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의 큰 사랑을 받았거나 강력한 팬덤을 보유하고 있는 영화를 선정하여 그 영화의 명장면을 분석합니다. 대중에게 친숙한 영화의 장면 분석을 통해 간단한 영화 언어를 습득할 수 있다면, 콘텐츠를 소비하는 관객들에게 영화를 조금 더 분석적으로 관람할 수 있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줄 것입니다.
비평이란 일정한 논리와 시각으로 작품을 정의하고 그 가치를 분석하며 판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비평은 원저작물을 다양한 방식으로 재창작한 ‘2차적저작물’의 성격을 지닙니다. 흔히 비평을 ‘비(非)문학’, 그러니까 예술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는 분들이 많은데요. 비평 역시 시, 소설, 에세이와 마찬가지로 문학이자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적 창작물입니다.
영화비평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비평가가 영화를 나름대로 정의하고 그 가치를 분석하며 판단하는 것인데, 그 과정에서 감독조차 인지하지 못했던 부분을 새롭게 발굴해 정확하면서도 유려한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영화비평의 여러 목적 중 하나입니다. 실제로 어느 감독은 “비평가의 글을 통해 내 영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는데요. 솔직한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해 논문 「영화비평과 영상미학」의 저자 이윤영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비평은 문화를 ‘소비’하고자 하는 대중들의 안내자가 아니라, 섬세한 ‘더듬이’와 예민한 ‘안테나’로 작품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진정한 ‘여행’을 깊이 이해하고 이를 통해 창조자가 말하지 않은 것, 혹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명료하게 언표하는 역할, 한마디로 길안내자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책 『영화 비평: 이론과 실제』의 저자 강성률은 영화비평이란 “영화에 대한 박학한 지식과 한없는 애정, 영화이론과 영화사에 대한 폭넓은 지식, 영화 테크닉에 대한 철학적·미학적 사유, 작가주의에 대한 깊은 이해, 동시대 영화 흐름에 대한 지적 고민 등을 치열하게 해나갈 때 가능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비평가는 이러한 능력을 바탕으로, 영화를 보고 난 뒤 자신의 마음속에 일렁거렸던 감정의 물결을 언어의 형태로 물화(物化)합니다. 그 감정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영화평론가 이동진 역시 책 『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에서 “나는 영화를 만져보고 싶다”고 말했는데, 비슷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씨네필(cinéphile) 문화를 이끌었던 정성일은 책 『필사의 탐독』에서 “모든 영화비평은 영화를 본 나와 영화를 쓰는 나의 대면”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대해 그는 <독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영화비평은 실패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영화의 형상을 붙잡으려 노력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는데요. 거칠게 풀이하면, 글과 글의 대결인 문학과 문학비평에 비해 영화비평은 움직이는 이미지와 글의 대결입니다. 문학비평과 비교했을 때 영화비평은 태생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영화비평은 움직이는 이미지를 붙잡고 언어화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거기에 닿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평론가 남다은은 「‘거리’의 치열한 활동 :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라는 글에서 ‘거리’라는 키워드를 통해 영화와 감독, 영화와 관객, 감독과 관객 사이를 두리번거리며 영화비평 행위에 관해 골몰합니다. 마치 존재와 존재 사이를 유영하는 카메라처럼요. 이 글은 「영화와 새로운 심리학」이라는 글에서 메를로 퐁티가 “사물 사이의 간격-예를 들어 가로수 사이의 공간-을 사물로 보게 되고 사물 그 자체-거리의 가로수-를 배경으로 볼 수 있게 되면, 우리의 세계상은 전복될 것”이라고 언급한 문장과 궤를 같이 합니다.
퐁티의 사유는 남다은이 자신의 글에서 언급한 영화평론가 허문영의 문장(“영화는 간격을 다루는 예술이다.”)과 이어집니다. 뛰어난 감독들은 언제나 거리와 간격에 관한 사유를 이미지에 아로새겼습니다. 남다은은 “타자가 나로부터 어떠한 거리에서 시작되는지를 지칠 줄 모르는 시선으로 만지는 법을 영화가 나에게 가르쳐주기를”이라는 세르주 다네의 문장을 자신의 글의 마지막 인용문으로 사용합니다. 곱씹을수록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끝으로 대다수가 상찬했던 영화에 유의미한 비판 의견을 낸 영화비평을 몇 편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바로 정성일의 글(<오아시스> 비판론 : 안전한 환상, 혹은 비겁한 위로, 씨네21), 박우성의 글(<기생충>, 원시적 열정에 반대한다, 중앙SUNDAY), 서성희의 글(‘노인 감수성’이 필요한 영화 <남매의 여름밤>, 르몽드디플로마티크)입니다. 위 글들은 다수의 찬성 의견에 단호히 ‘NO’라고 외친 영화비평입니다. 물론 이 글들이 꼭 정답이라는 건 아닙니다. 그리고 애초에 영화비평에 정답이라는 건 없습니다. 다만 확실한 건 이러한 글들이 영화비평의 토양을 더욱 풍요롭게 해준다는 사실입니다.
영화비평은 카메라의 움직임, 카메라와 피사체 사이의 거리, 카메라가 피사체를 바라보는 각도 등을 준거삼아 영화이미지를 탐문하는 과정입니다. 동시에 서사의 전개 방식, 편집의 순서, 미장센(mise-en-scène : 영화의 시각적 표현 기법) 등을 통해 영화의 미학과 윤리에 관해 생각해보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나의 지극히 사사로운 체험을 영화에 투영해 친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결론은 언제나 간단명료합니다. 영화비평은 결국 영화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