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한 분야에 정통한 전문가를 보면, 혹은 직업으로 하지 않더라도 한 분야에 대한 자신의 확고한 기준과 가치관을 가진 매니아나 덕후를 보면 멋지고 부럽다. 나의 경우 관심분야는 다양하나 하나를 진득하게 파고 들어간 것은 중-고등학교때의 덕질 이후로 전무하다. 그나마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주제인 먹기… 정도랄까? 하지만 이 마저도 내가 덕후라고 이야기할만큼의 깊이를 가지고 있지는 못하다. 사람마다 하나에 진득하게 빠지는 이유 혹은 빠지지 못하는 이유는 다양할 것이다. 나는 하나만 좋아하기엔 좋아하는 것이 너무 많아 못하는 축에 속한다. (동지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파인다이닝은 내게 여러가지 분야에 대한 관심을 동시에 키워주는 좋은 취미라고 할 수 있다.
요리를 구성하는 것은 요리사의 노하우가 담긴 조리법과 좋은 재료들일 것이다. 좋은 식사를 구성하는 것은 좋은 요리와 좋은 분위기, 식사를 준비하는 사람과 식사하는 사람 사이의 존중과 편안함같은 것이 포함될 거고. 이번 글에선 여기에 어릴땐 미처 알지 못했던 식당에 대한 하드웨어적인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식당의 인테리어나 그릇, 기물 등을. 물론 여기서 먼저 해명을 하고 넘어가자면, 좋은 식당이 럭셔리한 인테리어를 가진 식당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좋은 식당은 스스로에게 떳떳하고 거짓말하지 않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계속 식사를 하다보니, 좋은 식사 경험엔 좋은 그릇을 쓰는 것도 꽤나 비중있는 중요한 요소로 들어간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없어진 아라리오 갤러리 건물의 한식 레스토랑 <한식공간>에 갔을 때를 기점으로 내게 파인다이닝에서 만나는 그릇이 조금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 한식공간은 셰프들의 셰프라고 불리는 조희숙 셰프님이 꾸리시던 곳으로 창덕궁의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멋진 공간에서 제대로 만들어 정갈하게 담아낸 한식을 맛볼 수 있던 곳이다. 이곳의 음식은 모두 우리가 알던 맛의 음식이라는 점이 매력포인트다. 나의 경우 파인다이닝까지 갔으면 완전히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어하는데 반해, 함께 갔던 동행인은 알고 있는 맛의 깊이가 더해지는 것을 좋아하는 타입이었다. 나는 혹시나 동행인이 뻔한 음식을 더 비싸게 먹은 것에 대해 불편하게 생각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을 했는데, 오히려 동행인은 값어치를 하는 갈치구이였다! 하며 엄지를 척 들어올렸고, 역시 맛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 마음으로 조마조마하게 식사를 마치니 디저트 시간이 돌아왔다. 파인다이닝에서는 식당의 컨셉에 따라, 코스나 가격대에 따라 디저트의 구성이 조금씩 바뀌는데 디저트만 3번에 걸쳐 나오는 곳들도 있다. 보통 첫번째 디저트는 산뜻한 셔벗이나 과일을 이용해서, 마무리의 디저트는 묵직하고 달콤하게 식사를 끝내주는 느낌으로. 그리고 그 이후의 마지막은 주로 정식 코스엔 들어가지 않는 작은 다과와 차로 구성되어있고 이걸 프랑스에서는 쁘티푸르라고 부르며 초콜릿, 사탕, 차 같은걸 함께 내어주는 듯 하다. 한식공간에서도 과일을 사용해서 만든 메인디저트가 나온 후에, 차와 함께 귀여운 찬합이 나왔다.
