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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ssorim Mar 15. 2016

여행이란, 끝없는 해프닝의 연속. #3

_파리, 몽마르뜨에서 치통을 외치다.


작년 4월 3일, 눈부시게 파란 하늘이 걸린 그림 같은 몽마르뜨 언덕에 앉은 나는 거리의 음악가의 하프 소리를 듣고 있었다. 내 오른쪽 팔목에는 이미 으레 몽마르뜨에서 강매당한다던 노랑, 연두, 빨강 실들로 엮어진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이른 아침까지 내리던 비가 운좋게 그치었다. 비 갠 후의 몽마르뜨의 파란 하늘과 아멜리에의 회전목마.


그 눈부신 몽마르뜨 언덕에서 파리의 풍경을 내려다보며 나는 잠시 후 한시에 있을 나의 '파리에서의 치과 약속'을 기다리고 있었다.


파리로 여행 가서 치과 약속이라니 무슨 소리냐고?



_파리의 치과 소동.


나의 왼쪽 첫 번째 어금니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무려 일 년도 넘게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급하게 받은 스케일링에 나의 왼쪽 첫 번째 어금니는 그 끝이 깨져버렸고 곧 있을 호주 출국을 위해 급하게 하얀 아말감?으로 때운 후였다. 치료 다음날, 나는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받아놓은 호주로 떠났고 육 개월 후 그 때운 자리가 떨어져 나가 버렸을 때에는 다시 치과에 갈 수 없었다. 호주에서의 어마어마할 치과 진료비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찌 되든 나름대로 깨끗하게 유지해오던 치아가 마침내, 하필이면 여행지에서 말썽을 부리고 만 것이었다. 전편에 등장했던 베를린에서의 제이미 올리버를 닮은 영국인 샘과 함께 피자를 먹고 난 저녁부터 통증은 시작되었었다. 파리에 도착하고 나서 진통제를 사 먹었지만 점점 심해지는 그 통증에 나는 눈부신 파리의 전경을 내려볼 수 있던 4월 3일의 몽마르뜨 언덕에서, 결국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파오는 왼쪽 눈과 귀와 턱을 부여잡고.


하필이면 진료비가 소름 끼치게 비쌀 듯한 유럽이었다. 하필이면 미리 치과 예약을 잡지 않으면 의사 얼굴을 볼 수 조차 없다는 파리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곳은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 프랑스였다!



약국을 전전하다 진통제와 입안 살균 용액을 구매했다. 감염이 된 것 같았으나 항생제는 의사 처방이 없으면 받을 수 없다고 했다. 억울한 마음에 진통제를 삼키고 에펠탑, 퐁퓌드에 향했고 삼 년 전 즐거운 파리 여행의 추억을 쌓았던 몽마르뜨 근처 Anvers 역으로 향했다. 그 좋았던 기억들이 내가 파리를 다시 찾게 하였지만 지금까지의 두 번째 파리는 힘에 부쳤다. 진통제를 잘못 삼켜 목구멍에 타는 듯 불이 났고 친절해 보이는 파리지앵 아주머니가 바로 내 앞에서 생수병을 들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도저히 물을 한 모금만 달라는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지쳤던 나는 혹시 모를 거절이 두려웠던 것이다. 지하철에서 불이 나게 뛰어나와 근처 피시 앤 칩스 가게에서 값비싼 유럽의 물을 사서 타는 목에 들이부었다. 이미 약이 목에서 다 녹아버리고 난 후였다.


그때가 밤 열 시쯤이었고 나는 퐁퓌드 광장 근처에서 먹은 퍽퍽한 참치 샌드위치를 점심으로 먹은 뒤에 아무것도 먹지 않은 상태였다.


지겨운 나의 치과 약 컬렉션. 대부분 파리에서 서울까지 날아와 있다.



2호선 Anvers 역 근처의 앵버 스퀘어 근처를 서성였다. 삼 년 전 함께 여행을 왔던 동생과 정답게 파스타를 먹었던, 상냥한 웨이트리스가 있던 이탈리안 식당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 레스토랑의 불빛은 오래전 우리들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포근하고 아늑하게 빛났다. 즐겁게 늦은 저녁식사를 하는 파리지앵들의 웃음소리를 지나, 역시나 우리가 한 번쯤 들렀던 블랑제리 너머의 좁은 파리의 골목을 떠돌았다. 배가 약간은 출출하던 참이었다. 자연스레 따스한 불빛을 뿜어내던 아담한 골목의 비스트로(작은 식당) 창가로 발길이 향했다. 유리창에는 커다랗게 가장 저렴한 코스가 단돈 11유로라는 말이 적혀있었다.


띠링.

갑자기 자그만 식당의 자그만 유리문이 열렸고 쌀쌀한 이른 봄 늦은 열 시의 컴컴한 거리로 따스한 누군가가 나왔다. 금발 머리에 선한 눈을 가진 약간 매부리코의 하얀 남자가 지친 내 옆에 서더니 상냥한 목소리로 메뉴에 적힌 모든 옵션들에 대한 설명을 했다. 허기가 졌지만 먹을 의욕은 없던 나였다. 그러나 그는 나에게 일이 분 동안 너무 정성을 다해 메뉴를 설명했다. '이런 그냥 갈 수도 없게 됐잖아'라는 나의 마음속 목소리가 난처함을 알렸고 매정하지 못했던 나는 그 노란 머리의 남자를 따라 비스트로에 들어섰다.



