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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ssorim Mar 06. 2016

우리 모두는 제자리를 찾는 중이야.

_멜버른, 홀로 맴돌던 너와 나.


해가 뜨겁게 내리쬐는 날이었다. 나는 이미 새까맣게 그을린 온 어깨를 드러내는 옷을 입었었다. 그만큼 뜨겁던 날로 기억한다. 나는 멜버른의 도심인 시티에 있었고 '로니'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실은 그녀는 나의 친구는 아니다. 우리는 그저 어느 파티에서 한번 만난 사이였을 뿐이다. 그 밤 그 파티에서의 그녀는 짧은 숏컷 머리에 푸르른 청 자켓을 걸치고 있었다.


여느 파티에서의 화장실 문 장식.


_

로니와 나는 가이의 하우스 파티에서 만났다.


'가이'는 영어로 남자라는 뜻이다. 그리고 또 하나, 그저 보통의 영어권 남자 이름이다. 마돈나의 전 남편 이름이 가이 리치였던가. 이따금 마주하는 그 이름을 들으면 껑충 커다란 키에 머리부터 양말까지 빈틈없이 까만 옷을 걸치고 발에는 까만 닥터 마틴 워커를 신은 멜버른에서의 '가이'가 떠오른다. 그 '남자'라는 이름의 가이는 자신의 정든 집을 뒤로 하고 내가 살고 있던 집으로 이사를 오는 그 무렵에, 그 오래된 정든, 커다란 레몬이 주렁주렁 열리는 레몬 나무를 가진 그의 옛 집에서 일명 '하우스 파티'라는 것을 열었다.



가이의 집에 주렁주렁하던 레몬과 나의 집에 주렁주렁하던 무화과로 만든 머핀.


실은 나는 그와 그리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그는 나의 하우스메이트의 오랜 동료이자 나와 함께 일을 하던 동료들의 오랜 친구이자 곧 나와 함께 살게 될 '곧 하우스메이트'였다. 그저 그뿐이었다. 나는 멜버른에서 단 일 년간의 워킹 홀리데이를 가지고 있었고, 그 일 년은 어느새 거의 다 저물어 있었다. 내향적인 내가 온 평생에 쓸 만큼의 외향을 끌어 모아 그곳의 그 모든 사람들과 동료보다는 가까운 것이 되었으나 진정한 친구라기엔 무언의 벽이 존재했다. 나와 우리의 사이엔.


그렇기에 가이의 하우스파티에 간다는 것은 내게는 어찌 보면 약간의 부담 어린 결단이었다. 어찌 보면 그저 가서 마시고 음악을 듣고 즐기면 될 뿐인 것을. 그러나 나에게는 그렇지만은 않았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그 일 년의 시간이 그저 한때의 즐거움이 아니라 오래 두고 빛이 나는 별이기를 바랐다. 그리고 남아있을 사람들에게도 내가 이따금씩 하얗게 반짝이기를 바랐다. 그런 나의 욕심이 하얗게 번쩍일수록 나의 마음은 하얗게 바스러져 갔다. 나의 마음 속 내가 그려둔 완벽한 얼음 조각상은 여전히 견고했지만 어느 한구석이 조금씩 바스러져 가고 있던 것이다. 투명하게 맑던 얼음도 작은 스크래치 하나면 뿌옇게 흐려지곤 하듯이.


떠날 즈음의 정든 동네의 어스름 낀 하늘과 가느다란 초승달.


나는 어느 컴컴한 피츠로이 노스 지역의 거리를 걸어, 십오 분 남짓을 걸어, 오분 즈음을 헤매 가이라는 남자의 집을 찾았다. 반짝이는 조명들이 반짝이는 사람들을 반겼다. 가이는 밴드를 하는 사람이었다. 그와 그의 친구들과 그리고 나의 하우스메이트가 공연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렇게 그의 집에는 이미 온 동네를 매울 만큼의 커다란 음악 소리가 가득했다.


공연의 한 구석. 그밤의 음악.


나는 부엌 한 켠에 기대어 가방에서 체코 흑맥주 병을 꺼내 들었다.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를 흥미롭게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여전히 '너는 무엇을 하고 있니'라는 질문에는, 그러나, 나의 대답은 약간의 망설임과 얼버무림 뿐이었다. 나의 친구이자 동료들은 그런 나의 당황을 가만히 덮어 대신 답을 해주곤 했다.


멜버른에서의 일 년 동안 나는 언제나 생각했다. 내 이름 앞에 달 아주 반짝 반짝이는 명찰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주  반짝반짝 빛이 나서 누구나 눈이 부셔할 그런 멋진 타이틀을 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나는 언제나 바랐고 여전히 나의 이름 앞은 투명한 공석으로 남았다. 그러했다.


우리 집에서 열렸던 새해 전야 파티의 전경. 창에 비친 노을에 섞여든 사람들의 그림자가 아름다웠다.


