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자리
올해 구순(아흔 살)이 된 아버지의 남동생, 삼촌을 뵙고 왔다. 같은 피를 가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느끼게 하는 노년의 굽은 등은 잊었던 그리움을 불러냈다. 반들반들한 이마, 길게 자라 난 허연 눈썹, 웃을 때면 튀어나온 앞니가 도 드러지는 것. 귀가 안 들려 담장을 무너뜨릴 정도로 고함쳐 말해야 하는 것까지. 그러나 삼촌과 아버지는 생전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한 번도 두 분이 다정하게 무엇인가를 의논하거나 서로를 호칭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감정 같은 것은 호주머니에 넣고 그 위에 손수건으로 덮어 놓는 거야.
-남자의 자리 중에서
남자들은, 아버지들은 자신의 감정이나 마음을 꽁꽁 숨겼다. 어떤 경쟁의식이 존재했던 것일 수도 있다. 윗집은 우리 집이었고 골목 하나를 두고 바로 밑이 삼촌집이었다. 아버지의 고함소리가 삼촌집 안방으로 흘러들어 가는 것은 물이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아버지와 삼촌의 가치관은 확연히 달랐다.
딸은 남자만 잘 만나면 된다고 믿었던 삼촌은 사촌 언니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수출 자유지역에 취업시켰다. 흔히 말하는 K-장녀의 공식대로 돈을 벌면 집으로 보냈고 그 돈으로 삼촌은 논밭을 사들였다. 그 돈으로 남동생들이 공부했다.
반면, 삼촌이 논을 사들일 때 아버지는 논을 팔며 딸 셋을 공부시켰다. 아버지가 살고 있는 세계 말고 또 다른 세계로 건너가기를 바랐다. 학비가 모자라면 엄마는 종종 돈을 꿰려 돈 있는 집을 찾아다녔다.
한 번은 삼촌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을 때,
- 공부에서 쌀이 나오나?
가스나들을 뭐할라고 그렇게 공부를 시킨다고.
그 말이 아버지 귀에 들어가고 난 뒤에 형제는 더 멀어졌다. 자신이 함부로 가스나라고 부르지 않았던 셋 딸을 그렇게 부른 것이 아버지는 속상하기도 했고 돈을 빌리면서 까지 지켜야 했던 자신의 가치관이 잠시 흔들리기도 했을 터였다.
아버지는 천식을 앓으면서도 딸 셋을 대학까지 무사히 부양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 어느 지방으로 도망쳐 나름의 신식 문화를 접했던 아버지는 여자들이 세상의 한몫을 차지함을 감지했는지 몰랐다.
달라질 세상에 대한 동경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반면 동네를 떠나 본 적 없는 삼촌에게는 여전히 남자의 자리와 세계가 중요한 몫을 차지했다. 아무것도 변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처럼, 한결같았다.
두 사람의 욕망은 다른 방향을 향했다.
우리 땅은 점점 빈곤해졌고 삼촌의 논밭은 늘었다.
그건 욕망을 위한 욕망이었을 뿐이다. 왜냐면 사실은 무엇이 아름다운지, 아니 무엇을 좋아해야 하는지 조차 모르고 있었으니까.
- 남자의 자리 중에서
두 사람은 끝내 화해하지 않았다. 그것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 상상되지도 않는다.
각기 자신이 품었던 욕망을 향해 과감히 전진했다.
우리는 자신의 욕망에 솔직해지지 못하고 타인의 욕망에만 손가락질하다가 삶을 마감하게 된다.
욕망이 피어나기 시작할 때 개인은 자신이 체득한 데이터가 축적된 형태로 봉오리를 맺는다. 개인의 내밀한 욕망은 아주 개인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신이 경험한 사회란 토양에 뿌리를 내린다.
자식들이 자신보다 더 나은 세계에서 권력을 갖기를 원했던 아버지의 욕망과 삼촌의 땅에 대한 집착은 각자가 축적한 사회경험의 데이터였다.
지금에 와서 두 욕망의 무게를 비교할 수는 없다.
내가 현재 갈망하고 있는 욕망의 얼굴을 조금 더 차분하게 관찰할 필요가 있을 뿐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아버지도, 삼촌도 그들의 삶을 점점 더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쉰이 된 지금 나도 내 삶을 점점 더 사랑하고 있다. 나도 내 욕망을 향한 몸짓을 따르고 있다.
무엇이 아름다운 건지 모른 채.
21년 노벨문학상의 후보로 거론되는 아니 에르노의 책이다. 그녀는 픽션보다 자신의 자전적 경험들을 솔직하게 드러내며 개인의 순수한 자아가 사회적 존재로 변환되는 과정들을 과감하게 드러낸다.
<남자의 자리>는 아버지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하는 아버지(그 시대를 대표하는 남자)의 서사다. 혈연적 관계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친밀함이나 반사적으로 나오는 찬양이 있을 법도 한데 그녀는 객관적 묘사와 한발 떨어진 관찰을 통해 <노동자, 혹은 가난한 자영업자>가 가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부족한 민낯을 그대로 보여준다.
남자의 자리가 남자의 얼굴이, 프랑스 서북부였던 노르망디나 한국이나 너무도 비슷해서 여러개의 밑줄을 그었다.
그녀는 아버지를 개인으로 치부하지 않고 자신과 사회의 연결고리 혹은 시대를 투영한 사회적 존재로 말한다.
개인의 언어를 사회적인 언어로 환원해 내는 문학적인 그녀의 탁월함이 노벨 문학상 후보로 데려간 것 같다. 그녀를 통해 존재에 대한 새로운 이면을 배운다.
내면적인 것은 여전히 그리고 항상 사회적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순수한 자아에 타인들, 법, 역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아니 에르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