나는 채식주의자를 위한 코스 요리를 먹었다. 샐러드를 곁들인 키쉬 한 조각과 토마토소스의 라자냐, 그리고 아주 진한 초콜릿 케이크로 이루어진 코스였다. 한껏 신이 나서 코스에 포함된 화이트 와인 한잔을 받았지만 문득 약을 먹어야 함을 깨달았다. 웨이터를 다시 불렀다. 미안하다는 사과를 했다. 그리곤 그 와인잔을 마음 아프지만 치워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전혀 짜증 나는 기색 없이 친절하게 나를 응대했고 단 이틀간의 의사소통의 부재로 인한 답답함에 목말랐던 내게 그의 어느 정도 수준의 영어 실력은 눈물 나게 반가운 것이었다.


프랑스식 계란 파이인 키쉬를 먹을 때쯤의 나는 기운을 차렸다. 그리고 다시 한번 사람을, 친절의 힘을 믿어보기로 했다. 뜬금없는 질문을 웨이터에게 건넸다.


 "파리에선 치과 치료비가 어느 정도 해?"

참으로 뜬금없던 나의 질문에도 때에 따라 다르나 간단한 진료는 25유로쯤 한다는 친절한 답변이 날아왔다. 그렇게 지친 내게 날아든 그의 친절은 너무도 달콤한 곳이었으므로 나는 조금 더 보따리를 풀었고 그에게 아는 치과가 있느냐 물었다. 그래서 결국은 어떻게 되었냐고? 나는 바로 그 다음날 치과에 갈 수 있게 되었다. 그 상냥한 웨이터가 일하던 바로 그 아담한 비스트로의 사모님이 '바로 내일 아침' 한 블록 떨어진 치과에 갈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파리를 단 닷새간 스쳐가는 초라한 병약한 여행자는 운이 좋게도 그 사모님의 치과 예약에 동행할 수 있게 되었다! 아주 친절한 웨이터는 내가 혹시 잊을까 비스트로의 이름과 주소를 적어주었고 약속 시간도 크게 적어 내게 하얀 파랑새와 같은 쪽지를 건넸다.


이 얼마나 큰 인연과 우연과 행운의 힘인가!


여전히 내 노트에 남아있는 그가 그려준 약도와 레스토랑 주소.


_

그러나 역시나 파리는 내게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만난 비스트로의 사모님은 친절했다. 그녀는 스리랑카에서 온 이민자였다. 그 스리랑카라는 나라는 두고 온 익숙한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었다. 알고 보니 그녀의 꼬마 딸의 진료 예약이었다. 그녀의 딸은 매우 귀여운 꼬마 숙녀였다. 그를 바라보던 그녀는 때때로 프랑스어를 완벽히 구사하지 못하는 자신은 그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존재와 제대로 의사소통을 하지 못한다며 그녀의 슬픔을 말했다. 의사소통! 그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나는 다시금 생각했다.


그렇게 즐거운 수다를 가지며 치과 진료를 끝냈지만 파리의 치과 의사는 의문스럽게도 한마디의 영어도 하지 못했고 분명한 감염으로 부어오른 내 잇몸을 그저 또 다른 하얀 아말감으로 메워 버리는 것으로 그날의 치과 치료를 끝냈다. 구멍을 매운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근본적인 나의 고통의 원인은 그 안에 계속 남았다. 호스텔에 돌아온 나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단 닷새간의 파리를 즐기지 못하는 것이 서러웠다. 어마어마한 숙소비를 자랑하는 파리의 8인실이 그 값어치를 하지 못하고 엉망인 것이 서러웠다. 하필이면 '뉴욕에서 온 음악가'라 허세 가득하게 소개하던 두 룸메이트들이 엄청나게 더러운 사람들이어서 방을 엉망으로 만들곤 하는 것이 서러웠다. 호스텔 카운터의 직원들도 어마어마하게 불친절하던 것이 서러웠다. 모든 것이 서러운 날들이었다.


파리의 한인 치과를 찾아보았다. 진료비가 어마어마하다지만 그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나의 왼쪽 온 얼굴이 여전히 쿡쿡 쑤시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화를 빌리기 위해 호스텔 로비로 나왔고 베네수엘라에서 왔다는 영어를 끝내주게 잘하던, 그리고 그나마 엄청나게 친절하던 직원이 카운터에 서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치과에 대해 물었고 그는 생 라자르 역에 가면 예약이 필요 없는 메디컬 센터가 있다고 했다. 영어를 하는 사람도 있을 거라 말했다.


때때로 칠흙같던 파리와 세느강의 물.


