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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나리의사 Mar 11. 2022

의사의 적은 질병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

아이도 살고, 나도 살고

 "선생님, 315호실 김서준 애기 38.5도로 열나는데요, 어떻게 할까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해, 손을 더듬어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먹고 있던 밥을 빼앗긴 고양이처럼, 잠을 빼앗긴 나는 잔뜩 예민해졌다. 새벽 3시에 눈을 비벼 가며 응급실에 수족구로 온 아이를 보고 올라와 겨우 잠에 든지 10분도 되지 않았을 때였다. 벌써 하룻밤 동안 이름과 호실만 다를 뿐, 아이가 똑같이 열이 난다는 증상의 전화를 몇 통이나 받았는지 모른다. 누가 누군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밀려오는 전화에 내 잠은 산산조각 났고 인내심도 한계에 달했다. "미리 처방 내 놓은 해열제 주세요."라고 말하고 대충 전화를 끊으려다, 몇 개월 전에 파견 나갔을 때 소아과 의국장 선생님이 했던 말이 떠 올랐다.


 "작년에 S대 병원 소아과 병동에서 아이 밤새 열나고 했는데, 의사가 직접 내려가서 아이 안 보고 해열제만

계속 줬다가 패혈성 쇼크로 죽은 거 다 알죠? 밤에 힘든 건 알지만, 아이 열나면 꼭 가서 진찰하세요."


  성격이 날카롭기로 소문난 4년 차 의국장 이민정 선생님은 칼날 같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의국 회의 때마다 직접 가서 아이 상태를 확인할 것을 강조했지만, 그건 몸이 두 개 일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나는 2차 병원 소아과에 파견을 나와 30~40명 남짓의 소아 입원 환자와 응급실에 오는 소아 환자를 소아과 레지던트 2년 차 선생님과 잠을 못자 눈물 대신 붉은 피가 나올 것처럼 충혈된 눈으로 번갈아 당직을 서고 있었다.

 아침 7시에 출근해, 다음날 저녁 7시까지 36 시간을 연속 근무하고 퇴근해 12시간을 쉬었다. 입원한 아이 대부분이 발열, 장염, 각종 전염병이었고, 모든 중환자 중에서 가장 힘들다는 신생아 중환자실이 없는 데다 분만도 일 년에 겨우 몇 번 밖에 없어 주당 근무시간 120시간(참고로 일주일은 168시간이다)이 넘었지만 그나마 편한 편에 속했다.


 밤 동안 병동에서는 끊임없이 전화가 걸려 왔는데 대부분이 아이가 열난다는 콜이었고, 응급실에도 아픈 아이가 계속 왔다. 응급실에 오는 아이는 담당 의사가 응급실로 직접 내려가서 진찰을 해야 했다. 응급실 소아를 보면서, 병동에서 열나는 아이까지 모두 다 볼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아이를 직접 보지 않고 해열제만 주라고 하기에는 패혈성 쇼크로 아이가 죽었다는 이민정 선생님의 말이 숙취처럼 남아 안 그래도 피곤한 몸에다 마음까지 괴롭혔다. 거기다 아이를 보지 않고, 해열제만 주라고 전화로 오더를 내리면 다음날 아침에 회진을 돌 때 아이가 밤새 열이 나는데 의사가 와서 직접 와서 봐주지 않는다고 보호자들이 계속 불만을 표했다.


 사람들은 의사를 힐러(healer), 치료자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전사(fighter)에 가깝다. 사람을 괴롭히는 각종 질병과 싸우는 게 주된 일이지만, 가끔 환자와 보호자와 다툰다. 심근 경색으로 당장 치료를 받아도 죽을수 있는데 치료 안 받고 집에 가겠다는 환자부터 해서, 맹장염 수술받은 당일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퇴원하겠다는 사람 바지를 붙잡고 늘어지기도 했다. 물론 의사는 같은 의사나 간호사와도 으르렁거리기도 한다.


 하지만 의사의 진정한 적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그것도 못 먹고, 못 자는 인턴이나 전공의 때라면 더더욱 그렇다. 하루 종일 안 먹는 건 어떻게 참을 수 있지만, 잠은 달랐다. 성형외과 전공의 1년 차였던 동기 김정훈이는 수술방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던 도중에 그대로 자리에 무너져 내린 채 잠에 빠지기도 했고, 40시간 동안 수술방에서 나오지 못한 나는 환자의 열린 배를 벌리는 수술도구인 겸자를 들고 서서 졸기도 했다.   


 가정의학과 2년 차에 소아과 파견을 나온 나는 수없이 쏟아지는 전화와 환자 속에서 또 다시 잠과 싸우고 있었다. 소아과 파견 근무를 하면서 제일 힘든 건, 아픈 아이도, 예민한 보호자도 아닌 몰려 오는 잠이었다. 잠을 자지 못한 나는 아픈 아이만큼 예민해져 있었다.


 의사인 내가 잠을 자지 않으면,
사람인 내가 죽을 것 같았고
의사인 내가 잠이 들면,
환자인 아이가 죽을 것 같았다.

 의사인 나도 살고, 환자인 아이들도 살아야 했다. 어떻게 하면 둘 다 살 수 있을지 고민 끝에 나는 아이와 보호자가 잠들기 전인 밤 8시 30분에 혼자서 소아 전체 회진을 돌기로 했다. 내가 주치의인 아이들 상태는 잘 알았지만, 카운터인 소아과 선생님 아이들 상태는 잘 몰랐다.


 "안녕하세요? 당직의사 양성관입니다. 오늘 입원한 지 3일째네요. 좀 어때요?"


  아이가 어떤 질환으로 입원했고, 검사 결과가 어떻고, 어떤 약을 쓰고 있는지는 일일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회진을 돌면서 아이의 '때깔' 그러니까 딱 보면 느껴지는 전반적인 아이의 상태를 보는 동시에, 불안해하는 보호자에게 얼굴을 비추며 나의 불안감을 가라 앉히는 동시에 보호자의 마음을 달래는 게 목적이었다.

 이틀에 한 번씩 당직을 설 때마다 20~30분 정도의 회진을 돌고 나서, 상태가 안 좋은 아이 몇 명만 체크를 했다. 그리고 밤에 체크한 아이가 열이 나면 직접 진찰하고, 다른 아이들은 열이 난다고 전화가 오면 미리 처방해 놓은 해열제를 주었다. 그러자 확실히 밤에 전화 오는 횟수도 줄고, 또 전화가 와도 마음 편히 해열제를 주라고 대답하고 잠을 취할 수 있었다.  

 그렇게 당직을 설 때마다 밤 회진을 돈 지 얼마 되지 않아, 병동에 정민지 간호사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선생님, 밤에 회진을 도니 보호자들이 너무 좋아해요. 그 전까지는 왜 아이가 아픈데 의사가 안 오냐고 엄청 컴플레인도 들어왔는데 이젠 그런 말이 안 나와요."

 "아, 그래요. 다행이네요."

 겉으로 겸손하게 대답했지만, 나는 속으로 함박 웃음을 지었다. 정민지 간호사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근데, 보호자들이 왜 다른 당직 선생님은 밤에 회진 안 도냐고 불평하세요.

 아, 차마 그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의사로 사는 게 쉽지 않았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21294110

깨알같은 책광고와 함께 본업으로 돌아 왔습니다.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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