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8시 30분부터 3시간 넘게 정신이 없습니다. 조금 한가해질 무렵이었습니다. 얼마나 말을 많이 했던 지, 입김으로 마스크가 축축이 젖었습니다. 입술 위 인중에는 땀방울이 맺힙니다.
50대 후반의 여자분과 20대 초반의 아들로 보이는 남자가 들어왔습니다. 아주머니는 두 손에는 꽤 두툼한 노란 서류를 들고서 몸을 앞으로 숙이며 마치 돌진하는 것처럼 들어오네요.
'흠.....'
독감 접종을 위해서라면 예진표 한 장을, 검진으로 왔다면 몇 장 안 되는 종이를 들고 왔을 텐데 이상했습니다.
"검진 결과 설명을 듣으려고요."
작은 창이 있는 동그란 모자와 마스크 사이로 보이는 두 눈은 벌겋게 충혈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퀭합니다.
'어어어.'
불길한 예감이 듭니다.
'암이라도 나온 건가.'
"그래요? 한 번 볼까요?"
그녀가 꺼낸 건강검진 결과지는 2015년도, 즉 5년도 더 되었습니다. 거기다 결과는 M/58, 즉 58세 남자였습니다. 고개를 갸우뚱 거리는 저를 보자, 아주머니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제 남편 것이에요."
"네? 남편은 어디 가시고?"
"그게 사실은 남편이 신장 수술을 받다가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수술받기 전까지는 건강했거든요. 그래서 건강했다는 거 확인하려고 왔어요."
아주머니가 말을 하는 도중에, 뒤에 서 있는 20대 초반의 아들이 살며시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앞으로 들이 밉니다.
'녹취하는 거 다 보인다, 얘야. 그건 그렇고, 굳이 왜 나에게 왔지.'
시작부터 상당히 기분이 나쁩니다. 저의 이상적인 꿈은 하루에 20~30명 예약제로 진료를 보는 것이고, 현실적인 꿈은 의사를 관두기 전까지 소송에 걸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거 까딱 잘못했다가는 법원에 출두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어깨가 잔뜩 움츠러듭니다.
"일단 봅시다. 서류 다 주세요."
우리 병원에서 한 2015년 검진 결과지 외에도 2016년, 2017년, 2018년, 2019년 건강검진 결과지를 건네받았습니다. 백장은 족히 넘어 보입니다. 다 보는 데만 해도 30분은 족히 걸릴 듯해서 콩팥 수치를 나타내는 검사(BUN, Creatine, eGFR, 요 검사)만 쭈욱 봅니다. 특별히 영상 검사는 없습니다. 2015년 괜찮고, 2016년 괜찮고, 2017년 특별한 거 없고, 2018년 정상이고, 2019년 콩팥 기능을 나타내는 수치가 떨어지긴 했지만 뭐 문제 될 정도는 아닙니다.
"보호자분, 신장 수치는 정상입니다. 사실 신장암이라는 게, 초음파나 CT 등을 찍지 않으면 알 수가 없고 수치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완전히 콩팥이 망가져야, 수치가 떨어지기 때문에 이걸로 그전부터 신장이 좋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저는 신장 수술이라고 하길래, 당연히 암 수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선생님, 심장요. 심장."
'아놔. 지금까지 뭐한 거야.'
"사실은 심근 경색으로 심장 시술받다가 중환자실에서 돌아가셨거든요. 최근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산재 신청했는데 거절당했거든요. 그래서 건강검진 결과에서 그전에 건강했던 거 확인하려고요. 평소 건강했다는 소견서 좀 써주세요."
?????????
아내분은 울먹이며 말씀하셨지만 의사인 저로서는 황당하기 그지없습니다.
일단 남편분이 돌아가신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제가 이 병원에 근무한 게 지난달부터니까 본 적도 없습니다. 저희 병원도 5년 전에 건강검진 딱 한 번, 한 게 전부이고 그 흔한 외래 기록도 없습니다. 거기다 2016, 2017, 2018, 2019년 건강검진을 또 다른 병원에서 하셨습니다. 거기다 동의도 없이 몰래 녹취까지 하고 있네요. 굳이 2015년에 건강검진을 한 저희 병원까지 온 걸 보니 다른 병원에 거절당했을 가능성도 높아 보입니다.