이미 천근만근인 몸을 일으켜 생 라자르 역으로 향했다. 우습게도 햇살은 또다시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메디컬 센터 일층 로비의 흑인 보안원은 끝내주게 영어를 잘했다. 삼층에 올랐다. 치과에 들어섰다. 그러나 그곳의 모든 사람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영어를 구사하지 못했다. 영어가 꼭 중요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래야 똑똑하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그러나 그저 그날 나의 구차하고 서럽던 못난 마음이 또 한 번의 의사소통의 부재를 원망했다.


손짓 발짓으로 설명을 했다. 그들에게는 생판 모르는 동양인 관광객이 지친 얼굴을 하고 들어와 방방 뛰고 손을 막 휘저으며 무언가 말하려 애쓰는 모습이 우스웠으리라. 그래서 자꾸 서로 농담을 해대고 실실거리며 웃었다. 급한 심정이었던 나는 그런 선한 웃음과 낄낄거림이 서운했다. 엑스레이를 찍었고 진료실을 배정해주는 치위생사와 손짓 발짓의 상담을 마치고 한참을 헤맨 뒤에야 나는 아래층에 배정된 진료실 대기의자에 앉았다. 그 진료실의 기다림은 끝이 없었다. 심각한 환자들의 치료방인가.


내 앞에 앉은 사십대로 보이는 약간 레옹을 닮은 이탈리아계 파리지앵 아저씨는 턱을 부여잡고 있었다. 그 기다림이 길어지자 우리는 이따금 대화를 나눴다. 나는 치과 치료비가 엄청날지를 물었다. 그는 돈이고 뭐고 치통 때문에 죽겠으니 달라는 대로 줄거라 말했다. 짧은 투덜거림이 이어졌다. 그에 나는 지금 '파리를 여행하는 중'이고 그  와중에 여기 앉아서 치과 치료를 받으려 이십 분째 기다리고 있다는 실소가 터지는 나의 이야기를 전했다. 아저씨는 백기를 들었다. 나에게 굳 럭을 외쳤다.



하하하. 의사와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고 반쯤 넋이 나갔던 나는 농담들도 해댔다. 여기서 치과치료를 받다니 어이없다 말했다. 그녀는 청천벽력 같게도 오늘은 예약이 꽉 차 치료를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금요일에 다시 오라나? 나의 파리는 딱 그 수요일부터 일요일까지였고 나는 그의 이틀을 치과에서 보내게 생긴 것이었다. 그러나 원인을 알고 진료 예약을 마치고 나오는 길의 나는 홀가분했다. 약국에서 새로 처방받은 진통제와 항생제를 먹었고 여행을 계속했으며 사일 전 도둑맞은 새 아이폰5s는 없었지만 오래된 나의 아이폰4로 셔터를 눌러댔다. 날은 맑게 개어 있었다.


(베를린의 소매치기 소동은 전편을 참조..)

https://brunch.co.kr/@sssorim/18


치과와 약국을 나서던 길의 푸른 하늘.
우연히 지나다 마카롱으로 이름 높은 '라 뒤레'를 만났다. 이런 행운은 그냥 지나칠 수 없겠지?
다시 찾은 루브르의 유리 피라미드, 그리고 그에 비친 나.


_

일요일의 두 번째 치과 치료는 즐거웠다. 나는 전혀 프랑스어를 알아듣지 못한다. 그렇지만 모두 알아듣는 듯한 완벽한 연기를 했다. 메디컬 센터 삼층 치과에 들어선다. 카운터에서 간호사가 무슨 말을 하면 여권을 내민다. 여권과 서류를 넘기면 그 서류를 들고 기다리다 어색한 프랑스식 내 이름이 불리면 뒤편의 진료 상담사에게 간다. 그가 무슨 말을 전하든 알았다는 눈짓을 보내며 내미는 진단서를 받아 든다. 전전날 답답한 대화를 나누었던, 나를 우스워하던 그에게 눈짓 한 번을 보낸다. 아래층에 내려가 2번 진료실 캐비닛에 진단서를 넣는다. 의자에 앉아 기다린다.


나의 그 카운터에서 진료실까지의 수순을 모두 잘 이해하고 있다는 듯 완벽하게 마쳤다. 나를 지독히 괴롭히던 나의 왼쪽 첫 번째 어금니의 신경들은 마침내 사라졌고 나는 유유히 카운터에서 진료 비용을 지불했다. 약국 처방전을 건네는 간호사와 진료 상담사는 서로 킬킬거리며 '약국'을 영어로 뭐라 하더라 물어대는 듯했다. 마침내 진료 상담사가 PHARMACY와 비슷한 단어를 말했다. 이제는 나도 그들을 향해 웃어줄 여유가 생겼다.


'우이 메시!'를 외칠 만큼 나의 마음은 가벼웠다.


그날 저녁 나는 나를 도왔던 친절한 웨이터가 있는 레스토랑에 또다시 발걸음 했고 그에게 모든 이야기를 하소연할 생각에 경쾌한 마음이었다.


이때의 나는 애증의 파리가 또다시 나에게 무슨 짓을 벌일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

(다음 편에 계속.)

in  파리


덧, 참고로 그 친절한 웨이터의 이름은 피에르였다!


퐁퓌드의 손. 안녕을 말하는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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