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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나리의사 Jan 30. 2023

"친구 때문이에요."

그 할아버지의 가슴이 갑갑한 이유

 길에서 몇 번이나 지나치도 마주친 것을 모를 법한 평범한 70대 노인이었다. 의사를 하다보면 환자의 얼굴만 봐도 꾀병인지 아닌지, 응급인지 아닌지, 경한지 심한지, 촉이 온다. 그런데 배상필 할아버지의 얼굴을 보았을 때는 전혀 감이 오질 않았다. 그래서 내가 검진을 마치고 어디가 아픈데 있으세요?라고 물었을 때 할아버지는 묻기를 망설였을지도 모른다. 


 "그게 가슴이 답답해요."


 70이 넘은 나이에 고혈압, 고지혈증이 있으니 의사라면 암 다음으로 사망률 2위이자, 언제든지 급사를 할 수 있는 심장 질환부터 감별했다. 


 가슴은 어렵다. 이전에도 쓴 적이 있지만, 사람들이 가슴으로 말하는 부위는 


1. 피부를 포함한 근골격계(여자라면 유방 포함)

2. 심장과 대동맥

3. 폐

4. 위식도

5. 기타

로 매우 광범위하다. 


"얼마나 되었어요?"


 한 달이 넘었다는 환자의 말에 "어디가 이상할까?"와 함께 "무슨 검사를 해야 할까?"를 머릿속으로 떠올리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나는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이기보다,
 환자를 괴롭히는 범인을 잡는 형사가 된다. 

 

<용의자들.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

 피부와 근골격계, 심장과 대동맥, 폐, 위와 식도, 기타 이렇게 용의자들을 주욱 늘어놓고 알리바이가 있으면 용의자 선상에서 제외한다. 의심스러운 상황이 있으면 용의자들을 추궁하여 발뺌할 수 없는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 범인을 체포할 것이다. 처음부터 잘못된 용의자를 추궁하다 보면 환자도 지치고 의사도 지칠 수 있기에 신중한 동시에 단호해야 한다.   


 "평소에 운동하거나 힘을 쓸 때, 통증이 있나요?"

 "아뇨, 멀쩡합니다."


 혈압도 정상이고, 청진에서 이상도 없어 심장 가능성은 낮지만, 고령이고 고혈압과 고지혈증이 있으니, 결코 심장이 아니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심장에 피를 공급하는 빨대 크기의 혈관인 관상동맥이 막히거나 좁아지는 심근경색은 환자가 병원 문밖을 나가다가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져 죽을 수도 있다. 의사라면 절대로 모를 수 없는 초응급질환이다. 가장 간단한 심전도부터 혈액검사, 심장초음파, 운동부하 검사, 심혈관 조영술까지 다양한 검사를 고려할 수 있다. 

 

 "기침하거나, 가래가 끓나요?"

 "전혀 없어요."

 청진상 특이 소견이 없다.  폐 가능성은 낮아 보였다.  그래도 엑스레이는 기본적으로 촬영해서 확인하는 게 나을 듯했다. 


 "음식 먹고 나면 심해지거나, 누우면 심해진다, 신물이 올라온다, 이런 거 있나요?"

 "별로요."

 역류성 식도염이나 위염 가능성도 희박해 보인다. 건강검진에서 위내시경을 하니까, 결과를 확인해 보면 된다. 


 "최근에 피부에 뭐가 다거나, 어디에 부딪힌 적 있나요?"

 "아뇨."

 청진할 때 피부를 봤지만, 물집은 보이지 않는다. 대상포진이 즉시 용의 선상에서 제외되었다. 가슴 이곳저곳을 눌렀지만 통증이 없어 근골격계 질환 또한 범인일 가능성이 매우 적었다. 


 "잠시만요. 병원 기록 좀 볼게요."

 여기까지 간단한 탐문을 마치고, 좀 더 확실한 물증을 잡기 위해 병원 기록이나 검사를 살펴보기로 했다. 작년 말에 건강검진을 했고, 2주 전에 우리 병원 내과에서 흉통으로 이미 많은 검사를 했다. 기본적으로 엑스레이부터 해서 심전도, 각종 혈액검사와 폐CT, 심장 초음파까지 모두 정상이었다. 건강검진에서 위내시경도 했고 특이 이상이 없었다. 그러니까 심장과 대동맥, 폐, 위식도 질환까지 알리바이가 있어 용의자 선상에서 제외되었다. 다만 위내시경 상에서 약간의 위염 소견이 있고, 역류성 식도염의 경우 내시경에서 보일 정도면 매우 심한 경우라 위내시경에서 안 보여도 있을 수 있다. 이에 내과 선생님께서 위염과 역류성 식도염약을 일주일 정도 처방하였다. 

 

"저희 병원에서 2주 전에 위염과 역류성 식도염 약을 처방받으셨네요. 좀 어떠셨어요?"

"별 효과가 없어요. 그대로입니다."

 

 이로써 위염과 역류성 식도염까지 배제되면서, 피부와 근골격계, 심장과 대동맥까지 모두 용의 선상에서 제외된 상황이었다. 사건이 발생하여, 조사를 하다보니, 용의자가 아무도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난감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기본적인 사실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하루 중 언제 그런지, 더 심해질 때가 있는지, 정확히 언제부터 그랬는지. 


 "한 달 반 정도 전부터 그랬어요."

 "그때 특별한 일 있었어요? 뭘 하다가 그랬다거나."

 배상필씨는 곰곰이 생각을 하더니, 결정적인 증언을 했다. 

 "아,  친한 친구가 구안와사가 와서 입이 돌아갔어요.

 "뇌졸중은 아니고요?"(안면 신경 마비는 단순히 얼굴 신경만 마비되는 말초성 신경 마비와 뇌경색 등으로 인한 뇌이상으로 중추성 신경 마비로 나누어진다) 

 "다행히 뇌졸중은 아닌데, 그 후로 한 달이 넘었는데 얼굴이 돌아가서 침을 질질 흘리고 다녀요. 거의 매일 보는 친한 친구인데 참 딱하기도 하고, 나도 저러면 어떨까 걱정이 되기도 하고. 선생님, 저는 괜찮겠죠?"


 막힌 둑이 한순간에 무너지듯 이전까지는 단답형으로 대답하던 할아버지각 각종 질문과 걱정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뇌경색이 아닌지, 치료는 되는지, 평생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왜 걸리는지, 안 걸리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친구 때문이네요. 

"환자분이 마음씨가 고우셔서 친구 걱정을 너무 많이 하셔서 그렇네요. 가족 같은 친구라 본인도 그럴까 봐 걱정이 되시고도 하고. 걱정 마세요. 치료하면 10명 중에 8~9명은 좋아집니다."

 "생각해 보니, 딱 그때부터인 것 같아요. 제 마음이 갑갑해진 게."

 "너무 걱정 마세요. 친구분도 시간 지나면서 천천히 좋아질 겁니다."

 "아이고, 선생님. 고맙습니다."

 "아이, 뭐 별말씀을."


 그의 얼굴에서 그늘에서 꽁꽁 얼어붙어 있다가 햇볕이 비치자 사르르 녹아버리는 눈처럼 근심과 걱정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나는 범인이 잡히는 동시에 치료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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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튼을 잘못 눌러, 

 <K전염되는 췌장암> 글이 실수로 발행되었네요. 겨우 2줄 짜리였지만, 저의 영업 비밀이 들킨 것 같아 부끄럽습니다. ㅎㅎㅎ 죄송합니다. 그런데 좋아요 눌러주신 분들... 대단히 감사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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