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포스 왕 형벌을 닮은 설거지
캐나다에서 사촌 시누가 왔을 때 물었다. 그기 사니까 뭐가 제일 좋은데? 음... 설거지 안 해서 좋아요.
뭐? 그럼 맨날 밥을 사 먹어? 사 먹기도 하고 해 먹기도 하는데 여기보다 간단하게 먹어요. 지지고 볶고 굽고 조리고 그런 걸 안 하죠. 아, 그래도 한 끼가 되는구나. 간단하게 먹으니 가사노동이 반으로 줄어요. 아... 음식 하는 시간, 치우는 시간이 줄겠네.
네가 어학연수를 가서 그기 눌러앉은 이유가 설거지 때문이라니. 삶의 선택은 의외의 이유와 합당한 이유로 결정되는구나. 나도 캐나다로 갈 걸.
착한 늑대에게 땡깡(쌩떼=드러누워 고집피우는 것)을 부린다.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해 준다고 했잖아!!!! 맞다 아이가, 고무장갑끼면 손에 물 안 묻힌다니까. 고무장갑 열심히 사준다는 말이었지. 아, 몰라. 몰라. 고조선부터 21세기를 통틀어 제일 흉악한 사기꾼! 며느리 엄마 아내 모두 파업.... 협상조건은 식세기!! 싱크대에 모인 설거지를 보고 바로 거실에 벌러덩 드러 누워버렸다.
우리 집 설거지의 방대함을 보면 대한민국의 모든 엄마들은 나처럼 파업할 수밖에 없다.
일곱 식구의 저녁 설거지 크기는 싱크대 한 가득이다. 밥과 국그릇이 총 14개. 주로 봉여사가 반찬을 제조하는 시간은 저녁때, 국 끓인 냄비와 생선 구운 프라이팬이 저녁 설거지로 남겨진다. 주로 1인에 한 개씩 사용되는 컵과 과일을 깎아 먹는 그릇과 쟁반까지 하면 설거지는 차곡차곡 탑을 쌓는다. 그게 끝이면 좋겠지만 또 하나가 첨가된다. 착한 늑대의 보온 도시락. 아침 일찍 출근하는 착한 늑대는 보온 도시락을 가져가 아침을 먹는다. 작년, 약을 먹기 위한 도시락 지참이었으나 도시락을 먹으니 좋다는 착한 늑대의 요구에 봉여사가 지금까지도 새벽 도시락을 싼다. 이쯤 되면 설거지 탑이 생긴다. 매일 설거지 탑이 생기는 마법 앞에 나의 땡깡은 뭔가 타당성을 갖는다. 냄새묻은 그릇들의 아우성은 나에게 땡깡의 핑계를 준 것이다.
거실에 발라당 드러누워 양손 양발을 버둥거렸다.
나에게 너무 가혹한 형벌이라고 소리쳤다.
이것은 시시포스 왕이 받는 형벌이랑 똑같다!
어린 늑대가 물었다. 어머니, 그게 뭔데요? 띠웅~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인데 제우스에게 밉보여서 저승으로 가는데 그서 신 하데우스를 꼬셔서...
산 정상까지 돌을 올리면 돌이 다시 굴러가버려.
또 돌을 정상까지 올리는 형벌을 받는다고...
쫌, 인터넷에 찾아보지? 핑프야? 착한 늑대가 다시 묻는다 핑프가 뭔데? 핑거 프린스(검색에 게으른 자).. 너희 같은 종족을 핑프라고 한다고!!!
어머니, 그래도 설거지랑 그 포스 뭐 형벌이랑은 차원이 다른데요? 설거지가 훨씬 강도가 약해요. 아휴. 이런 이과적인 두뇌 녀석. 그럼 네가 매일 설거지 할래? 어머니, 저 고딩이에요. 공부할 시간도 없어요. 이때 봉여사는 슬쩍 일어나며 연속극 할 시간이라고 가버린다.
식세기!
식~씩/ 쎄~세/ 기~끼!/ 씩쌔끼!!!!!
옴마야, 자꾸 하다 보니 욕이 연상된다.
발음 조심, 씩쌔끼..... 발랑발랑 4개의 팔다리가 허수아비처럼 허공에서 허우적거린다. 내가 언제 투쟁하지 않고 얻은 게 있었나? 씩쌔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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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침묵은 뭐지? 곁눈질 한다.
식탁을 보니 각자의 휴대폰으로 식세기를 검색하고 있다. 식세기가 있어도 초벌로 행구어서 넣어야 한데. 식세기가 밥알이 잘 안 씻겨진데. 1시간 정도 돌아간다는데.... 식세기 전용세제도 써야 하네... 어떤 사람은 그릇에 기즈가 난다는데...? 전기세는 얼마 안 드는 모양이네..... 근데 물에 좀 불려서 넣어야 한다는데... 쫑알쫑알... 에이, 식세기 너무 비싸다. 얼만데? 어떤 건 2백이 훨씬 넘는데? 2백씩이나? 왜 이렇게 비싼데... 슬그머니 일어나 식탁에 앉는다. 내가 대통령이 된다면 식세기를 아이있는 집에 무료로 나눠 줄 텐데. 기가 폭 죽으니, 그럼 돌아가면서 설거지할까? 가위바위보로 매번 순번을 정할까? 후다닥 한데렐라와 어린 늑대는 가방을 챙겨 들고나가버린다. 독서실 파는 저렇게 늘 비겁하지.
