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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아치우먼 Nov 16. 2020

밥 한번 먹어요?

적절하게 외로운 이유



카톡에 그녀의 생일 알림이 떴다. 메신저로 안부를 물었다.

별일 없이 잘 지내요. 담주에 밥 한번 먹어요. 네,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그러고 돌아보니 일주일이 훅 지났다. 밥 한번 먹자는 말이 또 공수표가 됐다. 인사치레가 아니라 진짜 그녀랑 밥 먹고 싶었는데...

내가 밥 한번 먹자는 말을, 대화를 끝내자는 말로 들은 건 아니겠지. 실제로 그말을 한 뒤 메신저는 끊겼다.  괜히 찔렸는 데 이 대사가 또 가슴을 후빈다.


"전화할게"

누군가는 그 말을 곧 전화기를 집어 들어 통화를 하겠다는 약속으로 해석했고,

누군가는 그 말을 지금 일단은 대화를 그만하고 싶다는 인사말로 사용했다.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있다는 걸 알지 못해서 사람들은 헤어진다.

-드라마 풍선껌의 대사 중에서


같은 언어로 그녀에게 가 닿기를 바라며 다시 꼼꼼하게 날짜를 잡아야 할 참이다.



주민센터에서 발급해주는 증명서를 우리센터에서 발급해 주지 않는다고 50대 후반의 민원인이 점심시간에 고함을 질렀다. 니들 월급은 다 내 세금으로 주는데, 니들이 어떻게 나한테 어디로 가라 마라 그럴 수가 있어? 커피 한 잔 마시며 쉬고 있을 때 옆의 직원이 긴급하게 호출했다.


전산이 달라서 여기서 발급이 안됩니다.

죄송합니다. 번거롭겠지만 구청이나 주소지 주민센터를 가셔야 할 듯합니다.

사람들이 말이야, 민원인들이 편하게 해 줘야지.

네... 죄송합니다.

얼굴이 넙데데하고 뽀글 파마를 한 민원인은 몇마디 더  퍼붓고는 센터를 휑하니 빠져 나갔다. 죄송합니다라는 말은 이제 입에 착 붙어서 진짜 죄송한지는 모르겠다.


개인정보 보호법은 많은 것을 귀찮게 한다.

시스템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나도 화가 날 것 같다. 내가, 나고.. 내가 연금 받는 통장을 갖고 있는데 증명서를 굳이 떼 오라니? 번거로움 때문에 화가 날 법하다. 또 누군가는 자신이 연금 받는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아냐고 따진다. 당신? 나 감시하는 거야? 모를 때는 몰라서 증빙하래서 짜증내고 알 때는 또 왜 아냐고 따진다.

그럼에도 우리의 판단은 확실하다. 전산은 고맙게 잘 막혀 있어 그녀가 원하는 서류를 우리는 발급할 수가 없다. 죄송합니다,라고 했지만 진짜 민원인에게 죄송한 일이 생기면 아마 그 말을 못 할 것 같다. 무엇이든 남발하면 진짜 필요할 때 못하는 법이다.



수요일은 회의가 있어 울산으로 출장을 갔다. 간 김에 처리해야 할 다른 일이 있어 두 건의 회의를 연달아했고 말을 많이 한 탓에 목이 아팠다. 시간이 넉넉할 때는 버스를 타는데 코로나도 그렇고 시간도 촉박해 차를 운전했다. 갈 때는 언니랑 밀린 통화를 하고 갔지만 올 때는 음악도 통화도 하지 않은 채 침묵으로 왔다.

갑자기 누군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주면... 했다.

응? 왜...?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냥. 그냥, 니 목소리 듣고 싶어서.

그냥과 갑자기는 세트 혹은 원플원이다.

그냥이 나오면 갑자기가 달려 나오고 갑자기가 등장하면 그냥이 같이 온다. <사랑해서 그랬습니다>에 등장하는 그냥과 갑자기에 대해 정용준 작가는 <그냥>과 <갑자기>는 변화의 근거도 적절한 동기도 될 수 없다고 썼다.


그냥 전화하고 싶어서. 갑자기 전화하고 싶어서. 제일 정확한 변화의 근거와 적절한 동기인  같은데... 소설의 내용상이었겠지. 그런 간지러운 말이 듣고 싶은 이유는 지금 피곤하기 때문이라고 변명해 둔다.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전화.

있잖아, 인스타에 그 애... 아빠 신발 발음하는 동영상 봤어? 아니? 아빠 신발 하니까 애기가, 아빠 시발하고 발음하는 거 있잖아. 한번 찾아봐. 진짜 웃긴다. 그러고 목청껏 웃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대화. 나만 아는 이야기에도 같이 웃어 줄 수 있는 사소하지만 또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 사람과의 전화.


2시간 정도를 달렸고 차는 밀렸지만 아무도 내게 그런 전화는 걸어오지 않았다.

적절하게 외로웠는가 보다.



도로를 달리는 데 백미러로 지는 노을이 나를 바짝 따라왔다. 가을에 일하지 않고 가을을 보기 시작한 것은 친정엄마가 농사를 접고 나서다.


이맘때쯤 매번 마늘을 바삐 심었고 고구마를 캤으며 열무를 빼서 집으로 가져왔다. 배추가 얼지 않도록 짚을 덧 씌웠다. 된장과 고추장을 담는 엄마를 위해 장독을 씻고 물을 길었으며 웃자란 마늘에 비닐을 입혔다.

심어진 마늘 위로 비닐을 쭉 덮은 뒤 쪼그려 앉아 비닐에 구멍을 뚫어가며  마늘 싹 하나하나를 비닐 위로 끌어올린다.  쪼그려 앉아서 하는 일은 고되다. 일어서려면 무릎이 제대로 펴지지 않아 저절로 엉덩이를 뒤로 빼며 허리를 구부리게 된다. 마늘 농사를 짓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한 사람을 구원하는 심정으로 끈질기게 말릴 것이다.


인스타 무릉외갓집에서 빌려온 사진입니다.

고기를 굽다가 불판 사이로 마늘 한 조각이 빠져도 심정이 벌렁거리는 이유는 마늘농사가 얼마나 고된지를 알기 때문이다. 농산물이든 공산품이든 그것이 내 앞에 오기까지의 여정을 다 아는 사람은 절대로 그것들을 허투루 대하지 않는다. 마늘을 나는 고기보다 소중히 다룬다. 가을에는 해지는 게 고마웠다. 해가 져야 일을 하지 않으니까.



전화는 오지 않고 나는 고속도로를 질주하며 노동하지 않는 가을때문에 이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가을을 대하는 삶의 방식이 달라졌다는 것을. 노동에서 자유로워지니 심적인 외로움이 엄습하는 것, 적절한 외로움의 원인을 찾은 듯했다.


someone like you

지니에서 아델의 노래를 반복해 들으며 얼른 노을을 피해 도망갔다.


가을이 가장 바빴던 이유는 추위가 오기 전
모든 것을 단도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추위에 아무것도 상하지 않도록 서둘러 옷을 입히는  계절. 마음에도 관계에도 덧옷을 입혀야 하는 계절이다.
추위가 와도 끄덕 없이 변하지 않도록...
따뜻한 밥 한끼를 꼭 먹어야 하는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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