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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직장을 그만두다

힘들면 그만둬도 돼요

by 글을쓰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를 입학하면 누구라도 그간 힘들었던 시간을 보상받기 위한 심리가 발동한다. 나는 힘들기로 악명 높은 간호학과에 입학했지만 생각보다 학부 생활은 즐거웠다. 일단 저녁까지 억지로 공부를 안 해도 돼서 좋았고, 그렇게 꿈꿔왔던 소개팅도 첫 연애도 해보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3학년이 되고 첫 실습을 나가면서 ‘아차’ 싶은 순간이 생기기 시작했다. 우선 직접 눈으로 본 병원의 하루는 너무 바쁘고 쉴 틈이 없었다. 밥을 먹는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를 못했으며 기상천외한 환자들의 요구사항, 물밀듯이 몰려오는 검사와 수술들... 이걸 정말 한 명의 인간이 8시간 동안 해내야 하는 일이라고? 싶었다.

지금은 남들도 인정하는 애주가이지만 이십 대 초반만 해도 나는 술을 썩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실습을 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힘든 일을 잊기 위해 술을 찾기 시작했고, 정말 아니다 싶은 병원의 실습이 끝났을 때는 그 주에 같이 근무했던 동기들과 삼겹살집을 찾아갔다. 그때 먹었던 삼겹살에 소주 맛은... 지금까지도 다시 느껴 볼 수 없을 정도로 황홀했다.


어쨌든 그렇게 힘든 시간이긴 했지만 일단 학생의 신분으로 병원을 맛보았기 때문에 나의 일이라는 생각이 그리 강하게 와닿진 않았다. 여차하면 서울의 가장 좋은 병원으로 올라 가 돈이라도 많이 받으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어림도 없는 결심이었지)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갔고 국가고시까지 무사히 치른 나는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 입사를 앞두고 있었다. 네임 밸류도 있고 페이도 괜찮다고 들었기에 두려움보다는 설렘이 앞섰다. 그때만 하더라도 공부도 나름 잘했고 첫 입사도 괜찮은 병원에 입사했기에 아직 인생의 쓴맛을 못 봤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내가 해내지 못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고대하던 근무 첫날. 배정받은 병동으로 내려가 잠시 나이트 번 선생님이 하시는 일을 옆에서 보고 있었다. 복도에서 열심히 채혈 용기를 정리하던 선생님은 간호사 스테이션에는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이 병동에는 지원했어요?”


“네, 선생님. 3 지망이었는데 오게 되었습니다.”


“그렇구나... 내가 첫날이니까 이런 말 하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도망가요, 선생님.”


그게 지금 무슨 말씀이시죠.라는 말을 되물을 새도 없이 선생님은 예전에 ‘나는 자연인이다’에 나왔던 말벌 쫓아내는 아저씨처럼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어디론가 뛰어가셨다. 그리고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점점 실감하기 시작했다. 병원 생활의 생생한 힘듦을 전달할 수 없는 내 필력이 원망스럽기 그지없을 뿐이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업무 강도, 인간관계, 체력관리. 뭐 하나 힘들지 않은 게 없었다. 병원으로 향하는 길에는 항상 차가 나를 죽지 않을 정도로만 쳐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합법적으로 쉴 수 있으니까. 병동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는 지금이라도 도망칠까라는 생각을 매일 같이 해왔다. 직장인은 누구나 가슴속에 사직서 하나는 품고 다닌다 했지만 내 가슴팍에는 명찰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사직서를 쓸 여유 따위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시간은 간다고, 거진 근무한 지 1년이 넘어갈 때쯤이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5시에 돌릴 약을 준비하고 있는데 창 너머로 들어오는 노을이 문득 서글프게 느껴졌다.


‘여기에 계속 있으면 나는 항상 내 주변을 슬프고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겠지. 이렇게 살다 간 몸이든, 마음이든 어디 한 군데가 고장 나서 나중에는 내가 환자로 병원에 누워 있을 수 있겠다.’


그날따라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진 모르겠지만 인생을 병원에서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매우 강하게 들었었다. 그래서 때려치웠다. 미련 없이 병원을 떠났다. 그쪽 방향으론 화장실도 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질려있었다.

물론 이직도 하지 않고 그만두었기에 다른 직장을 어떻게 구해야 할지 막막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일단 아무 생각 하지 않고 쉬고 싶었다. 우울함에 절여있는 내 마음을 달래주는 게 우선이라 생각했다.

그만두고 첫날은 내리 잠만 잤다. ‘그래, 이 정도면 잘 버텼어.’라는 자기 합리화도 곁들여서 말이다. 그렇게 삼일이 지나고 나니 한 가지 걸리는 얼굴이 있었다. 서울에 내로라하는 대학병원에 입사했을 때 친척들에게 자랑스럽게 얘기하던 엄마의 모습이 말이다. 그만뒀다는 메시지를 보고 고생했다고 덤덤히 얘기해 주는 엄마가 그렇게 눈에 밟힐 수가 없었다.


‘엄마, 지금까지 속만 썩여서 미안...’이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정말 많은 눈물을 쏟았다. 대학도 한 번에 붙고, 회사도 어렵지 않게 붙어 잘난 척 떠들어대고 다녔지만 결국 이것밖에 안 되는 놈이었구나. 성인이 되고 소리 내서 통곡한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런 생각을 스물다섯 살 때 했었다.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들은 과연 어떻게 생각하실지 궁금하다. 정말 인생의 패배자로 느껴지는가? 각자의 답은 다르겠지만 스무 살 중반에 내가 갈 수 있는 길은 무궁무진하게 많았다. 진부한 설교지만 학교에서는 좋은 대학, 좋은 회사를 가야 한다고만 알려줬지 정작 실패를 견딜 수 있는 힘에 대해서는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연습을 해보지 못한 나는 좌절감에 견디기 힘든 나날을 한동안 보냈었다.

삼십 대가 된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정말 잘 그만두었다는 생각이 든다. 억지로 힘들게 다녀봤자 아무도 알아주는 이는 없다. 이십 대 중반, 치기 어린 시절에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했던 나는 삼 개월 만에 새 직장으로 이직에 성공했고 9년 차가 될 때까지 잘 다니고 있다.


얼마 전 운동을 같이하는 친구들과의 단체 채팅방에서 ‘영어 유치원’에 대한 대화가 잠시 오고 갔다. 우리는 영어 유치원이고 자연 친화적이고 뭐고 그런 거 상관없이 잘 컸지 않냐는 소위 ‘라떼’ 이야기였다. 그중 친하게 지내던 언니가 내게 이런 질문을 했다. “지금이라도 영유 갈래?” 거기에 대한 내 대답은 바로 아래와 같았다.


“언니. 제 나이 때 늦은 건 영유밖에 없는데 다른 거 뭐 없을까요?”라고 말이다.


혹시나 주위에 시선을 너무 신경 써서, 혹은 인생의 실패자라고 낙인이 찍힐까 봐 두려워 회사를 그만두길 꺼려하는 독자분들이여. 백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너무 길고, 여생동안 맞지도 않는 지옥 같은 회사를 다니기엔 시간이 너무 아깝다. 그러니 세상을 살다가 너무 힘든 일을 마주하게 되면 그냥 돌아가는 선택지도 염두에 두자. 그렇게 해도 생각보다 세상은 제법 살아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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