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다 책임질게!"
"남자 아인 가요? 이 동네는 애들 엄마, 아빠가 박사고 교수라, 엄마 없는 애면 학교생활 좀 힘들 텐데.”
내가 아홉 살, 전학 첫날이었다. 담임 선생님이라는 사람이 우리 아빠에게 그렇게 말했다. 아빠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나. 그저 조용히 들으셨을 뿐이다.
그 한마디는, 어린 내게 묘하게 깊이 박혀버렸다.
그렇게 나는 탄산이 빠진 콜라처럼 기가 죽은 채 학교를 나갔다.
나는 홀아비의 딸이었고, 머리를 곱게 땋아주거나 예쁘게 묶어줄 사람이 없었기에 늘 짧은 숏컷트 머리였다.
그 때문에 눈치를 챘는지 알 수는 없지만,
몇몇 아이들은 "엄마도 없는 거지래요~"하고 놀렸다.
나는 싸우고 싶어도 싸울 수 없었다. 그저 아빠가 없는 곳에서 몰래 울었다. 아빠가 걱정하실까 봐, 내가 속상한 티를 내면 아빠 마음이 더 다칠까 봐. 하지만 아빠는 이미 다 알고 계셨다. 붉어진 내 눈을 보고도, 아무 말 없이 내 옆에 계셨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속상함이 쌓이고 쌓여서, 결국 참지 못하고 엉엉 울어버렸던 날. 아빠는 내 곁으로 와서 조용히 나를 다독여주시곤,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제 누가 엄마 없다고 놀리면, 그냥 한 대 때려줘. 아빠 있잖아. 아빠가 다 책임질게.”
그 말 한마디가 이상하게 내 울음을 뚝 멎게 했다. 나는 그날부터 더 이상 움츠러들지 않았다. 참기만 하는 아이가 아니라, 내 마음을 드러낼 줄 아는 아이가 되었다. 내 뒤에는 아빠가 있다는 걸, 아빠가 끝까지 책임져준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그렇게 큰 믿음이 있었다.
다음에 또 누군가 “엄마도 없는 게” 하고 놀렸을 때, 나는 이제 움츠러들지 않았다.
“내가 엄마 없는 데 보태준 거 있어?” 그렇게 당당히 받아쳤고, 그 뒤로 이상하게 아이들과도 자연스레 친해졌다. 내 학창 시절 내내 주변엔 늘 친구들이 가득했다.
나는 한 번도 엄마가 없어서 내가 부족하다고 느낀 적이 없다. 엄마의 빈자리를 아빠가 넘치도록 채워주셨기 때문이다. 물론 가끔 생각하곤 했다. 만약 엄마가 있었다면 내 삶에 어떤 점이 달랐을까?
하지만 어린 나이에 내가 깨달은 건 그보다 더 단단한 진실이었다. 어린아이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부모가 나를 지켜주고 있다’는 믿음이라는 것. 그리고 ‘나를 끝까지 믿어주는 부모가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자랐다.
아빠는 내게 그런 사람이었다. 믿어주고, 지켜주고, 어떤 상황에서도 내 편이 되어주는 존재. 그 믿음 덕분에 나는 마음이 크고, 단단한 사람으로 자랄 수 있었다.
책임감이라는 건, 때로는 지나치면 지치고 무거워질 수 있다. 하지만 부모로서의 책임감은 그런 부담과는 다른, 마치 사명감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아빠는 언제나 올곧은 태도와 가치관을 몸소 보여주셨고, 나에게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빠가 다 책임질게.” 그 한마디가 내 삶을 지탱해 주는 버팀목이었다.
그리고 나는 알게 되었다. 충만한 사랑은 결코 완벽한 조건 속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는 걸. 아빠는 ‘엄마 없는 가족’이라는 결핍을 안고 있었지만, 그 결핍은 우리 사이를 허전하게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 불완전한 현실 속에서 보여준 아빠의 단단한 책임감과 믿음이, 그 어떤 완벽함보다 더 완전한 사랑이 될 수 있다는 걸 매일 깨달았다.
사랑은 빈틈없는 모습에서만 흘러나오지 않는다. 어쩌면 결핍이 있는 자리에서, 부족함을 숨기지 않는 자리에서 더 깊고 단단하게 피어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빠가 내게 보여준 사랑이 그랬다. 나는 부족한 적이 없었고, 그 불완전함 속에서도 나는 충만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그 책임감, 그 믿음에 늘 감사하다. 부족함 없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내게 든든한 뿌리가 되어준 아빠에게, 지금 이 순간에도 마음 깊이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