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장제에 순응하지 않겠다던 내 신념은 맥을 못 추었다.
결혼 후 제사가 있는 날이면 큰집으로 가 부엌데기처럼 일했다. 명절 전 날은 오전부터 큰 집에서 제사 음식을 했다. 하루는 시엄니와 함께 큰집에 갔는데 큰어머니께서 도라지를 벗기고 있어 제사에 쓰일 음식인 줄 알고 부지런히 도라지를 벗겼다. 오후 되니 근처 사는 큰집 시누가 와서 고맙다는 말도 없이 홀라당 도라지를 가져갔다. 그때 얼마나 어이가 없던지. 제사 음식을 하면 아이들이 먹고 싶어 난리였는데 제사 지내기 전에 제사 음식 손대는 것 아니라며 못 먹게해서 큰어머니 몰래 계단으로 아이들을 불러 내 먹이곤 했다.
전을 부치면 왜 이렇게 이쁘게 못 부치냐, 손이 조금 느리면 왜 이렇게 굼뜨냐. 밤 12시까지 제기까지 씻고 닦아서 제자리에 넣어주고 다음날 출근해야 하는데도 자는 아이를 엎고 집에 오면 새벽 1시가 넘었다
그리고 명절날 양말 선물을 사 가면 우리 집에 남는 게 양말인데 이런 걸 사 왔냐고 싫은 소리 하고, 화장품을 사 가면 이런 거 안 쓴다고 하고... 아무튼 큰어머니는 말 한마디를 해도 꼭 토를 달고 쌀쌀 맞았다.워낙 남아선호 사상이 강해 우리 딸들이 뛰어다니면 그것조차도 싫어하셨다. 계집애만 수두룩 하다는 말이 그렇게 듣기 싫었지만 나는 평소답지 않게 아무 말도 못하고 끙끙 앓기만 했다.
우리 시댁보다 잘살았던 큰 집, 그리고 제사를 지내는 게 무슨 대단한 벼슬인 줄 알고 내 시엄니를 쥐잡듯이 잡는 모습에 결국 내가 반기를 들었다.
참기름 사건이 더 기름을 부어주었다. 다른 집안 동서들한테는 참기름 한 병씩을 선물로 주면서 우리 시엄니 즉 우리 집에만 참기름을 안 주신 거다. 그것도 뻔히 시엄니가 보는 앞에서. 때문에 시엄니가 얼마나 속상해 하시든지. 시댁이 큰집 보다 못살아서 그랬는지 아예 대놓고 무시한 것. 얼마나 시엄니가 상처가 컸는지, 남해 친정집에서 국산 참기름을 가져다 드려도 너무 너무 속상해하셨다.
그리고, 나는 그 틈을 노려 시엄니를 꼬드겼다.
왜 우리가 큰집 종노릇을 해야 하느냐? 장손이라고 집 재산은 다가졌갔다면서 우리가 큰집 제사 가서 왜 그 구박을 받아야 하느냐? 나는 앞으로 큰집 제사가 있어도 명절이어도 안 가겠다.
50년 동안 큰집에서 동서 시집살이를 산 시엄니는 맨 처음 탐탁지 않아하시더니 참기름 사건이 터지면서 마음이 돌아 섰는지 용기를 내 추석 때부터 큰집을 가지 않으셨다.
1년에 4번 있는 제사와 명절까지 총 6번, 큰집 제사를 안가니 살 것 같았다. 명절 증후군이 확 날아갔고 진작에 이런 결론을 내리지 못한 게 후회됐다. 안가도 오라는 전화 한 통도 없었고 집안 어르신들께 시엄니 험담을 했다는 소리만 전해 들었지만 시엄니는 기죽지 않고 반격을 해 더 큰 험담을 해댔다.
결혼 전 우리나라의 가부장제, 특히 제사에 대해 새로운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던 페미 우먼이었다. 여자들이 결혼해 얼굴도 모르는 시댁 조상을 위해 음식을 하고 제사상을 차리면 남자들만 절하는 조선 유교 방식의 제사가 가부장제의 표상이며 없어져야 할 허례 의식이라고 아주 거창하게 떠들었다.
그런데 막상 내 일이 되고 나니 당당했던 페미 우먼은 보이지 않고 시엄니의 그늘 아래 시키는 대로, 무조건 어른들 눈에 잘 보이고 싶은 욕망, 이어진 관계를 깨는 것이 부담스러워 그냥 이 순간만 별 무리 없이 넘기려 했던 내 모습은 초라하고 한심했다. 그렇게 큰집의 부당함에 대항하는데 10년이 걸렸다. 시엄니와 한편을 먹으면서 우리 고부 사이는 더 공고해졌고 나는 더 이상 제사음식을 만들지 않는다.
큰어머니까지 내 생각을 전파하고 강요하고 싶지는 않다. 제사를 정성껏 지내는 것이 심리적으로 더 편안하다면 제사를 지낼 사람은 지내면 되고, 나와 시엄니처럼 제사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안 하면 된다.
정세랑 <시선으로부터> 소설은 심 시선의 기일 10주년을 맞이해 하와이로 간 가족여행에서 제사에 바칠 의미 있는 물건이나 어떤 의미 있는 도전을 찾아가는 심시선 후손들의 이야기다.
<십 주기니까 딱 한 번만 지낼 건데, 고리타분하게 제사상을 차리거나 하진 않을 거고요. 각자 그때까지 하와이를 여행하며 기뻤던 순간, 이걸 보기 위해 살아 있었구나 싶게 인상 깊었던 순간을 수집해 오기로 하는 거예요. 그 순간을 상징하는 물건도 좋고, 물건이 아니라 경험 그 자체를 공유해도 좋고>
우윤은 완벽하게 파도를 탈 거야. 그 파도의 거품을 가져갈 거야. 화수는 팬케이크를, 경아는 엄마가 좋아했던 커피를, 명은은 화산 물에 부착한 씨앗을...
그들은 심 시선의 10주기에 이루어지는 모험을 각자의 방식으로 헤쳐 나가며 성장을 이루어 나간다. 이 소설은 분명 우리에게 새로운 제사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조상을 기리는 것은 형식이 아니라 내용어야 한다고.
"살아 잘해야지. 죽어서는 무신 제사! 내는 내가 좋아허는 전어만 한 접시 올리라!"
우리 시엄니의 지론이시다. 나도 당연히 찬성한다.
제사 잘 지낼 생각 않고 지금 잘할게요.
지금도 큰집 이야기만 나오면 우리는 원팀이 되어 흥분하고 현재 우리는 행복하다. 그 뒤로 시엄니 자존감이 좀 높아진 듯한, 뭔가 큰 일을 해 낸 듯한...
다가오는 명절은 우리끼리 고구마튀김이나 해 먹으며 어머니는 미스트 트롯, 나는 착한 늑대랑 산이나 다녀올까 보다.
친척이라도 갑질 하는 인연은 과감히 끊기를 권유한다. 그런 인연은 끊어도 사는데 아무 지장이 없고 친척들의 수군거림도 한 때로 지나가더라. 뭐 1년 동안 한 번 볼까 말까 한 친척이 무슨 대수라고.
결혼해 큰집과 인연을 끊은 것이 젤 잘한 일이다.
"형식만 남고 마음이 사라지면 고생일 뿐입니다.
그것도 순전 여자들만."
- 정세랑 시선으로부터 중에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