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환학생의 짐 싸기, 아에로플로트 탑승, 헬싱키 공항
8월 말, 3년 반 동안 지냈던 기숙사의 내 보금자리를 떠나려니 무척이나 아쉬웠다. 대학에 온 뒤 줄곧 지내며 한 번도 이사한 적이 없었기에 짐은 불어날 대로 불었는데, 짐을 다 싣고 나니 1톤 트럭 한 가득이었다. 그렇게 대학 기숙사에서 퇴사하고 부모님 집으로 짐을 옮겼다. 9월 초부터는 핀란드에 가져갈 가방을 챙기거나 필요한 서류를 준비했다. 정말 필요한 것들만 챙기려는 데도 커다란 캐리어가 꽉 찼다(맥시멀리스트). 옷은 전부 압축팩에 넣어 납작하게 만들었고, 수건은 사용하다가 버리고 올 것들로 챙겼다. 이불이나 베개 같은 것은 핀란드(Finland)에서 구입할 생각이었고, 쌀밥은 원래도 가끔씩만 먹는 편이라 밥솥은 챙기지 않았다. 내가 가는 알토대학교(Aalto University)는 9월 셋째 주부터 학기가 시작하니까 9월 둘째 주 월요일에 출국하면 딱 맞았다.
그런데 출국 하루 전 날, 헬싱키(Helsinki)의 학생 아파트인 HOAS 열쇠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내가 핀란드에 도착하는 시간은 저녁 8시이니 당연히 HOAS의 사무실은 문을 닫았을 시간이다. 그러면 Key Collecting(열쇠 수령)을 할 수 없을 것이고, 당연히 방에도 못 들어가게 된다. 이렇게 중요한 문제를 그제야 알게 되다니!
알아보니, 나와 비슷한 처지에 놓일 학생들을 위해 대리인을 보내서 Key Collecting을 할 수 있다고 한다. 보통은 교환학생 튜터(Tutor)에게 도착 일정을 알린 뒤 HOAS 쪽으로 확인 메일을 보내면 되는데, 확인 메일에는 대리인의 이름과 대리인 본인임을 증명할 수 있는 정보(기억이 잘 안 나지만 아마도 연락처, 사진, 이름(full name)이었던 것 같다)가 필요했다. 와아 정말 다행이야! 곧바로 알토대 경영대학(Aalto Business School)에서 지정해 준 튜터 Sanni에게 메일을 보내 상황 설명을 했다.
그런데 여러 번 메일을 주고받아보니 한 번 답장을 받는 데까지 반나절 정도 걸리는 것 같았다. 메일을 확인해 답장을 보낸 뒤, 다시 메일을 기다렸다가 확인하기까지 시간이 너무 많이 들었던 것. 내일 아침에는 인천공항에 가야 하니 이 모든 난관을 뚫고 HOAS로부터 처리 완료 메일을 받을 즈음에는 Key Collecting 하기에 이미 너무 늦었을 것이다. 그래서 Sanni에게 급하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이렇게 외국 번호에 문자를 보내도 괜찮나?'라는 걱정이 불쑥 들었지만, 뭐 어찌 됐든 급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더 먼저니까.
"I have got into trouble, can you help me? My problem is that I will land at Helsinki at 8p.m. on 5th September, so I cannot collect my housing key by myself. I heard that tutor can collect the key instead of me. To solve this problem what should I do?"
"저 문제가 생겼어요, 도와주실 수 있나요? 저는 헬싱키에 9월 5일 저녁 8시에 도착해서 HOAS 열쇠 수령할 수 없어요. 튜터가 대신 열쇠를 받을 수 있다고 들었는데, 문제를 해결하려면 제가 뭘 해야 할까요?"
이렇게 메시지를 보내고 기다리니 금방 답장이 왔다. 그리고 문제가 있다면서 잠시 알아보더니 다시 메시지가 왔다. 요약하자면, "지금은 대신해 열쇠를 받을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여전히 방에 들어갈 방법은 있다"라고.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조금 안심이 되었다.
9월 5일, 드디어 핀란드 헬싱키(Helsinki)로 떠나는 날. 내가 이용한 항공사는 아에로플로트(Aeroflot, 러시아 항공)로 러시아 모스크바(Moscow, Russia)의 사라메티예보(Sheremetyevo International Airport)에서 환승하는 항공편이었다. 짐을 분실했다든지 연착 때문에 환승 비행기를 놓쳤다든지 등등의 흉흉한 후기가 있어서 걱정했지만 다행히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기내식은 다소 알 수 없는 맛이었다(=맛없었다).
