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은 사회적인 역할이다
결혼 후 1년 만에 첫 아이를 가졌고 당시 나는 중소기업에서 일하고 있었다. 점점 배가 불러오자 주위 사람들은 당연히 내가 회사를 그만둔다고 생각했다. 그때 당시 여성들은 임신하거나 출산을 하면 거의 대부분 사표를 썼다. 그러나 나는 출산휴가가 60일 있는 것을 알았고 봉여사가 살림을 도맡아 주었기에 회사를 계속 다닐 생각이었다.
9개월이 되어 부른 배를 안고 계속 회사에 출근하자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남편이 무능력한가 봐. 그러니까 저렇게 악착스럽게 회사를 다니지?"
그래도 신경 쓰지 않았다. 당당히 회사로 출근했다.
그리고 얼마 후 회사 부장, 불도그같이 생긴 부장이 개인면담을 한다며 나를 불렀다.
"출산휴가를 쓸 생각입니까?"
그렇다고 했다. 출산휴가가 60일 보장돼 있으니 출산휴가 후에 회사에 복귀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부장은 난감한 얼굴이 되더니 지금까지 한 번도 출산휴가를 쓴 사람이 없었고, 또 내가 출산휴가를 쓰게 되면 다른 직원들도 사용하게 되므로 회사에 불이익을 준다고 강하게 퇴사하라고 압박을 가했다. 퇴사를 하면 출산휴가기간의 임금을 주겠다고 했다.
"저는 퇴사할 마음이 없습니다. 출산휴가를 쓰고 계속 출근을 할 겁니다. 만약 회사가 출산휴가를 못 쓰게 하면 노동부에 진정을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 2층 계단을 내려오는데 배가 질끈 당겼다. 담담하게 부장에게 말했지만 꽤나 딴에는 긴장을 했는지 아랫배가 단단해졌다. 한동안 사무실 의자에 앉아 배를 다독거렸다.
직원 300명이 넘는 회사에서 97년 10월 처음으로 내가 출산휴가를 썼다. 60일이었다.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 후 모유를 먹였는데 60일이 금방 갔다. 미처 단유를 할 새가 없이 회사 복귀 시점이 다가왔다. 일주일 전부터 고민이 되었다. 그냥 회사를 그만둘까, 아니야 회사에 그렇게 당당하게 말을 했는데 어떡하든 복귀해야지.... 아직도 힘차게 젖을 빨고 있는 아이를 보니 가슴이 아렸다. 복귀 이틀 전 아이와 단유를 시작했다. 꼬박 이틀을 아이가 굶었고 나는 퉁퉁부은 가슴을 헝겉으로 싸 맨 채 출근을 했다. 출근길에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출근하고 나서도 불은 젖을 화장실에 가 몰래 짰다. 젖몸살이 나서 온몸이 후끈거리는데도 이를 악물고 참았다. 회사 사람들의 눈초리를 다 이겨 내고 싶었다. 그렇게 출산휴가 1호가 된 뒤 하나둘씩 다른 여직원들도 출산휴가를 쓰기 시작했다. 출산휴가 사용 후 회사에서 잘릴 줄 알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자 자연스럽게 출산휴가를 사용했다.
그리고 97년 IMF가 오면서 회사가 경제위기를 겪었고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비전이 없었다. 그때 나는 결심했다. 출산휴가 60일 제도만 가지고는 여성들이 일을 할 수 없겠구나, 출산휴가 확대와 육아휴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여성들이 일을 하려면 모성보호적인 제도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점점 여성들의 경력단절은 심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지로 학교 행정실에서 일하던 언니는 육아 때문에 일을 그만두었다.
나는 그 뒤 여성 시민단체로 들어가 적은 임금에도 불구하고 모성보호법 제정을 위한 여러 가지 투쟁을 전개했다. 출산휴가가 실지로 기업에서 얼마나 사용되고 있는지에 대한 조사를 했고 캠페인을 벌였고 시민단체들과 여성들의 출산과 육아에 관한 정책에 대한 토론회와 국회 입법을 건의했다.
매주 수요일마다 거리에 나가 서명을 받았다. 어떤 날은 아이를 엎고 나갔고 어떤 날은 땡볕에서 마이크를 잡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호소하기도 했다. 일하는 여성들을 위해 출산과 육아에 관한 법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투쟁했다. 친구들은 더 좋은 곳에서 취업해 나보다 높은 연봉을 받았지만 나는 그것이 먼저 아이를 낳고 일을 하는 엄마가 되어 본 나의 책무라고 생각했다. 필요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먼저 움직이고 투쟁해야 한다고.
그리고 나는 우리 딸들이 나랑 똑같은 수모, 마치 아이를 낳는 것이 내 개인이 감당해야 할 어떤 것으로 치부되거나 개인의 하소연으로 끝나는 것을 두고 보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딸들의 세상에서는 출산과 육아가 좀 더 존중받는 시간, 특히 육아 때문에 자신의 일을 그만두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열심히 투쟁했고 그 투쟁 때문에 아이에게 관심을 더 두지 못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아이를 사랑하는 방식이 달랐지 내가 아이를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니까.
2001년 모성보호법이 만들어졌다. 출산휴가 60일이 90일로 확대되었고 배우자 출산휴가와 육아휴직 제도가 생겼다. 이 법이 생기자 일시적으로 기업에서 여성을 채용하지 않는 현상 일어났지만 지금은 거의 대부분 임신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라는 압력을 일어나지 않는다.
여성이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역할로 인식해야지만 여성에게 임신 출산으로 인한 불이익이 발생하지 않으며 기업 또한 가임기 여성들을 기피하지 않는다. 모성보호법이 제정되었을 때 나는 그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셋째를 낳으면서 출산휴가 90을 보장받았다.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투쟁할 수밖에 없었던 시간이었고 지금 후회하지 않는다.
젊은 직원들이 출산휴가를 신청하거나 육아휴직을 신청하면 나도 덩달아 뿌듯해진다. 우리는 함께 성장하고 있는 것이 때문에, 그리고 그 시간을 통해 우리의 다음 세대가 안전하게 보호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어른 여성으로의 힘을 조금이나마 보탠 것 같아 마음이 한결 가볍다. 경제적으로 힘든 시간이 있었지만 나는 피하지 않고 맞서는 법을 배웠으니 그것으로도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때 낳았던 한데렐라가 지금 24살이 되었다. 내 아이만 바라보지 않았기에 부끄럼 없으며, 딸과 엄마로 같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누구보다 서로를 사랑하게 되었다. 고로 지금 행복하다.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투쟁했던 시간, 소중한 경험이었다.
사람을 향한 애정과 사람과 삶이 마주하는 초점을 알아보는 시간을 통해 우리는 삶을 어떻게 살것인지 근본적인 물음을 가져본다
<히든 피겨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