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멜버른, 황야에서 길을 잃다.
꼭 일 년쯤 전이었다. 지난 삼월, 멜버른의 환한 보름달은 그녀와 나의 캄캄한 앞길을 비춰주는 유일한 빛이었다. 우리는 야생 토끼들이 뛰어다니고 캥거루들이 모여 풀을 뜯는 호주 멜버른 한 귀퉁이의 거대한 황야 한복판에 놓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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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일 년간의 멜버른 생활을 정리하고 멜버른을 떠나기 이주 전 무렵이었다. 나와 같이 거의 일 년 동안 자원봉사를 하던 토요일 오후의 카페 멤버들은 캥거루에 대한 얘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 화젯거리는 바로 호주에 350일 남짓이나 있었지만 아직도 캥거루를 보지 못했던 '나'였다. 오히려 나는 별다른 미련이 없었지만, 수다스럽던 동료는 으레 그렇듯 캥거루가 사는 곳에 가서 하룻밤 캠핑을 하자, 차를 빌려 다 같이 떠나자 등 거창한 구술 계획들은 신나게 이야기했다. 나는 그저 나를 생각해주는 그들의 마음만에도 포근해지곤 했다.
호주를 떠나기 며칠전 오후, 나는 아마 집에서 짐을 싸고 있었거나 아니면 필요한 것들을 사느라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을 것이다. 조용하던 나의 휴대폰이 울렸다. '케이티'라는 정다운 이름이 떴다. 내가 멜버른을 떠나는 날이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었기에 나는 그 정다운 목소리에도 울컥하는 마음을 품었다. 들뜬 그녀의 목소리는 캥거루를 보러 가자는 제안을 소리쳤다.
모두들 바빴기에 흐지부지 사라지는 줄 알았던 그 계획은, 결국 내가 호주를 떠나기 단 이틀 전 우리 둘만의 거대한 캥거루 어드벤처로 이루어졌다. 나는 마침내 캥거루를 보고야 만 것이다!
물론 캥거루를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호주의 아무 공원에나 뛰노는 것은 아니지만도 (나도 호주에 오기 전에 혹시나? 그런 기대를 품었었다), 멜버른 시내의 동물원에만 가도 캥거루들은 귀여운 얼굴을 하고 조용히 풀을 뜯고 있었다. 그러나 지구의 벗 친구들은 그런 캥거루를 보는 것은 의미가 없다 큰소리쳤다. '야생 캥거루'를 보아야만 한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그렇게 우리의 캥거루 어드벤처는 멜버른 외곽 공항 근처의 거대한 'Woodlands Historic Park'에서 해 뜰 시간과 해 질 녘에 다 같이 모여 풀을 뜯는다는 캥거루들의 일명 '미팅'을 보는 것이었다.
오후 세시 반, 그녀가 다니는 멜버른 시내의 RMIT 예술 대학 내 그녀의 스튜디오에서 그녀를 만났다. 다정한 그녀의 얼굴이 열린 문 너머로 나를 빼꼼히 맞아 주었고 우리는 따뜻한 포옹을 나눴다. 그리곤 각자의 배낭에 포장된 스시롤 한 박스씩을 챙기고 한 손엔 커피 한잔씩을 쥐고 다른 손엔 초코바를 챙겨 힘차게 기차역으로 향했다. 그녀의 노트에는 빼곡하게 그날 하루 공원으로 향하는 모든 기차와 버스 시간이 적혀있었다. 또한 프린트된 공원의 지도 한 장도.
그렇게 호주에서의 우리의 모험은 '아날로그'였다.
기차를 타고 한 시간, 버스로 갈아탄 뒤 또다시 삼십 분쯤을 가서야 DSLR 카메라를 하나씩 매단 우리는 공원에 가까운 버스 정류장에 내렸다. 공원의 입구까지는 또다시 20분 정도 걸어야 했다. 그 긴 이동시간 동안 나는 수많던 나의 호주를 곱씹었고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호주에서의 인종차별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내가 당했던 크진 않지만 사소했던, 감정적이었던 약간의 차별에 대해 조심스레 입을 떼었다. 얼마 전 등기 우편을 부치러 찾았던 우체국의 직원은 이미 질리게 하는 수많은 이민자들을 만나 지쳐있던 것인지도 모르지만, 내 말을 듣지도 않고 성가시다는 듯 손짓만으로 나의 목소리에 귀를 닫았다. 나는 그런 사소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상냥한 케이티는 내게 공연한 사과를 했다.
그녀는 내가 알던 사람 중 가장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한 마리의 'Social Butterfly'라는 말을 듣던, 사교계의 한 마리 나비. 누구에게나 온 마음을 다해 친절했다. 언제나 '진짜 웃음'을 지었다. 내가 맨 처음 자원봉사를 하러 도착한 날에도 제일 먼저 성큼성큼 내게 다가와 그 파란 눈으로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맞아 주었다. 사실 남자만큼이나 짧게 숏컷을 친 금발머리에 입술에는 커다란 피어싱을 하고 가위로 뚝 잘라 이어 붙인 듯한 원피스에 앞코가 하얗게 닳은 갈색 워커를 신은 그녀였다. 동네에선 그냥 맨발로 돌아다닐 만큼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케이티였다. 처음의 나는 문화 차이였는지 그런 그녀가 건넨 힘 있는 큰 포옹이 조금은 어색했다. 그러나 그녀의 그 따뜻한 마음은, 짧게 뒤엉킨 머리칼과 커다란 피어싱으로는 도저히 가릴 수 없는 것임을 후에 나는 알았다.