엘리스가 내 눈을 보며 씨익 웃었다.
아르바이트생 써? 누구? 나 알바 구하잖아.
그래, 그럼 엘리스가 설거지하면 되겠네.
1회 설거지 2천 원, 양 많을 때는 3천 원, 주말은 5천 원. 단가가 정해졌다. 야호~~~~!!
그 뒤부터 저녁 설거지는 엘리스의 몫이 되었다. 주급으로 계산해 2만 5천 원에서 3만 원, 대청소 합류 시에는 만원이 추가되어 4만 원가량의 비용이 지출되었다. 벌써 3개월이 넘었다.
근데.... 여보, 나 궁금한 게 있는데. 와? 다 됐잖아.
근데 설거지 비용은 왜 맨날 내가 내는데... 가사노동의 비용을 왜 내 용돈에서 내야 하냐고? 당신 그릇도 엘리스가 씻는데? 걱정 마. 내가 담에 돈 생기면 다 줄게..... 언제 돈 생기는데? 모르지 그건, 애들이 다 커봐야 알지. 뭐야? 그럼 내돈내산 설거지야? 어딘가 좀 이상한데....
우리 집은 아이들의 용돈을 주지 않는다.
용돈은 무엇이든 어떤 대가가 있어야지만 지불한다. 예를 들어 어린 늑대가 학교가 상을 받거나 1등급을 받았을 경우 만원. 생일이나 혹은 축하할 일이 있을 경우 2만 원 등이다. 정기적으로 지급하는 용돈은 아예 없다. 대학교 1학년인 엘리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엘리스는 고등학생처럼 그런 일이 없으니 결국 가사노동에 참여해야지만 용돈을 받을 수 있는 구조가 된 것이다.
설거지에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하면서 주마다 내 용돈 2만~3만 원가량이 빠져나갔다. 4주면 설거지 비용이 10만 원이다. 엘리스가 엄마라는 친인척의 관계로 할인을 해 다행이다.
그럼 빨래와 밥과 청소, 설거지 까지를 모두 돈으로 환산하면.... 검색해보니 가사노동의 비용이 3인 가구당 170만 원이 넘는다. 은유 작가의 말대로 우리는 누군가의 노동에 빚지고 사는 사람들이 맞다. 빚지고 사는 노동은 너무 천연덕스러워서 고마움을 자주 잊게 하는 게 아닌지.
탑을 쌓은 설거지 앞에서 엘리스가 아휴, 한숨을 쉰다. 돈 벌기 어렵네. 마음속으로 말한다. 살아봐, 돈 벌기가 그 보다 몇 백배는 더 어렵다는 걸 아는 게 어른이야. 그 말 대신 엘리스, 엄마가 설거지할까?
아니, 돈 벌어야지. 가방도 샀는데. 푸다닥.... 땡그랑
무엇이든 꾸준히 반복하는 것이 제일 어렵다는 것을 아는 나이, 시시포스 왕의 형벌과 같은 가사노동의 대안 식세기를 살 수 있도록 엄마가 돈 많이 벌어 올게. 그때까지만 엘리스 기다려. 오늘 설거지 비용은 만원으로 인상할게.
엘리스가 뽀닥 뽀닥 설거지를 야무지게 해 낸다.
엘리스는 지금 자라고 있는 거다. 가사노동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실감하고 있는 거다. 그래야 엄마처럼 안 속는 거야.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해 주겠다는 우주의 사기꾼이 와도 안 속을 수 있어.
엘리스... 사랑해.
사랑하는 만큼 가사노동은 공평하게 나눠 갖는 게 진짜 사랑이야. 꼭 그걸 명심해.
- 고정희
맞벌이 부부 우리 동네 구자명 씨
일곱 달 아기 엄마 구자명 씨는
출근 버스에 오르기가 무섭게
아침 햇살 속에서 졸기 시작한다
경기도 안산에서 서울 여의도까지
경적 소리에도 아랑곳없이
옆으로 앞으로 꾸벅 꾸번 존다.
차창 밖으론 사계절이 흐르고
진달래 피고 밤꽃 흐드러져도 꼭
부처님처럼 졸고 있는 구자명 씨
그래 저 십 분은
간밤 아기에게 젖 물린 시간이고
또 저 십 분은
간 밤 시어머니 약 시중든 시간이고
또 저 십 분은
새벽녘 만취해서 돌아온 남편을 위하여
버린 시간 일거야
고단한 하루의 시작과 끝에서
잠 속에 흔들리는 팬지꽃 아픔
식탁에 놓인 안개꽃 멍에
그러나 부엌문이 여닫히는 지붕마다
여가 받쳐 든 한 식구의 안식
아무도 모르게
죽음의 잠을 향하여
거부의 화살을 당기고 있다. (198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