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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아치우먼 Nov 14. 2020

세상에 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많이 지지 않아 다행이다


1. 버스 안에서 속절없이 흐르는 김치 국물

진주 고등학교 자취를 할 때 남해로 내려가면 엄마는 매번 김치 종류를 싸주었다. 택배라는 운송업이 없었고, 자가용도 없었고 지금처럼 기능 좋은 팩도, 락앤락처럼 국물 차단에 완벽한 반찬통도 없었다. 심지어 도로조차 구불구불하고 울퉁불퉁했다. 버스기사 아저씨의 운전도 터프해서 몸이 붕하고 뛰는 일은 다반사였다. 이를 앙다물고 눈을 꼭 감고 있었지만 냄새가 나지 않을까 마음 졸였다. 발밑에 있는 네가 무사해야 해. 발목 안쪽에 힘을 주어 보따리를 고정시켰지만 기어코 흘러내리고 말았다.


시금한 김치 국물 냄새가 악마의 연기처럼 번졌다.

양볼이 화끈 거렸다.


그걸 들고 시내버스를 타야 했다. 택시라도 탈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냄새라도 어떻게 감출 수 있었다면.... 세상에 확실히 지고 있었다. 우리 집은 진주가 아니고 왜 남해대교가 있는 바다 귀퉁이에 태어나 이 개쪽을 파는지. 국물이 흐르지 않는 김치는 없는지. 보따리를 패대기를 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다시 2주일을 버티기 위해. 창피함은 순간이었지만 배고픔은 극명한 현실이어서 알록달록한 주홍색 무늬가 선명한 보자기를  부여잡고 자취방으로 들어섰다. 되도록 김치를 적게 먹어서 그런 기회를 줄이는 방법밖에 없었다.



2. 아들 낳으려고 했나 봐요. 성공하셨네요.

자녀가 어떻게 되냐는 물음에 딸딸 아들이라고 말하면 9할 이상은 어머, 아들 낳으려고 그랬나 봐요. 성공하셨네요. 딸 셋보다야 낫지요.

네... 에, 근데 아들 낳으려고 그런 건 아니고요. 사랑은 열렬히 했는데 피임을 열렬히 못해서 그런 거고요. 딸이어도 낳았을 겁니다. 에이, 그래도 딸 셋보다 낫잖아요. 뭐가 낫다는 건지?


배가 산만해서 딸 둘을 데리고 목욕탕을 갔을 때

할머니 한 분이 내 옆에서 혀를 쯧쯧 차셨다. 새댁이 배 보니 봉긋한 게 또 딸인 거 같아. 어쩌누? 안타까운 눈빛으로 민망하게 내 배를 어찌나 쳐다보는지. 내가 할머니 며느리도 아니고 자기 손주도 아닌데 그렇게 혀를 차시다니. 딸 둘을 데리고 저쪽으로 도망갔다. 아들인지 딸인지 모를 아이가 들을까 봐 배를 손으로 감싸며 기우뚱거리며 퍼뜩 도망갔다.


설마, 선생님 아들 낳으려고 셋째까지?

18년째 아직도 이 말을 듣는다. 세상에 지지 않기 위해 열렬한 사랑 타령을 했으나 또 그런다. 홈런이지 뭐. 따박따박 변명하기도 그냥 묻어가기도 애매한 딸딸 아들의 비율에 대한 단상, 져야 할까 또 꼬투리를 잡고 물어 늘어져야 할까. 아니래도 꼭 맞다고 우기는 사람들을 만나면 세상에 지고 있다는 느낌이 꼭 온다. 상대방을 속단하는 사람은 빨리 도망가는 게 상책이다. 목욕탕에서의 할머니처럼.

인스타에 올라온 단어장


3. 그래야만 한다고 너는 말했다.

대기업 마트가 입주한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 너는 우리에게 아주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기업의 횡포로 동네 자영업자들의 생계에 위협이 온다, 막아야 한다. 주장에 동의했다. 한 달 동안 조를 짜서 마트가 들어선다는 건물 앞에서 피켓 시위를 했다.