작고 달콤한 나의 케이티. 바로 그녀와 나의 모험이었다.
공원은 엄청나게 컸다. 그 커다란 가장자리는 쇠로 된 높다란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 테두리가 육안으로 보이지 않을 만큼 공원은 커다랬다. 각각 이삼십 분쯤은 걸어야 나오는 단출한 4개의 문이 있었을 뿐이다. 커다란 워커를 신은 그녀와 까만 반스를 신은 나는 그 수풀들과 부러진 나무 기둥들과 토끼굴들을 성큼성큼 헤쳐 나갔고, '아무것도 없는 거 아니야'라는 말을 내뱉을 때마다 재빠르게 지나가는 토끼들의 하얀 엉덩이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캥거루는 만날 수 없었다.
커다란 죽은 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잠시 쉴 때였다. 나는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이십대 초반의 나의 고민들을 그날의 지는 노을과 함께 털어놓았다. 아름다운 자연을 가진 자유로운 나라 호주에서 나는, 수많은 자유로운 영혼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 거대한 대자연과 지는 붉은 노을과 자유로운 그녀의 마음 앞에서 어쩌면 나의 고민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다. 케이티는 그 상냥한 푸른 눈을 나의 눈동자로 향했고 그 눈동자와 그녀의 표정은 그녀 자신이 그 순간에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했다. 그 힘 있는 눈동자를 하고 인생은 네가 하고 싶은 일을 따르는 것이라 그녀는 말했다. 내 마음이 하고 싶은 일.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가는 것이 온전한 나의 몫이었다.
'캥거루는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이쯤 하면 나올 때가 되지 않았나!'하는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두 마리의 캥거루들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와 나는 나란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캥거루가 놀라 도망갈까 숨도 크게 쉴 수 없었다. 캥거루들도 그 귀여운 귀를 쫑긋 세우고 작은 앞발을 바짝 들어 올린 채 우리의 동태를 살피느라 코도 찡긋하지 못했다. 그렇게 그들과 우리 넷은 몇 분쯤 그 바보 같은 자세로, 어깨를 한껏 움츠린 채로 서로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호주에서의 첫 캥거루와, 그곳을 떠나기 이틀 전 마침내 마주했다.
황야 한복판으로 정처없이 한참을 걸어가고 난 뒤에야 우리는, 마침내 해질녘 다 함께 모여 풀을 뜯는 다정스러운 2-30마리의 캥거루 무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별 건 없었다. 그 '미팅'은 그저 풀을 뜯는 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아주 커다란 나무 밑에 우리도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 툭 튀어나온 커다란 나무뿌리들에 올라타 걸었고 아래로 늘어진 굵은 나무줄기들에 타고 올라보려 애썼다. 서른이던 그녀와 스물하나이던 나는 그 순간 열 살의 꼬마 소녀들로 돌아가 타잔처럼 나무에 매달려 빨간 머리 앤과 같은 미소를 지었다. 분명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였으리라.
싸온 스시 롤을 먹고 이런저런 사진을 찍고 한참을 이야기 나누고 웃은 뒤에야 하늘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강렬한 태양은 우리가 있던 커다란 나무의 가장 아랫 줄기에 숨곤 하더니 어느새 지평선에 반쯤 얼굴을 걸치며 사라졌고 마침내 눈부신 핑크빛 노을을 만들어 냈다.
해가 졌다!
그 노을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던 것도 잠시, 우리가 계획보다 지나치게 시간을 지체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케이티가 알아온 마지막 버스의 시간은 9시 34분이었고 거대한 공원의 한복판에 있던 우리의 휴대폰 시계는 이미 오후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케이티와 나는 가방을 짊어지고 노을과 캥거루를 등지고 섰다. 성큼성큼 그녀와 나의 발은 움직였고 등 뒤의 노을은 그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유혹했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늦어 있었다. 아쉬운 마음에 몇 번이고 등을 돌려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그 다음 순식간에 공원은 캄캄한 어둠으로 뒤덮였다.
'오늘 밤 보름달이 떠서 정말 다행이야.'
우리가 했던 말처럼 유일하게 보름달만이 우리의 앞길을 비춰주고 있었다. 가로등 따위는 없었다. 휴대폰 라이트를 켜는 것도 한계가 있을 것이었다. 실은 우리는 우리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지도에 표시된 거대한 공원의 한 가운데에 있을 거라 짐작되었지만, 동서남북 어느 곳을 보아도 그 황야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처음이었다. 허공에 뜬 달을 가리켰다. 그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방향이 그저 우리가 향해야 할 방향이었다. 정확한 각도도 평평한 길도 없었다. 그저 그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우리는 걷고 또 걸었다. 공원의 끝을 알리는 철조망을 만날 때까지.
