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안의 타노스를 물리치는 방법
내안의 타노스
싸늘한 공기를 맞으며 출근하는 아침이 어느 때는 행복했고, 어느 날은 괴물 입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끔찍했다. 행복감이 밀려올 때는 아, 행복하다고 중얼거렸다. 괴물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비루한 심정이 될 때는 높다랗게 버티고 있는 건물을 한번 쓰윽 올려다 보고 진짜 타노스가 있는건 아닌지 무뚝뚝하게 째려봤다.
누구에게나 30%의 우울은 갖고 있다는 심리학자의 말이 위로가 되기도 했지만 경력단절을 거치지 않고 20년을 일했던 마음은 늘 질주하는 ktx같이 평온하지만은 않았다. 이 감정들을 나열하기에 너무 버겁다. 인간이 가지는 감정 자체를 어떤 단어로 규정짓는 것은 교만이다. 복잡 미묘, 기묘하게 파악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잘 살다가 어느 순간 허탈함으로 곤두박질치는 마음의 변덕이 곤혹스러웠다. 딱히 어떤 큰 사건이나 계기가 없어도.
나도 모르게 나만의 퀘렌시아로 향했다.
그것이 퀘렌시아인줄은 최근에야 알았다.
자기만의 감정을 회복할 수 있는 공간 혹은 시간.
투우장의 소가 인간의 공격을 피해 자기 자신의 힘을 축적하는 장소, 산양이 두려움 없이 풀을 뜯을 수 있는 공간, 독수리가 날개를 접고 쉴 수 있는 공간
류시화 작가는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는 퀘렌시아를 가져야 살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나만의 퀘렌시아
생각해보니 아이들이 어렸을 때 나의 퀘렌시아는 자동차였다. 끊어 오르는 분노나 감당할 수 없는 마음이 들 때 자동차를 몰고 어디로든 달렸다.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 놓고 마구 달렸다. 주로 밤이었다. 그렇게 내달리고 나면 요동치던 분노가 가라앉거나 혹은알수 없었던 허망함같은 것이 사라졌다. 일상의 때가 소중하게 느껴졌다. 상태가 좋을 때는 현관에 나뒹굴어진 신발조차도 이쁘게 보이는 법이니까.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나의 퀘렌시아는 거실 책상이었다. 거실에서 타타타 터자를 치면 아무도 귀찮게 하지 않았다. 물이 먹고 싶은데 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누군가 물을 갖다주었다. 수상이라는 덕분에 주어진 가족들의 은근한 보호 아래 나만의 방해받지 않는 시간이 확보되었다. 쓴다는 핑계로 그 자리에 앉아서 자주 읽었다. 일단 그 자리가 우리집 나의 퀘렌시아인 셈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의 퀘렌시아는 추다방과 등산이다.
이제는 내 마음을 더듬어 볼 줄 안다, 나이 오십에.
에너지가 달리거나 이유 없이 공허해질 때 임항로 산책길을 혼자 걷는다.
임항로 가운데 위치한 추다방에 들어가 따뜻한 라떼를 주문하고 추다방에 있는 책을 아무거나 집어 읽는다. 가급적 추다방 2층이 좋다. 여기는 미닫이 유리문이 있어 날이 좋은 날은 반드시 큰 창문을 열어 둔다. 창문으로 낡은 주택들의 촘촘한 모습, 할머니가 빨래를 널거나 할아버지와 다투는 고함소리, 혹은 할아버지의 가래 기침 소리까지도 들린다. 삶의 소리가 여과 없이 울리는 것 조차가 추다방의 매력이다. 라떼와 책과 따르릉 자전거 소리와 선선한 바람들. 그리고 내 손에 들려 있는 책이 내 취향과 딱 맞아떨어질 때..... 1%의 불행도 비루함도 끼어들 여지가 없다.
마산 임항로, 철뚝길에 있는 추다방
다음은 등산이다. 주로 착한 늑대가 출근한 토요일에 청량산으로 간다. 323m밖에 안 되는 얕은 산이지만 오르막도 있고 평지도 있고, 무엇보다 여자 혼자 가도 아무런 위험이 없는 코스다. 올라갈 때는 음악을 듣지 않고 그냥 등산로에 집중해 빠른 걸음으로 걷는다. 내려올 때는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뛰듯이 내려온다. 땀과 음악이 합쳐진 시간은 군더 데기 없이 깔끔하다.
얼마 전 아는 동생이 울면서 코로나 육아가 너무 힘들다고 하소연했다. 생각해 보니 나도 그때는 그랬다. 아이 셋, 시부모님, 넉넉하지 않은 형편들...
그때 내가 자동차로 질주하지 않았다면 나는 내 마음을 간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에게도 자신만의 퀘렌시아가 발견되기를 바란다.
누구도 찾아 줄 수 없는 자신만의 퀘렌시아
퀘렌시아로 데려가는 용기
누구는 집 화장실이라고도 했다. 본능이므로 아마 벌써 발견되었을 것이다. 에너지가 소모됨을 느낄 때 자신을 퀘렌시아로 과감히 데려갈 용기가 필요하다. 힘들어도 꾸역꾸역 집으로만 향하는 발걸음을 잠시 멈추어 보는 것, 오늘은 친구를 꼭 만나야겠다고 독립운동이라도 할 것처럼 굳은 다짐을하고 행동하는 것, 주변에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것, 그런것이 용기이다. 어지러진 거실을 그대로 방치하기도 하고 배달음식도 시켜 먹고 그 시간에 내가 좋아하는 트루먼쇼 같은 영화를 보며 감동하는 것. 그런 것이 퀘렌시아로 나를 데려가는 용기이다.
힘든 사람에게만 퀘렌시아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자신을 쉬게 하는 것은 모두에게 필요한 일이다. 퀘렌시아의 회복탄력성을 경험하게 되면 누구나 다시 그기로 발걸음을 향할수 밖에 없다.
아무것도 아니게,
모두에게서 떠나,
무엇도 하지 않을 권리,
나만의 퀘렌시아는 나를 나답게 하는 영역이다.
나를 회복하는 장소 퀘렌시아.
그 덕에 오늘 여기 나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