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페페로니에서 왔어
낡은 아파트라 그런지 장마가 오자 모기들이 집안에서 웽웽거렸다. 방학중 교수님의 연구과제를 도우느라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엘리스의 발과 다리에 모기가 달려들었다.
"이 새끼들이, 어디 인동 장 씨 피를 감히? 대구 달성서 씨 피를 안물고 말이야?"
그때 나는 배를 깔고 엎드려 누운 채 두 발을 꼼지락 거리며 2020년 김승옥 문학상 수상작품집에서 김금희 작가가 쓴 <우리는 페페로니에서 왔어>라는 단편을 읽고 있던 참이었다.
"대구 달성 서 씨 피는 순수 혈통이 아니고 잡혈이라 모기가 싫어한다고!"
까르륵 웃었고 끈적임에도 우리는 껴안았다.
너는 어디서 왔니?라고 묻자 엘리스가 내 배를 주물럭거리며 여기서 왔지라고 답했다.
소설은 이런 단순한 질문을 은근슬쩍 뒤로 감추고 스무고개를 하는 것 마냥 제 속내를 잘 드러나지 않도록 꽁꽁 숨기는 일이란 생각이 든다. 어렵게 질문하고 또 대답마저 허공에 흩어버리는 것, 사유를 꼭꼭 씹으라고 충고하는 잔소리꾼 같다.
나는 너를 미워할 거야. 거룩한 사명처럼 미워할 거야. 미워할 수 있을 때까지 미워하다가 나도 죽을 거야, 아주 뜨겁게 뜨겁게 죽을 거야.
저렇게 뜨겁게 사랑을 투정 부린 때가 나에게도 있었다. 세 아이의 육아는 늪이었다. 돌아서면 또다시 어떤 일들이 마구 다투어 일어나던 시간에 남편은 오랜만에 후배를 만난다며 하룻밤의 외박을 하고 왔다. 동아리 후배였다. 단 둘이 아니고 두 명의 여자 후배와 남편이었다.
새벽 세시까지 길고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내가 아는 그녀들의 근황에 대해서도 알려주었다.
감정의 신경이 예민하게 끊어 올랐다.
"그래서 후배들이랑 시간 보내고 오니 좋아? 좋냐고?" 후배들을 질투하는 속 좁은 여자라고 남편은 혀를 찼다. 언성이 올라갔고 알맹이 없는 다툼이 한 줌의 바람처럼 스쳐갔다.
내 안의 무언가가 기우뚱하는 것을 느꼈다.
가끔, 그때는 알지 못했던 것들이 한 발짝 시간이 물러 난 뒤로 명쾌해지는 것이 있다. 한 줌의 바람 같았던 다툼의 뒷전에는 나도 대화가 필요한 사람이었다는 사실. 나에게도 밤새도록 내 이야기를 들어줄 어떤 사람이 필요한 시기였다는 것을 한발 늦게 알아차렸다.
'나임'과 '너임' 궁극적으로는 '우리임'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그 전개와 확장이 나쁘지 않은데 교수는 "응, 우리임은 빼고"라고 자른다.
"그런 건 없으니까."
그런 건 없다는 말에 솔직한 내 식의 표현을 보태자면 애나로 그건 맞는 말이다. 힘든 건 나일 뿐이지 우리가 아니었고 내 힘듬의 무게를 고스란히 제대로 재는 건 나인데도 자꾸 뭐가 힘드냐고 재촉할 때 나는 철저하게 나임을 깨닫는다.
"나도 누군가와 그렇게 밤새도록 내 맘을 탈탈 털어 내고 싶다고"
미처 하지 못한 말을 덧붙이자면 내가 남자 선배인 누군가와 세 명이라 하더라도 외박을 하고 왔다면 너는 괜찮았을까, 라는 의문을 남긴다.
나는 어디서 왔을까요?
너는 어디서 왔니?
우리는 어디서 왔을까요?
대대손손 가지를 뻗은 족보의 이름 사이에 존재하는 걸까, 강선이처럼 페페로니피자에서 왔을까?
넌 어디서 왔니, 라는 물음에 내가 대답한다면 하루에 칠십만 번 철썩이는 파도가 사는 바다에서 왔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그렇게 끊임없이 움직이며 순환하는 존재로 살아가니까.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의 대명사 물의 요정 운디네처럼 운명은 늘 짖궂은 얼굴을 하고 있으니, 바다는 태초의 어머니가 아닐까.
할 수 있는 말과 하고 싶은 말의 간극은 무엇이었을까. 할 수 있는 말은 늘 건조했고 하고 싶은 말은 일상에서 자주 묻히기 일쑤다.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그런 용기는, 일상의 인연일수록 더 절실했던 게 아닐까. 그때 잃어버렸던 나의 언어들 처럼.
그리고 할 수 있는 말과 하고 싶은 말 가운데 문장을 고르다,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라고 적어 보냈다.
내가 작품에서 가장 집중하고 있는 장면은 문제의 수업 부분도, 제목의 의미가 발화되는 부분도 아닌 강선을 와락 한 번 안고 헤어지는 그해의 마지막 날이다. (작가의 노트 중에서)
경계나 질투의 대상을 와락 껴안는 힘은 본성적으로 착한 사람임에 있다. 나 좋은 사람 아닌데요, 는 직역하자면 착한 사람 그니까 타고난 순둥이다. 아무리 착한 사람도 제 마음의 솔직함을 알기 때문에 저 좋은 사람이에요라고 말하지 못한다. 그래 나 좋은 사람 아니니까, 하고픈 말은 좀 하고 가보자고 채은경에게 말하고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