냉정하게 딱 잘라 거절하면 되는데 그러지 못하는 제 자신이 밉습니다.
곤란한 상황입니다. 여차하면 경찰서나 법원 가게 생겼습니다. (소견서만 써주고 안 나가도 되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적이 없어서.)
밖에서 외래 간호사가 다음 환자에게
"상담이 길어져서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라고 안내하는 말이 다 들립니다. 저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뭅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니까, 바짝 정신 차리자.'
"결과가 많으니까, 제가 볼펜으로 체크 좀 할게요. 괜찮겠죠?"
"네."
'휴우.'
마음을 다잡기 위해 숨을 크게 한 번 들이쉬었다 내쉽니다. 다시 서류를 검토합니다. 혈압은 고혈압 진단 기준인 140 전후로 매년 높았다 낮았다 했으나, 약은 또 먹은 적이 없다고 합니다. 고지혈증에서 가장 중요한 수치인 LDL(저밀도 콜레스테롤, 높으면 안 좋음)이 160을 넘습니다. 고지혈증으로 무조건 약을 먹는 기준에 해당합니다. 2019년 마지막 해에는 190이 넘었습니다. 소견서에는 매년
고지혈증으로 의사 진료를 받으십시오.
라고 되어 있습니다.
"평소에 먹는 약 있었나요?"
"아뇨, 건강했어요. 어디 아픈데도 없고. 최근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힘들어했고, 갑자기 심근 경색이 왔어요. 대학병원에서 시술받았는데, 결국 중환자실에서 돌아가셨어요. 원래 건강했는데..."
아내분은 계속해서 남편이 건강했다는 말을 합니다.
"여기 보시면 고지혈증이 있었고, 의사 진료받으라고 되어있잖아요."
제가 검진 소견서에 볼펜으로 줄을 그은 다음 보호자에게 내밀어 보입니다.
"네."
"여기도 있죠? 매년 고지혈증 있다고 되어 있거든요. 근데 진료 안 받으셨죠?"
"네. 근데 고지혈증이라고 심근 경색 걸리는 건 아니잖아요?"
"그렇죠. 확률이 증가할 뿐이죠. 잠시만요."
저는 또 구글 검색을 시작했습니다. 몇 년 전부터 미국에서 나온 10년 심혈관계 사망률 위험도 계산기입니다. 사망률을 비교적 높게 측정하는 단점이 있지만 심혈관계 사망률을 계산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공식입니다.
"이게 거의 유일한 심혈관계 사망률 예측하는 식인데, 고인이 10년 안에 심혈관계 질환으로 사망할 확률이 20%입니다."
아내분이 갑자기 말이 없어집니다.
뒤에서 휴대폰으로 열심히 내 목소리를 녹음하던 아들이 어머니를 돕기 위해 끼어듭니다.
"꼭 고지혈증이 있어서 심근 경색이 생긴다고 말할 수 없지 않나요? 다른 원인도 있지 않나요?"
"많죠. 나이가 제일 중요하고, 유전,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술, 담배, 운동, 스트레스 등 10가지가 넘습니다. 다만 의사가 할 수 있는 건,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진단과 치료뿐이에요. 소견서는 써 드릴 수 있어요. 2015년부터 고지혈증 복용 기준에 해당했으나 약을 복용하지 않았으며, 10년 심혈관계 사망률은 20%였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소견서가 도움이 안 되실 것 같아요."
남편은 건강했어요. 스트레스 때문이라고요.
아내분이 절규하듯 외칩니다.
