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로서 나는 항상 우는 쪽이었다. 여자들이 항상 나의 고백을 거절할 때 하는 말은 똑같았다.
넌 참 착한 사람이야.
어머니께서 나를 축구공이라고 불렀는데, 어렸을 때부터 여자들에게 차이고 집에 와서 대성통곡을 하는 모습을 보시고는 어머니께서 지어주신 별명이었다.
20대까지 축구공이었던 나는 어른이 되어서, 더 정확히는 의사가 되어서 나쁜 남자가 되어 가끔 여자를 울린다. 그것도 젊은 여자부터 할머니까지.
종합병원에서 근무하는 의사인 나는 아픈 환자도 보고, 안 아픈 손님도 본다. 안 아픈 손님이란, 건강검진이나 채용 검진을 위해서 병원에 온 사람이다.
손님 두 명이 동시에 진료실로 들어왔는데, 초등학생과 엄마였다. 30대 중반의 엄마는 아들 학생검진을 하는데, 오는 김에 자신도 건강검진을 받으러 왔다고 했다. 꽃무늬 원피스에 하얀 피부에 빨간 립스틱, 힐이 있는 구두를 신고 온 젊은 엄마는 병원 진료보다는 나들이에 어울리는 옷차림이었다. 무채색의 진료실이 원피스의 꽃 때문인지, 여자의 화장 때문인지 화사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내가 건강검진 문진표의 뒷면을 보기 전까지였다.
<6개월 전부터 10개비 미만의 흡연>
많은 사람들이 담배를 피운다. 주로 여자보다 남자가 많이 피우는데, 흡연의 이유는 다양하다. 군대에서, 습관적으로, 남들 다 피우니까, 어울리려고, 피우다 보니 못 끊어서. 그런데 건강검진을 하다가,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여자가 담배를 피우면, 안 피우는 이들에 비해서 우울한 경향이 높았다. 그것도 10대나 20대가 아니라, 최근에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면 그럴 가능성이 더 높았다.
다행히 검진에서 같이 하는 <정신건강검사 평가 도구(PHQ-9)>은 27점 만점(높을수록 우울증이 강력히 의심된다)에 준서 엄마는 0점으로 우울증 경향이 전혀 없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간단히 짚고 넘어가기로 했다. 아들이 같이 있어서, 직접 말하지도 못하고 볼펜으로 흡연 부분을 동그라미 치면서 대수롭지 않은 듯 흘리듯이 말했다.
여자분들이 이런 경우(흡연)는 스트레스 때문인 경우가 많더군요. 그러니까 우울증이요…..
.
"흑”
내 말은 젊은 엄마의 울음소리와 함께 끊겼다. 내가 놀라서 다시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자, 그녀도 자신의 울음에 당황했는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잠시만요. 휴지가 어디 있나요?”
라며 휴지를 찾았다. 책상 위의 휴지를 건네니, 그녀는 눈물을 훔치고는 다시 아무렇지 않은 듯 최대한 건조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아이 앞이라 슬픔을 드러내는 것이 불편했으리라.
“안 그래도, 최근에 가장 가까운 지인이 죽어서 많이 힘들었어요.”
“아, 네.”
“사실 그래서 그것도 시작하게 된 것이고요.”
“네, 그렇죠. 가까운 사람이 돌아가시면 누구나 슬퍼하게 됩니다. 다만 너무 힘들거나, 6개월 이상 가면 꼭 치료가 필요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아이 때문에 우울증 등에 대한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약간 마른 엄마에 비해 살이 쪄 제법 통통한 준서는 엄마의 울음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 엄마에 이어 아이의 건강검진도 끝이 나서, 아이와 엄마가 같이 진료실로 나갔다. 환자이기 이전에 한 여자의 눈물을 보아서 그런지 내 마음도 찹찹했다. 그때 다시 진료실 밖을 나갔던 엄마가 혼자 들어왔다.
“선생님, 제가 심리 치료 같은 것을 받아 봐야 하나요?”
밖에서 기다리는 준서 때문에 상담은 길지 못했다. 나는 그녀에게 금연을 하고 꼭 정신과 진료를 받아보시기를 재차 권했다.
이제 더 이상 여자 때문에 내가 우는 일은 없다. 대신 이제 가끔 여자를 울리는 나쁜 남자가 된다. 불면증이 있는 중년 여성에게 "혹시 우울하지는 않으세요?"라고 묻거나, 앞서 말했듯 담배 피우는 여성에게 "담배 피우는 여자분 중에 우울증이 있는 분이 많거든요."라고 할 때이다. 여자가 내 앞에서 울어, 내가 나쁜 남자가 될 때마다 항상 마음이 불편하다. 차라리 예전처럼 "착한 사람"으로 차여서 내가 우는 게 더 속이 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