날이 캄캄해지고 휴대폰 배터리가 거의 달아나 가자 우리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나는 별스럽지 않은 우스갯소리를 해댔고 그녀도 예전 남미를 여행할 때 길을 잃고 한참 헤맨 뒤 거대한 폭포를 만났던 아름다운 경험을 오랜만에 떠올렸다며 오늘은 별일도 아니라 말했다. 실은 속으로 그녀와 나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지만, 여기는 어찌 되든 멜버른이고 정 안되면 누군가에게든 실어가라 전화를 하면 될 터이고 버스를 놓친다 해도 택시를 타면 될 일이라 서로를 위로했다. 나는 오래전 보았던 기사에 대해 이야기했다.
호주에서는 먹이사슬의 최강자가 여우라고 했던 것 같다. 그나마 그 여우도 별로 없어서 초식 동물인 캥거루가 가장 강한 동물이라 들었다. 그래서 캥거루의 개체수가 너무 늘어나 골칫거리라는 기사를 보았다. 농담을 했다. '여기가 호주라는 게 얼마나 다행이야. 기사에서 봤어, 여긴 곰이나 호랑이가 없다고. 기껏해야 여기 있던 캥거루들이 전부야.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그 우스운 이야기를 하는 나의 미소는 진실되지 못했다.
마침내 울타리를 발견했다. 우리는 이제 입구를 찾기 위해 그 울타리를 따라 왼쪽으로 쭉 올라가기로 했다. 그러나 갑자기 울타리가 두 개가 되어버렸다. 어느 울타리를 따라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우리는 왜인지 직감을 따라 오른쪽으로 가기로 했다. 그렇게 또 이십 분쯤을 걸었다. 길을 잘못 든게 아닐까하는 어둠 속에서의 두려움이 있었다. 마침내 익숙한 입구가 보였다. '살았구나!' 그 감동도 잠시 우리는 또다시 애써 서로를 다독였으나 이제는 마지막 버스를 놓칠 것이 걱정이었다. 그렇게 입으로는 괜찮아, 괜찮아하며 숨을 헐떡일 만큼 아주 빠른 걸음으로 우리는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알아본 마지막 버스 시간은 9시 34분이었고 시계는 아직 31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갑자기 또다시 마음이 불안해져왔다. 시간이 조금 변경돼 막차가 30분에 이미 지나갔다면? 그렇게 그녀와 나의 마음은 초조해져만 갔고 마침내 35분이 되어서야 저 멀리서 포근한 버스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가까워졌다. 그렇게 우리는 한숨을 한가득 움켜쥐고 버스에 올라탔다.
하아아아. 마침내 그 모든 무겁던 불안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 텅 빈 시골의 막차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로지 우리 둘만이 올라탔던 것이다. 그제야 그 사실이 너무 우스웠다. 우리는 드디어 아주 커다랗게 진심을 담은 웃음을 지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컴컴한 풍경과 침침한 버스의 전등 빛 따위에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아주 커다란 미소를 지었다. 사실은 두려웠다는 고백을 서로에게 건넸다. 그리곤 또다시 커다란 웃음소리를 내었다.
그렇게 우리의 대단했던 캥거루 어드벤처는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또다시 이십 분쯤 기차를 기다리며 그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심스레 블로그를 한다는 말과 너의 이야기도 조금 들어있다는 말에 그녀는 눈을 반짝였다. 그리곤 나의 모든 것들을 응원해주었다. 나도 그녀의 고민을 들어주었다. 파트너에 대한 고민과 새로 이사할 집을 찾아야 하는 스트레스, 그런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했다.
그녀와 나의 헤어짐은 그 밤 멜버른 시티의 기차역, 그 기다란 에스컬레이터에서. 이틀 뒤면 나는 떠났다. 마지막 포옹은 따뜻하며 질척했다. 그녀의 팔은 나의 그것을 힘 있게 내리눌렀고 그 무거움에 나의 마음은 따스해져 왔다. 그렇게 돌아서는 나의 눈시울이 왜인지 뜨거워졌다. 이미 떠나는 인연들에 목매여 눈물 흘리는 나이는 지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호주에서의 이별은 또 달랐다. 그 따뜻한 포옹만큼이나 무겁게 뜨거웠고 포근했고 마음만 먹으면 날아올 수 있는 곳이 아님에 애틋했다.
언제나 'Oh darling! Honey! Sweetheart!'라 불러주던 자그마한 체구에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포옹을 건네던 케이티. 오 나의 스윗 케이티. 뜨거운 자정의 눈물과 함께 나는 나의 멜버른과 그의 정다운 사람에게 마지못한 안녕을 고했다.
고마워, 결국은 나의 멜버른의 캥거루를 보고 떠나게 해주어서.
너의 그 빼곡하던 일정표와 두 번 접어 꾸깃하던 공원 지도 한 장에 담긴 정성이,
내게 얼마나 크게 다가왔는지 너는 상상할 수도 없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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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그녀를 따라 나의 오른손을 들어 가볍게 나의 입술에 눌렀고 그 키스를 너에게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