"의사인 저로서는 '남편분이 고지혈증이 있었으나 약을 먹지 않았다'와 '10년 심혈관계 사망률은 20%입니다'가 말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다른 의사도 똑같은 말을 할 겁니다. 진단 기준이 의사마다 다르지 않으니까요. 스트레스와 심근 경색의 연관성은 법원에서 판단하겠죠. 그리고 원래 심혈관계 질환, 즉 심근경색이나 중풍은 사전 경고 없이 한순간에 시한폭탄처럼 펑하고 터지죠."
하지만 아주머니는 같은 말만 계속합니다.
남편은 건강했다.==>안 아픈 것과 건강한 것은 다르다. 심근 경색은 원래 갑작스럽게 생긴다. 거기다 남편분은 고지혈증이 있었다==> 고지혈증이 있었다고 무조건 걸리는 건 아니지 않으냐?==> 맞다. 하지만 위험이 높아진다.==> 스트레스 때문이었다==> 그럴 수도 있으나, 그건 법원이 판단하는 것이다.==> 남편은 건강했다.
무한 반복입니다. 아내분이 진료실로 들어온 지 30분 가까이 되어갑니다. 점심시간이 다 되어 가고, 밖에서 대기하는 환자들의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들려옵니다. 간호사가 밖에서
"안에서 상담이 길어지셔서,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라고 말하는 소리가 진료실 안에서도 잘 들립니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는지 일부러 크게 말한 듯합니다. 밖에서 들려오는 간호사의 말에 쳇바퀴처럼 계속 돌던 대화가 그제야 멈춥니다.
긴장과 흥분으로 붉었던 아내분의 얼굴이 차갑게 식었습니다. 원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들었으니 실망이 컸을 겁니다. 그런 소식을 전한 저를 원망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산재 판정 부분은 저도 잘 모르지만, 이렇게 하시지 마시고 일단 변호사를 고용하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아내분은 종종걸음으로 진료실 문 안으로 성급히 들어왔을 때와 달리,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발을 질질 끌며 마치 패잔병처럼 진료실 밖으로 나갔습니다.
처음부터 사정을 설명하고 도와달라고 했다면 그나마 나았을 겁니다. 하지만 속사정을 숨기고, '검진 결과 상담하러 왔다.'가 '남편이 건강했다는 것을 알고 싶다.'로 결국에는 '산재 판정에 유리한 소견서'로 그 목적이 바뀌었습니다. 거기다 몰래 녹음까지 하니, 그 어떤 의사라도 기분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상한 제 감정도 감정이었지만, 30분 가까이 시간이 흘러 다음 환자분들이 많기 기다려야 했습니다. 거기다 진료비는 단 한 푼도 못 받았습니다. (죽은 사람은 진료비를 청구할 수 없습니다.)
화가 나기로 했지만, 막상 남편을 잃은 아주머니가 실망하여 나가는 쓸쓸한 뒷모습에 마음이 아픕니다. 얼마나 절박했으면 저랬을까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혹시나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시면 연락 주세요.'라고 연락처를 줄까도 망설였지만 겨우 참았습니다.
이렇게 직접 사람을 대하면 마음이 아프고, 또 서로 객관적이고 이성적으로 판단하기 어려워서 오로지 메일로만 하기로 했던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브런치 글을 읽고, 환자 대신 기자분이 몇 번 연락 오셨습니다.)
저는 아내분의 절박한 기대를 무참히 깨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내분께서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오셨겠지만, 저는 그 지푸라기마저 손에서 빼앗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전에도 말한 적이 있지만, 의사에게 가장 어려운 순간 중 하나가 바로 "나쁜 소식 전하기"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마음이 불편합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좋은 소식만 가득하기를 빕니다.
지금에서야 글을 쓰면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생각해보면, 좀 더 다정하게 말할 수도 있었는데 저도 인간인지라 그러지 못했습니다. 연락처는 그렇다 치고, 이메일 주소라도 줄 수 있었는데 후회도 듭니다. 뒤늦게 후회를 해 보지만, 이름도 기억을 못 할 뿐만 아니라 정식으로 접수를 한 게 아니라, 기록도 없어 연락할 방법도 없습니다. 안타까울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