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유품
지난 월요일, 설을 앞두고 한 달만에 남편이 집에 왔다.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지 않고 셋이서 경주 대릉원에 갔다. 찬바람이 쌩쌩 부는 날이었는데도 크고 완만한 고분들은 날씨와 상관 없이 아늑하고 포근해보였다. 왕릉 내부를 볼 수 있는 천마총에 입장했을 때 아이는 연녹색 옥이 수없이 달린 금관을 보며 환호했다.
"신라 사람들은 왕이 죽으면 이렇게 왕이 쓰던 말안장, 무기, 보석, 그릇까지 함께 묻어줬대."
아이는 내 말을 듣고 한참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엄마, 나는 죽으면 에그박사 책 두 권이랑 레고랑 책상이랑 의자도 같이 묻어줘."
"아하하, 그래. 아빠는 차랑 아이패드랑 같이 넣어줘야겠다."
아이의 말이 사랑스러워 히죽거리던 남편이 내게 물었다.
-"그럼 자기는 뭐랑 묻어줄까?"
"음, 나는 그냥 이거랑 묻어주라. 크크."
나는 항상 메고 다니는 낡은 에코백을 가리키며 싱겁게 이야기를 끝냈다.
해 떨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남편과 아이가 앞자리에 나란히 앉아 수다를 떠는 동안 나는 사람이 죽은 일과 그 유품에 대해 생각했다. 영화에서 비슷한 장면을 본 것이 먼저 떠올랐고, 다음에는 웹서핑하다가 우연히 봤던 고독사한 노인의 집을 치우는 청소업체 블로그 글이 생각났다. 영화 속에서 바로크시대 귀부인이 죽은 남편의 유품을 정리하는 모습은 아름다웠고, 청소업체 블로그 속 사진은 생활의 많은 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있었다.
인간은 미디어 속 영상처럼 단정하게 살 수 없는 존재다. 길고 연속적인 일상은 지저분함을 불러모은다. 그럼에도 나는 아름답고 깔끔한 것들 속에서 삶을 마무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초엽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라는 책에 <관내분실>이라는 단편이 있는데, 거기에는 죽은 사람의 유무형 재산을 데이터화 시켜놓은 도서관이 나온다. 이 정도 일은 어쩌면 가까운 미래에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나와 내 물건들도 그렇게 세상에 오래 남겨질 지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사이버 천마총 하나씩은 남기게 될 것이다.
죽음과 유품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왠지 조심스럽다. 이렇게 말하면 죽음이 내 가까이에 다가올까봐 두렵기도 하고, 너무 먼 미래의 일을 미리 걱정하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20대가 되어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의 '인생수업'을 읽고, 30대가 되어 법정스님의 '무소유'와 '텅빈 충만'을 감명 깊게 보며 죽음더 삶의 일부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머리로만 안 것이지 체득한 것은 아니다. 그동안 죽음에 대해 몸소 깨달을 일이 없었던 것도 감사할 일이고, 또한 오늘 왕릉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좋은 일이다.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생각하며 남은 시간을 소중하게 쓰고, 삶을 잘 마무리할 준비까지 함께 한다면 더 현명하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집에 도착해 형광등을 켜고, 어지러운 집을 둘러본다. 내일 아이를 등원시키고 나면 죽을 때 가져가지 않을 몇 가지 물건들은 버려야겠다고 마음 먹는다. 비싼 값에 샀지만 유행이 지나 더 이상 입지 않은 옷, 결혼하고 한 번도 읽지 않은 오래된 책 같은 것을 말이다. 지금 글을 올리는 이 곳도 사이버 천마총적 측면에서 한 번 더 생각해본다. '죽음과 유품' 그것은 새로운 삶의 기조로 한동안의 정리정돈에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