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인다이닝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마다 다를 순 있지만 그래도 대부분은 ‘코스요리'를 먼저 떠올리지 않을까? 싶다. 물론 파인다이닝이라고 코스만 파는 것은 아니다. 코스로만 운영되는 곳들도 있지만, 또 많은 수의 레스토랑이 단품 메뉴를 갖추고 서비스하는 경우도 많다. 주로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의 파인다이닝 태동기에 오픈한 클래식한 매장이거나 혹은 그런 걸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경우는 단품을 유지하는 것 같다. 사람에 따라 같은 음식이라도 코스에 맞춰 먹는 것보다 단품을 여러개 시켜 구성하는 것을 좋아하는 경우도 있다.
나는 파인다이닝에 꽤 익숙해졌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어딜 갈까 선택할 때에 코스를 구성한 곳을 선택하는 것을 좋아한다. 상황에 따라 단품으로 에피타이저와 메인과 식사를 각각 선택하기도 하지만 나는 코스를 레스토랑이 무엇을 보여주고 싶어하는지가 드러나는 기승전결이 갖춰진 구성이라고 상상하고 코스를 맞이한다. 단품 메뉴 하나하나가 음악망송에서 만나는 무대 한 곡이라면, 코스는 가수가 직접 꾸린 콘서트같은 느낌이기 때문에 어떻게 전개될지 100% 통제할순 없는 흐름에 식사를 맡겨버리는 즐거움이다.
요식업계 출신의 어떤 유명인들은 “코스는 단품으로 자신의 취향을 주문할 수 없는 식견이 낮은 사람들을 위한 메뉴" 라던지, “재료 비용이 낮고 마진을 높일 수있게 구성된 보험추천상품 같은 메뉴" 라던지 하는 식으로 폄하나는 것도 보긴 했으나, 사실 나는 그렇게 귀기울여 듣지 않는다. 물론 파인다이닝 매장 중에서도 ‘최고의 식경험' 보다는, 구색상 갖춰야해서 만들어졌거나 장사가 유일한 목적인 곳들도 있을 것이다만, 그런 곳들은 스스로도 태생적 한계를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그렇듯 그럴싸하게 만들어 반짝 뜨는 것은 어디나 가능하지만, 지속은 내공과 본질에서 나오고 소비자들은 식견이 낮아도 귀신같이 가짜의 냄새를 맡기 때문이다. 소비자들이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나고, 그 경험의 연령대가 현저히 낮아진 지금은 말할 것도 없다. 20대 초반부터 각종 다이닝을 경험한 지금의 소비자들이 어떤 30대가 될지, 그리고 그걸 만족시키기 위해 어떤 다이닝 씬이 펼쳐질지 기대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처음 파인다이닝에 갈때 만만한 것은 아무래도 런치 코스다. 이것도 매장에 따라 다르지만, 처음 가볼만하다 라고 느끼는 식당이라면 주로 3-4코스로 구성된 가벼운 런치 코스를 가지고 있을 확률이 크다. 프랑스 여행을 가면 대부분의 비스트로에서 30-40유로대에 3코스로 구성된 런치를 판매하는데 이를 ‘프리픽스'라고 부른다. 에피타이저-메인-디저트로 구성된 코스고 각각의 코스당 3-4개의 선택메뉴를 가지고 있다. 에피타이저는 양파 수프로, 메인은 연어 스테이크로, 디저트는 크림 브륄레로 주세요- 하고 시키는 그런 메뉴다. 4코스인 경우에는 에피타이저가 콜드 디쉬, 핫 디쉬로 두번 나온다던지 혹은 에피타이저와 메인 사이에 그 어중간한 무게감으로 파스타 같은 메뉴가 추가될 때가 많다. 혹은 디저트를 원하지 않는 경우에 에피타이저에서 2개, 메인 1개, 혹은 메인 1개에 디저트 2개 같은 식으로 구성이 되는 것도 허용된다. 한국에서는 청담동에 있는 클래식한 프렌치 레스토랑 ‘레스뿌아 뒤 이부'에서 런치를 이런 식으로 판매하고 있다.