보통 그릇은 유리거나 도자기가 익숙한데, 나무같기도 하고 플라스틱같기도 한 질감, 아름다운 빛깔로 층층이 쌓은 두개의 손바닥만한 찬합 안에는 약과, 도라지 정과, 카라멜 같은 귀여운 한입거리들이 놓여있었다. 식당에 가면 그릇 뒤집어보는 종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나도 조금씩 그런 것을 궁금해하는 시기였다. 하지만 이 찬합에서는 어떤 힌트도 찾을 수 없었다. 머리를 쥐어 짜본 결과 이 소재는 ‘칠기' 라는 것 까지는 알아냈다. 초록창을 켜고, 혹은 인스타그램을 켜고 칠기 찬합, 나전 칠기 도시락, 칠기 합 등 별의별 검색 키워드를 입력해보았지만 폐백때 쓰는 자개 찬합이 나올뿐, 이렇게 귀엽고 깜찍하고 모던한 찬합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결코 같은 디자인은 아니지만 그나마 가장 비슷해보이는 그릇을 올려둔 분을 통해 어떤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분은 한식 파인다이닝 매장이 새로 오픈하거나 혹은 리뉴얼 할 때, 셰프의 음식과 방향성에 맞추어 레스토랑의 모든 기물을 담당하시는 분인듯 했다. 어떤 식당이 문을 열때 인테리어나 기타 비쥬얼적인 부분을 총체적으로 담당하는 일을 맡는 사람과 회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도, 그동안 그릇에 대해서는 그렇게 눈여겨보거나 전문적으로 생각해본 일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촌스러울 수 있지만 내가 한가지 정말 놀라웠던 것은 어떤 레스토랑이 오픈할 때, 도자기나 칠기나 유리 등 그릇을 만드는 장인들에게 직접 그 레스토랑만을 위한 그릇 제작을 요청하여 만들어지는 시스템이었다. 이미 시장에 나와있는 기성 제품들을 사서 구매하는 것만 생각했기 때문에 그릇을 어떻게 들이는지에 대한 고민을 전혀 하지 않았던 것이다. 좋은 그릇은 좋은 브랜드에서 만든 비싼 그릇이라고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당히 많은 매장에서 자신들이 꾸리고자 하는 다이닝의 방향성과 작가의 작업방향 및 스타일을 고려해 특정 음식 혹은 코스를 위한 식기를 주문제작하고 그를 통해 작가의 또 다른 작품이 탄생한다는 것. 다시 한번 되새겨봐도 정말 놀랍다.
그 계정을 통해서는 주로 작가님들의 작품이 소개된다. 그리고 그런 공예품, 실용성을 가지고 있는 작품들을 실제로 생활 속에서 사용하는 모습들도 비춰진다. 작가님들과의 미팅 후기나, 근황같은 것도 종종 올라온다. 그 계정을 살펴보며 내게는 파인다이닝에 가는 새로운 즐거움이 하나 추가되었다. 나는 아주 마음먹어야 가질 수 있는 어떤 그릇을 직접 사용해보는 기쁨이다. 어떤 작가의 스타일을 좋아하고, 그 작가의 작업을 응원하더라도 그 작가의 작품을 갖거나 사용해보는 경험은 갖기 어렵기 마련이다. 파인다이닝을 다니면서 음식에 대한 경험치만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공예 등에 대한 미감을 얻게 되고, 사용경험을 갖게 되고 그 과정에서 내가 정말 좋게 느꼈던 사물들의 특징을 생각해보며 나의 취향이 더 섬세하고 단단하게 다듬어져간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나 기성품이 넘쳐나고, 특히나 저렴하게 제조된 가성비 상품 때로는 이미테이션까지 넘쳐나서 혼수를 다이소해서 했다는 인증글도 올라오는 시대에 도대체 공예작가들은 어떤 마음으로 뭔가를 만들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종종 하는데, 파인다이닝을 다니면서 그런 생각도 조금 바뀌었다. 우리가 일상을 공예품으로 잔뜩 채울 필요는 없다. 개개인의 부족함이나 잘못도 아닐 뿐더러 어떻게 생각하면 합리적이거나 실용적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하지만 인생이라는 것이 효율성과 실용만으로 꾹꾹 눌러담겨져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도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해야하는 한줌의 아름다움 같은 것들이 이런 생태계 안에서 지속가능성을 찾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파인다이닝이 가지고 있는 매개자로서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게 느껴졌고, 그런 역할을 더 잘할 수 있는 장소가 되길 바라는 마음도 생겨버렸다.
생활비와 용돈을 아껴 파인다이닝을 가는 주제에 무슨 남의 먹고사니즘을 걱정하나, 이런 생각도 들지만 내가 아직 철이 들지 않은 것인지 나는 내 인생을 더 아름답고 풍요롭게 하는 것들을 놓고 싶지가 않다. 그래서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사람들, 그걸 향유하고 지키는 사람들을 주제넘게 응원하게 되는 것이다. 공예작가님들 엄청 잘 살고 계시고 이미 서울에 지방에 집한채씩 갖고 자식들도 다 한채씩 해주신 짱부자이실 가능성 높고 나는 내년엔 서울에 살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람이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효율이 아니라, 심미안을 따지는 세계가 한편으로 지속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그럴라면 아무래도 가진 자들이 더 공부하고 더 노력해야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동시에 한다.
미술관을 짓고 작가를 후원하면서, 사회의 문화적 수준을 높이는 여러 퍼블릭한 공간들을 만드는 일도 포함되지만 요새의 젊은 부자들에겐 파인다이닝 매장을 내는 것이 또 하나의 활동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생각해보면 파인다이닝은 자신의 재력과 경험치와 수준, 완성도 높은 안목을 동시에 과시할 수 있는 좋은 그릇이기도 하니까. 그러니까 그런 취미생활 많이많이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