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의학 대신 철학
괜히 말을 꺼냈다 싶었다. 시작은 언제나 항상 내가 환자들에게 하는 말로 시작되었다.
"평소에 어디 아프거나 몸에 대해서 궁금한 거 없어요?"
내 어머니 나이 또래로 일흔이 얼마 남지 않은 김경숙 씨는 머리에 검은색보다 흰색이 더 많았다. 수수한 옷차림에 화장 없는 얼굴이 어디가 특별히 아픈 건 없는데, 힘이 없어 보였다.
"괜히 나이가 드니 서글퍼지네요."
'아.................'
"특별히 아프거나, 걱정되는 게 있으신가요?"
"아니, 그런 건 없는데, 괜히 그러네요."
날이 추워지고 겨울이 다가와서 그런 것일까? 부쩍 이런 환자가 많아져서 내 마음도 무거워진다.
우사인 볼트가 2009년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에서 9.58초로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우승할 당시의 나이는 만 22살이었다. 육상뿐만이 아니다. 수영계의 황제, 마이클 펠프스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무려 8개의 금메달을, 그것도 세계 신기록 7개와 올림픽 신기록 1개를 세우면서 딴 것도 만 23살 때였다. 20대 초반이 지나면, 우리 몸의 육체적인 기능은 모두 쇠퇴하기 시작한다. 서서히, 때로는 급격히.
나는 의무를 다하기 위해 살아간다. 의사로서, 남편으로, 두 아이의 아빠로서. 의사로서 환자에게 그들의 아픔을 덜어주고, 남편으로 죽기 전까지 아내 편을 들며 그녀를 지켜주며, 두 아이의 아빠로서 아이가 독립할 때까지 그들을 돌보고 키울 의무가 있다. 그 의무를 다하는 것이 내 삶을 지탱해준다.
<명상록>을 쓴 로마의 철인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의 대부분을 로마 제국의 변방을 순찰하면서 썼다. 이성을 추구하는 스토아학파는 이성을 바탕으로 한 생각과 의지로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금욕주의로'로 잘못 알려졌지만, 스토아학파는 '의무'를 행하는 것에서 기쁨을 추구했다. 로마의 철인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수도 로마에서의 안락한 생활을 포기하고, 죽는 순간까지도 변방 지대를 두 발로 누비며 황제의 의무인 로마의 국경을 강화하다 죽음을 맞이 했다.
"삶에서 뭔가 즐거운 것을 찾으세요.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 있잖아요."
적절한 대답을 찾지 못해 빛나는 머리를 긁적였지만, 시답지 않은 말만 나왔다. 즐거운 것, 쾌락. 쾌락하면 에피쿠로스 학파이다.
물론 에피쿠로스 학파를 쾌락주의 말하는 즐거움, 쾌락은 흔히 생각하는 육체적 쾌락이 아니라, 정신적 쾌락으로 몸에 괴로움도 없고, 영혼에 동요도 없는 상태1)를 뜻한다.
나는 어머니 뻘인 그녀에게 삶의 즐거움, 활력을 찾아볼 것을 권유하긴 했으나, 대답이 궁해서 나온 말일 뿐이었다.
오전 진료를 마치고, 나는 병원 뒤에 있는 공원을 걸었다. 머릿속에는 김경숙 씨가 "괜히 나이가 드니 서글퍼지네요."라는 말이 맴돌아 마음이 무거웠다.
아침에 출근할 때는 기온이 한 자릿수로 추웠지만, 점심이 되자 산책하기에 적당했다. 바스락 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황톳길을 따라 걷는데 가을 하늘답게 하늘에는 한점 구름도 없고, 파란 하늘의 노란 햇볕은 마치 신의 축복인양 따스했다.
문득 한 철학자가 떠올랐다. 대제국을 건설하던 알렉산더 대왕이 소문을 듣고 한 철학자를 찾아갔다.
"나는 알렉산더 대왕이다. 내가 그대에게 뭘 해주면 좋겠는가?"
그러자, 디오게네스가 말했다.
햇볕을 가리고 있으니, 좀 비켜주시오.
사람들이 개 같은 삶으로 오해하고 있는 견유학파의 디오게네스였다. 금욕주의의 스토아학파, 쾌락주의의 에피쿠로스 학파가 있다면, 무욕주의의 견유학파였다.
나는 문득 디오게네스가 진정으로 추구했던 건, 살아있는 것 자체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는 단순히 살아있어서 즐거웠고, 그렇기에 모든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지 않았을까?
이나경 님에게 지금 이 순간 나를 감싸는 햇볕을 전하고 싶었다. 그녀 또한 의무, 즐거움, 쾌락, 그 모든 것을 떠나 살아있는 것만으로 행복할 수 있기를......
1) 출처: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 2』 2021. 나남출판, p.3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