차들이 쌩쌩 달렸다. 피켓을 들고 서 있으며 동네 자영업자들은 왜 여기에 나서지 않는지 의문이 들었다. 아마 장사를 해야 하니까. 그럼 지나가다가 나한테 음료수라도 하나 사줘야 하는 게 아닌가? 대기업 마트가 들어오는지 모르는 모양이야. 에고 그러니 맨날 당하고 살지. 자영업자도 아닌 내가 그들의 생계를 짊어진 얼굴을 하고 400시간 피켓을 들었다.


오후 2시에서 4시까지 했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점이라 한낮의 볕은 따가웠고 선크림을 바르지 않아서 기미가 생겼고 다리 알통이 굵어졌다. 아무도 내가 든 피켓을 보고 말을 걸거나 아는 채 하지 않았다. 억울한 누명을 쓴 심정이 되었다.


드디어 대기업 마트가 문을 열었다. 할인행사를 한 달 정도 대대적으로 했다. 기저귀도 분유도 어느 곳보다 저렴했다. 여기저기를 살 필 때 나는 너를 보았다. 진지한 눈빛으로 뭔가를 고르느라 열심인 너를 피해 얼른 담아 놓은 기저귀만 계산하고 그곳을 재빨리 빠져나왔다. 부끄러움과 배신감이 밀물과 썰물처럼 드나들었다.


주장과 현실의 간극은 치사하다.

주장하는 일에는 두루 살피게 되었다. 오지랖 넓게 남의 인생에 참견하는 일은 그만두었다. 각자의 몫은 언제나 각자의 몫으로 남는다. 한쪽은 대기업의 횡포에 멍들고 또 한쪽은 대기업의 자본에 매달려 산다. 대형마트가 문을 열지 않는 날은 인근 시장 매출도 떨어진다는 통계는 나의 삼십 대를 비웃는다. 자본의 막대한 유통구조는 매번 본 때를 제대로 보여준다. 세상에 지는 느낌이 아니라 세상에 진 게 아닐까 의문이 든다.



4. 소리바다 주식을 산 남편의 비자금

착한 늑대가 100만 원을 들고 주식을 시작했다. 분산투자를 해야 한다며 380원 소리바다 주식을 샀다. 아빠, 소리바다가 뭐야? 한데렐라도 엘리스도 모른다. 당황한 착한 늑대가 다음날 2만 원가량의 손해를 보고 소리바다 주식을 처분했다. 얼마 되지 않아 400원까지 소리바다가 올랐다. 봐, 놔뒀음 오르는데... 아, 아깝다.


주식 계속하려고?

걱정 마. 내가 대박 안겨 줄 게.


임항선 산책할 때마다 착한 늑대는 주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바이오 주가 6배가 올랐는데 그걸 사려다 안 샀더니 또 올랐다. 오늘은 8배가 더 되는데...

어린 늑대가 푹 끼어들었다. 어머니 제 친구들도 주식해요. 잉? 고등학생이? 네.....  모르겠다. 그 나이에 벌써 주식을 하는 게 잘못된 것만은 아니겠지만 한참 좋을 나이에 책이 아니라 빨갛고 파란 놀음에 노출된다는 것이 씁쓸하다. 세상에 이기는 느낌보다 지는 느낌이 훅 밀려온다.

세상에 이기는 사람만 있는 건 아닐 거야. 지기가 쉽지. 당신의 100만 원은 큰 손과 붙기에는 너무 빈약해. 싸우지 않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소리바다 주식 사는 걸 보니 대박 핏이 아니라 쪽박 핏인데... 돈이 사람을 가르치는 세상이다.



세상에 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는 세상과 싸우는 것을 그만두고 잠시 세상 속으로 들어가면 된다. 세상 속에 두발을 딛고 서 있으면 싸울 필요가 없다. 그러나 무엇이든 싸울 일은 생긴다. 싸울 일이 생길 때 도망가는 사람은 비겁한 사람이다. 비겁한 사람이 되지 않는 한 세상에 지고 있다는 느낌은, 느낌에 불과하다.


나는 당신이 할 수 없는 일들을 할 수 있고, 당신은 내가 할 수 없는 일들을 할 수 있다. 하지만 함께라면 우리는 더 멋진 일들을 할 수 있다.

- 마더 테레사


# 위 제목은 정세랑 소설 피프티 피플 한 문장을 빌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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