍임 속에 순간적으로 드러난다. 실존적인 문제 앞에서 주인공이 행복한지 그렇지 않은지는 큰 의미가 없다. 영혼을 뒤흔들 만한 사건이 일어나지만, 그냥 살아간다.

(아문센의 해설중에서)




아문센,

결혼식 날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버림받은 비비안은

우연히 길거리에서 마주친 그 남자의 눈빛에서 사랑의 기운을 포착해 낸다. 그러나 진실을 알았다 하더라도 삶을 뒤바꿀 수는 없다고. 다만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고, 엘리스 먼로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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