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던지는 질문
신중한 질문 하나는 지혜의 반이다.
-프란시스 베이컨
내담자 마음속에 웅크리고 있는 일이란 욕망의 껍질을 하나씩 벗기는 일이다.
요즘도 자주 있는 경우다. 구직 상담에 부모님, 주로 어머니가 함께 올 때가 많다.
학력과 같은 기본적인 인적사항을 확인할 때부터 자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부모님이 인터셉터를 한다. 2개 이상의 질문을 던졌는데도 역시나 부모님이 개입하면 나는 부모님을 다른 자리로(상담에 방해가 되지 않는 장소)로 이동시킨다.
부모 눈에는 아이가 자신의 입장, 자신이 원하는 욕구의 방향성이 일치한다고 믿겠지만 막상 구직자인 자녀들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부모의 니즈와 맞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당사자는 대학 진학을 원하는데 부모는 당장 취업을 원하는 경우와 또 그 반대의 경우. 자녀는 자신의 진로를 좀 더 들여다보고 싶은 데 부모는 드론이나 배우라고 재촉하는 경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부모가 옆에 있을 때 자녀들 대부분은 내가 하는 질문에 단답형으로 대답한다는 것이다. 자신을 가리는 천막을 완전히 걷지 않은 채 기본적인 예의만 차린다. 상담의 걸림돌을 치우는 것이 상담의 기본이다.
청년층과의 상담은 1회~2회 정도의 회차가 거듭되면 쉽게 가속도가 붙는다. 부모라는 장애물을 없애 주면 의외로 자신의 속내를 잘 터놓는다.
"심리검사 결과지를 보고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상상하면 어떤 느낌이 듭니까?"
그들에게 개방형의 질문과 솔직한 감정, 자신이 선호하는 직업에 대해 어느 정도 잘 알고 있는지에 물어보면 의외로 자신의 느낌이나 생각, 알아본 내용들을 잘 풀어낸다.
궁금한 제도에 대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어떤 혜택이 있는지, 지원은 어느 정도인지 야무지게 묻는다. 생각의 뒷배를 두지 않고 투명한 마음을 보여주는 세대라 나름 상담에서 에너지를 얻는 대상자다.
청년들이 가지는 일에 대한 욕망은 양파 껍질처럼 투명하며 쉽게 벗겨진다.
상담하기 제일 어려운 세대는 50대 중후반의 남자분들이다.
어느 정도 직위에 있었던 분들은 <왕년에 내가 말이야>, 과거의 뽕이 덜 빠져서 기고만장한 타입으로 우리 앞에 앉는다. 눈빛으로 나를 무시하는 태도가 엿보인다. 은근슬쩍 자신이 받았던 연봉을 흘리기도 하는데.... 전에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라고 물으면 <왕년 뽕>님의 눈빛은 의기양양 20분이 넘도록 자신의 화려한 과거 스펙을 풀어낸다. 자네는 모르겠지만 내가 이런 사람이다. 이런 분은 상담사가 아무리 애를 써도 90% 전직이나 이직에 실패한다. <과거 뽕>이 빠지도록 시간이 흘러야만 한다.
자신의 기대에 맞는 일자리를 빨리 찾아주지 않는다고 화를 내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나이가 제일 좋은 스펙이란 말이 그냥 있는 게 아니다.
반면, 어느 정도 막 산 인생의 오십 대 중후반의 남자분은 술이 취해 오는 경우가 많다.
술 냄새가 난다고 하면 십중팔구 마른세수를 하는데 부끄럽거나 맨 정신으로 고용센터를 방문하기 힘겹다는 또 다른 언어다. 고용센터에서 낯선-자신보다 어려 보이는 여성과 마주 앉아- 상담을 하는 게 부끄러운 일이라고 여기거나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직업심리검사가 뭔지도 잘 모르고 인터넷으로 해 오라고 해도 인터넷을 할 줄 모른다고 우긴다. 방법이 없을 땐 수기로 할 수밖에 없다. 1시간 동 해당 문항을 읽어주고 설명해주며 직업심리검사를 실시하는 경우도 있었다.
50대 중후반의 남자분들은 자신의 의사를 나타내는데 서툴며 진짜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본인의 욕구에 대해 잘 파악하지 못한다. 어떤 직업훈련을 원하냐고 물으면 십중팔구 지게차나 굴착기 직업훈련이다. 원하는 일자리는 경비직이 최고 많다. 자신의 욕구보다 주어진 현실을 고려할 수밖에 없는데 현실은 더 뼈아프게 경비 자리조차 귀하다는 사실이다.
어디든 명할 내밀 기술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게 최고라는 생각이 든다. 손톱만큼이라도 내담자가 갖고 있는 전문성을 찾기 위해 자꾸 질문을 던진다.
"선생님, 도배는? 십장.. 그런 거는 안 해봤어요? 미장은? 미장 기술은 없으세요?"