그렇게 한 데 뒤섞인 듯 나는 한 발자국 즈음 붕 떠 있었다. 뉴욕에서 왔다는 작가와 환경 단체에서 일한다는 맨발의 히피스러운 커플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그 어색한 어깨들 너머에서 나와 같이 조금 붕 떠 있는 커다란 두 눈동자를 발견했다. 톰보이 같은 짧은 숏컷의 금발 머리에 빛바랜 푸른 청자켓, 그리고 그와 같은 푸르른 밑단을 두 번쯤 돌려 만 청바지에 갈색 워커를 신은 '로니'였다. 그의 두 눈동자는 마찬가지로 섞여들지 못하고 있던 나의 눈동자를 알아보았다. 우리는 그렇게 첫눈에 서로의 정체를 알아보았고 각자 공연을 보다가도 이따금 서로에게 한 마디씩을 건넸다. 닮은 우리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파티를 연 '가이'의 공연 순서는 맨 마지막이었다. 나는 안타깝게도 그의 공연은 볼 수가 없었다. 우연히도 걸어서 삼분 거리에 살고 있음을 알게 된 이웃사촌 '로니'가 이제 집에 가야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미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고 나는 오는 길에 걸었던 그 캄캄한 십오 분 남짓의 밤거리를 홀로 걸을 자신이 없었다. 같은 동네에 사는 다른 친구는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자리를 뜰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처음 만난 로니를 선뜻 따라나섰다. 그녀는 자전거를 끌고 나왔지만 상관없다는 손짓을 하며 내가 함께 간다면 자전거를 그냥 끌고 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밤의 거리는 아마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나의 멜버른이 저물어가던 그 칠흑과도 같이 캄캄하던 밤. 이따금 주홍빛의 가로등 불빛이 거리에 흐드러졌다. 그리고 그 캄캄한 밤하늘에는 밝은 많은 남반구의 별들이 총총히 박혀 있었다. 그런 그 밤의 밤거리를, 처음 만난 이웃사촌인 로니와 나는 걸었다. 그녀의 청바지는 성큼성큼 걸을 때마다 들썩였고 나의 워커는 이따금 삐걱 소리를 냈다. 우리는 서로의 얕은 이야기들을 가만히 꺼내 어색한 밤공기를 매웠다.


나의 일 년이 저물던 그즈음 로니 역시 멜버른에 도착한지 일 년 즈음이 되었다고 말했다. 물론 그녀는 호주 사람이었다. 고향은 멜버른이 아니었고 미래를 위해 멜버른에 왔다고 말했다. 그녀는 멋진 여성이었다. 어쩌면 내가 늘 동경했던 그런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호주에서 나고 자란 호주인이었고 하얀 피부에 옅은 갈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영어는 그녀의 모국어였으며 그녀는 소규모 개인 출판을 할 정도로 그에 출중했다. 그녀가 그 파티에 섞여들지 못했던 것은 정말로 딱  한 명의 친구만이 그 파티에 있었기 때문이었고 하필 딱 그 한 명의 친구가 공연을 하기 위해 내내 무대에 올라앉아 있었기에 그녀가 혼자였던 것이다. 그녀는 홀로였지만 스스로 홀로이기를 선택한 것으로 보였다. 그녀의 옅은 커다란 갈색 눈동자가 붕 떠있기는 했으나 흔들리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총총히 박힌 별들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 로니가 말했다. 나와 같이 멜버른에서 이제 막 일 년 즈음을 보낸 멋진 로니가 말했다.


"나는 내가 어디쯤 있는지 전혀 모르겠어. 아직은 여전히 어디에 속할지 나의 자리를 찾고 있는 중이야."


그 말에 나의 짙은 갈색 눈동자는 커다랗고 더욱 짙어졌다. 아, 나는 내 스스로에게 얼마나 더 많은 것을 기대했는가! 그 오직 일 년의 시간에 마치 십년지기와도 같이 그곳의 모든 사람들과 얼마나 가까운 사람이 되기를 욕심냈었는가! 내가 파티에 섞여들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저 뿌옇게 흐려졌던 나의 마음이 언제든 닿을 수 있는 그곳을 볼 수 없게 했음을.

_



금발 숏컷 머리에 톰보이 청자켓을 입은, 오 나의 멋지던 그녀 로니. 어쩌면 내가 늘 동경했던 그런 모습이었는지도 모를 그녀의 일 년 즈음의 타이틀도, 나와 같이 아직은 투명하게 비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아직은 그저 그렇게 두어도 괜찮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는 제자리를 찾는 중이었다.


나는 그렇게 조급하거나 가라앉을 필요 없이 나의 자리를 나의 속도로 찾아가는 중이었다.


그 별이 총총하던 밤 우리는 우리들의 교차로에서 안녕을 말했고 그녀는 다음날 멜버른 시티에서 소규모 출판자들이 여는 페스티벌이 있다는 말을, 자신이 참여한다는 말을 내게 덧붙였다. 그래서 그 뜨겁던 날, 나는 집을 일찍 나서 그곳으로 향했다. 나는 '로니'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나의 멜버른이 저물어 가던  그즈음, 비록 단 하룻밤의 짧은 대화였지만 내가 그녀를 만나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녀의 그 별처럼 총총하던 한마디는 나의 모든 짐덩이들을 내려주었고 나는 그 뜨겁던 하늘을 포근하다 믿을 수 있었다.


.

나는 '나 자신'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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