인천공항(ICN)을 출발한 비행기는 약 9시간 30분 후, 모스크바 사라메티예보(SVO) 공항에 도착했다. 이제 여기서 헬싱키(HEL)로 가는 비행 편으로 환승하면 되는데..., 나는 여러 번 탑승권을 다시 보며 어느 게이트로 가서 어떤 비행기를 타야 하는지 확인했다. 혼자였기 때문에 더 철저하게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쯤부터는 한국인은 오로지 나 혼자 뿐이었다. 한국어는 더 이상은 들리지 않았고, 한국인 비슷해 보이는 사람도 더 이상 없었다. 내가 아주 어릴 때 길에서 우연히 외국인을 마주치면 무척 신기해하곤 했는데, 이젠 내가 그 외국인이 된 것이었다. 재밌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이제부턴 정말로 모든 것을 혼자 해야 된다는 생각에 걱정도 됐다.
헬싱키행 비행기에 올라타니, '내가 교환학생을 가는구나'라는 실감이 났다. 10년 전에 막연하게 꾸던 꿈이 이렇게 현실이 되었다니. 때는 한국 시간으로 밤 12시를 넘겼고 모스크바 시간으로는 저녁 7시쯤이었는데, 계속 서쪽으로 해를 따라가고 있어서 아직 해가 지지 않았었다. 비행기는 거의 텅텅 비어있었고, 바깥구경을 좋아하는 나는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창 밖에는 건물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러시아의 시골 풍경이 보였다. 그러다가 지금부터라도 핀란드어를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인천에서 모스크바까지 오는 내내 펼쳐보지 않았던 핀란드어 책을 꺼냈다. 잠시 책을 보고 있으니, 한 승무원이 네모난 종이 상자에 담긴 기내식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그런데! 무슨 바람인지 갑자기 승무원에게 무언가 핀란드어로 말을 걸어보고 싶었다. 어쩐지 헬싱키행 비행기에서라면 핀란드어가 통할 것 같기도 했고, 그래서 방금 책에서 본 문장을 말했다.
"Mika tama on?"
"이게 뭐예요?"
그 스튜어드는 무언가를 말하려 입을 벌렸다가, 순간 멈칫하고는 말을 고르더니 "Chicken(치킨)"이라고 답했다. 아마도 무심코 핀란드어가 나올 뻔했다가 다시 집어넣고, 내가 알아들을 만한 단어를 고르느라 잠시 머릿속을 헤맨 게 아니었을까? 지금이라면 "kana(핀란드어로 닭고기)"라고 답한대도 이해하겠지만, 핀란드어 책을 막 꺼내 읽던 당시의 나는 분명 알아듣지 못했겠 싶다.
창 밖을 보니 아직 러시아 상공이었다. 그러다가 곧 바다가 보이더니 다시 육지가 나타났는데 거기엔 녹색이 울창한 해안이 있었다. 난생처음 본 핀란드였다. 그 땅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여기가 바로 앞으로 내가 살게 될 곳이구나!”라고 생각이 들었다. 한국 시간으로 이미 새벽 2시를 넘은 시간이었는데, 헬싱키에서는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비행기가 점점 땅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드디어 핀란드 헬싱키 반타 국제공항(Helsinki-Vantaa International Airport)에 도착했다. 2번 터미널에 도착해 나오니 한국어가 여기저기 보였다. 이 먼 곳에도 한국어가 있다는 게 무척 반가웠다. 헬싱키 공항에는 한국어가 많지만 거기서 끝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한국어는 정말 그걸로 끝이었다.
공항을 빠져나오니 밤 9시가 넘어있었다. 너무 늦은 시간이었기 때문에 일단 핀에어(Finair)에서 운행하는 공항 리무진 버스를 타고 바로 시내로 이동했다. 버스에 타서는 뒷자리 승객에게 내 주소를 보여주면서 Rautatienkatu(나의 HOAS 아파트 주소)에 가려고 하는데 이 버스를 타는 게 맞는지 물어봤다. 그러더니 건너편 자리에 앉은 승객이 답해주며 "이 버스를 타면 갈 수 있다."라고 했다. 두 분은 계속해서 친절하게 내가 궁금해하는 것에 답해줬고, 그렇게 나는 어딘지도 모르겠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고 보니 하늘은 완전히 캄캄해져 있었고, 길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헬싱키는 대체로 거리에 사람이 없다 - 아이 무서워). 버스에서 함께 내렸던 사람들도 각자의 길로 뿔뿔이 흩어지고, 나만 덩그러니 그 자리에 남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내린 곳은 Rautatientori(Railway Square, 헬싱키 중앙역 Central Railway Station)였는데, 그땐 그런 거 하나도 몰랐으니 그냥 낯선 곳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다. 나에겐 그저 낯선 곳에서의 늦은 밤이었고 거리엔 사람이 없었으며, 밤은 점점 깊어져 가는데 핸드폰도 안 되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는 막막함 뿐이었다. 게다가 9월 초의 한국은 반팔에 반바지를 입으면 적당할 정도의 더운 늦여름이지만, 헬싱키는 가을 중순처럼 추웠다. 추위에 오들오들 떨며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길을 찾아 걸으면서 생각했다. 이제 어떻게 집에 가면 좋지?
그때의 난 알 수 없는 곳에 덩그러니 혼자 떨어졌다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상황이었다.
우리, 여기서 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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