내가 던지는 몇 가지 질문 중에서 매력이 끌리는 기술이 있으면 그거, 그거 배우고 싶었는데 못 했어. 그럼 직업훈련으로 연계시킨다. 50대 남자분들은 금을 캐듯이 자꾸 캐물어 일자리든 직업훈련이든 연계해야 한다. 호두껍질처럼 두껍고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 사람들, 혹은 자신의 니즈보다는 현실에 쉽게 안착해 버리는 스타일이 50대 이상 중년의 남성들이다. 상담을 새로 산 옷처럼 낯설어하는 세대다.
그러고 보니 직업상담사는 질문을 많이 하는 일이다. 적절한 질문 속에서 포인트나 전략을 잡아내는 데 익숙해져야 하는 일, 나도 궁금하다. 그동안 내담자들에게 던진 질문들은 그들에게 어떻게 다가갔는지. 혹시 부담스럽지는 않았는지. 압박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는지. 뻔한 질문으로 귀찮게 하지는 않았는지... 소파처럼 편안 했는지.
내담자들의 욕구를 깨우는 신중한 질문을 던졌는지, 지혜의 반까지는 아니더라도 삼분의 일 정도는 되었는지. 나와 마주 앉았던 내담자들의 속마음이 가끔은 궁금해진다.
대충 착하게 살고 있는가?
몇 년 전부터 노동조합 대표를 맡아 일하고 있다. 시민단체에서 일한 경험 때문에 이 자리도 맡게 되었다.
일하는 현장에서 민원인만 만나다가 노동조합 일을 하면서 내가 속한 조직 전체를 바라보는 거시적인 관점을 가지게 된 건 사실이지만 자신의 이익 앞에서 물러나지 않는 이기주의를 만나면 회의감이 들기도 한다.
내가 속한 노동조합은 민주노총도 한국노총도 아니며 여성노동 인권을 소중히 여기는 작은 노동조합이다. 거대 노조가 아니기 때문에 간부들 짐(하는 일은 많고 임금은 야박한)이 무거운 게 사실이지만 다정한 민주적인 방식으로, 스마트하게 노동조합을 운영하고 있다.
노조가 품는 약자의 모습도 보지만 가끔 노조가 가지는 횡포도 본다. 우리 조직에 있는 구성원들의 권리와 민원인들의 불편함 사이에서 어떤 방식이 옳은 건지 헛갈 리 때도 있다. 노동조합을 임금인상의 도구로만 바라보는 한계적인 시각도 불편하다.
노조 일을 그만 두자. 이건 못할 짓이다. 그렇게 마음을 먹다가도 부당한 일이 생기면 참지 못하고 또 한 발을 내딛고 만다. 노조 일은 하려는 사람보다 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더 많다. 불만은 쏟아내도 그 불만을 해결하기 위해 먼저 나서려는 사람은 적다. 기피 업종이다.
스트레스가 심한 일이다.
전화나 카톡을 차단시킨 채 혼자 커피숍에서 몇 시간을 죽치고 앉아 멍 때리고 올 때도 있다.
"이게 맞을까?"
회의감이 들거나 방향이 보이지 않을 땐 책을 읽는다. 소설도 읽고 자기 계발, 시집... 그냥 닥치는 대로 읽는다. 고민과 아무 상관없는 책인데도 읽고 나면 또다시 누군가의 앞에 나설 에너지, 내게 오는 문의 전화를 상냥하게 받을 에너지가 생긴다.
왜 노동조합을 하느냐는 질문 앞에,
우리나라의 노동운동은 짧은 시간 폭발적으로 성장해 오며 <대립>이라는 노사관계의 메타포를 강하게 키웠다. 역사의식이나 민족이 가지는 집단의 가치관이 자리 잡으려면 사회 구성원이 서서히 물들어 가는 충분한 시간-가량 비에 옷 젖는 시간, 또 말리는 시간처럼- 엄밀하게 말하면 <과정>이 필요했지만 우리는 짧았고 격동적이었다. 더구나 이데올로기의 편향까지 있었으니.
왜 노동조합을 하느냐는 질문에, 나는 대답한다.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직업상담사 또한 노동자다.
약자가 살아가는 방법 앞에 뭉치는 것 외에 더 좋은 방법이 있다는 걸 알지 못한다.
절전 지훈(折箭之訓) 뭉쳐진 화살은 부러지지 않는다는 내 신념이 이 길을 가게 했는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노동조합의 힘이 공정의 선을 넘었는지 매번 속으로 묻는다.
이 글도 돌아보기 위함인지도 모르겠다. 살아가는 건, 매일 자신에게 던질 질문을 하나씩 만드는 일인지 모른다. '어떤 의견입니까?' '무엇이 좋을까요?' '이래도 될까요?'
어떤 날은 해답이 저절로 나올 때도 있고 또 어떤 날은 질문을 살짝 뭉개며 의뭉스럽게 넘어가는 날도 있다.
'대충 착하게 잘 살고 있는가'
너무 착하게는 아니고 적당하게 착하게. 그렇게 요즘은 묻고 싶어 진다.
조금 더 나이가 들면, 덜 착하게 살고 있는가? 묻게 되지 않을까.
내일은 또 어떤 질문이 나에게 날아들지 궁금하기도 하다.
<믿느냐, 믿지 않느냐.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스스로에게 점점 더 많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