저녁의 경우 매장마다 코스가 천차 만별이지만, 사실 구성은 애피타이저 - 메인 - 디저트일 뿐이다. 애피타이저에 해당하는 음식이 몇종류 나오는지, 메인에 해당하는 음식이 몇종류 나오는지, 식사를 마치고 마무리를 향해가는데 몇 단계가 걸리는지의 차이일 뿐이다. 요새는 다이닝의 국적이라든가 하는 것이 전보다 덜 중요해지기도 하고, 한상차림을 하는 한식같은 경우도 코스로 변주를 하다보니 전통 프랑스 정찬의 코스 순서 같은 것은 그리 중요하지는 않고, 레스토랑에서도 그걸 주요한 기준으로 삼지는 않는 것 같다. 하물며 보통은 코스로 치지 않는 식전빵 같은 것도 코스에 포함되어있는 파인다이닝도 있으니 우선 ‘아 메뉴를 세로로 썼구나~!’ 하는 마음으로 시작해보면 좋겠다.
조금 격식(!)을 차리는 식당이다 싶으면 (여기서 격식은 인간이 차리는 것이 아니라 음식이 차리는 격식을 의미함) 처음에 ‘아뮤즈부쉬' 혹은 ‘웰컴 디쉬' 라고 불리는 작고 귀여운 음식들이 도착한다. 예쁘고 작고, 정말 음식같지 않아서 도대체 이걸 먹으라고 준건지- 하는 생각이 든다는 사람들도 많다. 아뮤즈 부쉬의 아뮤즈는 우리가 알고 있는 영어단어 어뮤즈먼트-와 같은 뜻이다. 즐거운 한입거리라고 생각하면 된다. 원래 이 아뮤즈 부쉬는 ‘메뉴 고르시는 동안 샴페인한잔 하면서 천천히 입맛 돋구세요' 하는 용도의 음식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원래는!! 메뉴에도 안써있는 음식인거다. 길고 긴 프렌치 정찬에서는 음식과 와인을 고르는데도 오랜 시간이 걸리고, 서로 너는 뭐먹을건지, 어떤 와인이 맛있었는지, 이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메뉴를 고를테니까. 파리에서는 처음에 메뉴 주기전에 샴페인 카트가 먼저 도착하기도 했었다.
한국에서는 식사 전 대기하며 샴페인을 마시고, 메뉴를 천천히 고르는 과정이 생략되어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사실 아뮤즈부쉬는 코스의 시작을 알리는 역할을 한다. 작고 하찮아보이는 귀여운 음식이지만, 앞으로의 음식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기 위해서 좋은 임팩트를 남기거나, 혹은 셰프가 “나 이런 사람이야" 라고 자기소개를 하는 음식이기 때문에 방향성을 담아 만드는 경우가 많아서 파인다이닝을 즐기는 많은 사람들이 아뮤즈부쉬에서 느껴지는 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사실 생각하기 전에 입에서 없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국의 파인다이닝에서 내가 느낀 점은 아뮤즈부쉬가 굉장히 화려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무래도 정식 코스의 첫 인상으로 시작하는 거니 어쩔 수 없겠지만, 작게는 3가지, 많게는 막 9가지 종류의 음식이 각기 다른 플레이트에 드라이아이스 같은 특수효과까지 곁들여 ‘우와!’ 하는 탄성을 자아낸다. 또 이런 맛에 파인다이닝에 가기도 하니까.
애피타이저라고 내가 부르고 있는 이 단계는 본식 전에 나오는 모든 메뉴를 가리킨다. 그 형태는 정말 천차만별이라 일일이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본식이 메인 디쉬 1개, 혹은 2개로 (생선-육류) 구성되니 그 전에 나오는 메뉴들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차가운 샐러드 같은 것들이 나오기도 하고, 따뜻하게 익힌 야채와 퓌레, 해산물등을 활용하기도 한다. 수프도 이 단계에 들어간다. 경양식집에선 수프로 음식이 시작되었던 것 같은데 생각 외로 파인다이닝에서 수프는 첫번째 음식이 아니다. “톡톡" 이라는 곳에선, 이 코스 중 하나로 타코가 나오기도 한다. 이처럼 코스에서 창의력이나 신선함, 의외성 같은 것들을 자랑하는 음식들이 애피타이저에 구성되어있다. 그래서 나의 경우엔 메인에서 나오는 요리는 사실 상 다 비슷한 것 같이 느껴져서 코스를 고를 때 이 애피타이저에 해당하는 음식이 많이 나오는 곳을 선호한다. 새로운 경험은 주로 이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듯 하다.
그리고 나면 메인단계로 넘어간다. 애피타이저에서 이것 저것 음식을 먹고 메인으로 넘어가다보니 중간에 ‘클렌저'라고 불리는 순서를 넣는 곳도 있고 안넣는 곳도 있다. 보통 클렌저로는 입가심용 쥬스나 셔벗 같은 것이 나온다. 그러고 나면 각자 선택한 메뉴로 메인이 제공된다. 애피타이저가 창의력 쑥쑥 웅진 씽크빅같은 느낌이라면, 메인은 내가 창의력만 있는게 아니라 얼마나 실력있는 사람인지 보여주는 단계가 아닐까 싶다. 별다른 기교보다 묵직하게 메인 하나로 승부해야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나는 육류를 즐기지 않기 때문에 메인을 선택할 땐 가니쉬(메인 옆에 곁들이는 야채 등의 요리)나 소스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먼저 확인하고 그걸 기준으로 더 먹고 싶은 것을 선택하는 편이다. 때로는 가니쉬가 거의 메인보다도 더 정성스럽게 만들어져있는 경우도 많다.
식사가 끝나고 나면 테이블을 한번 정리해준다. 다 먹은 잔도 싹 치우고, 빵접시와 버터도 가져가고, 식사중이었던 그릇들도 당연히 한번 싹 치워준다. 이제 마무리를 향한 시간이에요~! 하는 알림처럼. 디저트의 경우 많으면 2 코스로 구성되어있는 듯 하다. 물론 그 사이에 프렌치 식당같은 경우에는 메인과 디저트 사이에 ‘프로마쥬'라고 치즈를 내어주는 코스가 있기도 하다. 식사를 하고 남은 와인, 빵과 함께 치즈를 먹으며 식사를 마무리하는 과정이다. 사실 나는 디저트도 그렇게 즐기는 편은 아니긴 한데, 디저트가 또 파인다이닝에서는 창의력 뽐내기 대회같은 느낌이 들어서 화이트아스파라거스 라던지, 마늘, 버섯, 허브 등 디저트재료라기엔 생소한 것들을 활용해 만든 디저트를 맛보는 재미가 있다. 또 우리가 알고있는 디저트는 주로 서양의 디저트이다보니 한식 파인다이닝에서는 한국의 디저트가 이렇게 다양했던가? 하는 사실에 놀랍기도 하다.
한국의 코스는 이 디저트 단계가 되어서 커피 혹은 차를 제공받는 것이 마치 당연하게 인지되고 있지만, 사실 코스 요리에는 차나 커피가 포함되어있지 않는 것이 기본값이다. 얼마짜리 코스를 먹든 그렇다. 50만원짜릴 먹어도, 커피값 5천원을 꼭~ 받는 정없는 문화다. 그렇다보니 한국에서도 코스에 커피나 차가 포함되지 않으면 그에 대한 안좋은 리뷰를 받는 식당들도 많은 것 같다. 디저트엔 선호에 따라 디저트 와인을 곁들이며 디저트코스까지 정해진 순서를 다 마치고, 그 이후에 커피나 차를 선택하는 순서가 있다. 나는 이 마지막 차나 커피의 선택지를 얼마나 다양하고 배려심 넘치게 준비하는지에서 레스토랑의 경험이 크게 갈리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즐거운 식사를 해놓고도, 마지막에 망쳐버리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요새는 굳이 한식 다이닝이 아니더라도, 감초나 돼지감자, 작두콩 등 한국의 차 재료를 블랜딩해서 레스토랑만의 차를 제공하는 곳도 많아진 것 같다. 홍차나 허브티 등도 다양하게 준비되어있는 곳이 대부분이다.
차를 내어주면서 마지막으로 초콜렛, 젤리, 캬라멜, 미니 마들렌같은 마지막 다과가 함께 나온다. 이걸 쁘티푸르라고 부르는데, 어떤 레스토랑에서는 별도로 이 쁘티푸르를 작게 포장해서 기념품 형식의 선물로 주기도 한다. 이 유행은 좀 지나간 듯 하여 아쉽지만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갈 때 작은 선물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게 꽤 기분이 좋고, 집에 가는 길에도 가서도 식사의 여운이 길어져 감정이 오래간다고나 할까? 작은 빵이나 디저트를 선물해주는 곳도 있고, 요리에 사용된 소스나 특정 조미료를 약간 담아서 주는 경우도 있고, 셰프가 직접 쓰거나 그린 메뉴와 관련된 글, 그림을 선물로 받기도 한다.
적으면 3코스, 많으면 막 15코스 혹은 그 이상 가는 길고 긴 .. 코스의 세계. 하지만 따지고 보면 모두 3코스라는 사실을 생각하며 맛이 주는 기승전결을 즐겨보는 것, 익숙해지고 나면 연극을 보듯 즐거운 취미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