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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월애 Feb 19. 2021

당연한 건 없어요.

희생만을 요구하는 사회

코로나 19가 재확산 방지를 위해 '5인 이상 소모임 금지'를 시행한 지 벌써 두 달이 다 되어가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린 민족 대명절 설날을 치렀다. '치렀다'라는 말보다  적당한 단어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우리의 상황에 딱 맞다.  정부에서는 주민등록상 함께 거주하는 가족이 아니면 직계가족이라도 5인 이상 집합 금지 명령을 내렸고, 국민들은 당황했으며, 언론에서는 연일 일어날 수 있는 부작용에 대해  보도를 했지만 전문가조차 결국엔 해당 가족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한발 물러날 뿐이다.



참으로 답답한 일이지만 어느 누구 하나 틀린 건 없었다. 정부 입장에서는 더 이상 확산되면 통제하기 힘들고 이미 국민 모두가 지칠 대로 지친 상황에서 드라마틱한 해결책이 없으니 고육지책으로  '5인 이상 소모임 금지' 카드를 내밀었고,  이번 설은 '5인 이상 소모임 금지' 위반 시 벌금이 10만원이니 지난 추석에도 못 본 손주를 보고 싶으신 할아버지, 할머니께서는 벌금 대신 내줄 테니 오라고 하시고, 아이들 데리고 먼 귀성길 떠나려니 걱정이 되는 아들, 며느리들은 눈치만 보다 결국엔 짐을 챙긴다. 언론에서는 이와 관련한 에피소드를 소개하며 정부의 안일한 대책을 비판하지만, 전문가들 조차 이번 일을 계기로 코로나 19 이후의 명절문화가 바뀔 것이라고 할 뿐, 차례나 가족 간의 모임은 개인적인 것이기 때문에 3자가 개입할 수 없는 노릇이다.  


여기서 문제는 서로가 당연하다 여기는데서 비롯된다. 정부는 재확산되면 안 되니 당연히 국민들이 방침을 따를 것을 요구하고, 가정에선 오래전부터 내려온 전통이고, 이때가 아니면 멀리 살고, 바빠서 평소엔 보기 힘든 가족들이 모여 얼굴도 보고, 조상님께 차례를 지내는 게 당연하다 여기니 벌금 내줄테니 이번엔 참여할 것을 요구한다.

얼마 전 우연히 '며느라기'의 몇몇 에피소드를 봤다. 혹자는 정말 이런 집이 있냐며 새삼 놀라고, 혹자는 우리 집이랑 똑같다며 격하게 공감한 이야기였는데 마지막 배우 코멘터리에서 극 중 시어머니 역을 맡았던 문희경 배우님의 말이 이 드라마가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내가 연기할 때 하고 지금 화면을 볼 때 하고는 천지차이네요. 그때는  당연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지금 보니까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이 세상에 당연한 일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다 여기기 때문에 그 당연함을 요구당하는 사람은 힘들고, 당연함을 요구하는 사람은 성에 차질 않는다. 시어머니로 분하여 연기할 때는 자연스럽게도 하지만 어처구니없게도 당연히 해야 한다고 여겼던 것들이 화면 밖에서 제3자의 입장으로 돌아오자 말도 안 되는 거라며 상대방을 인정 못함에 화가 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스스로를 잠시 돌아보는 이러한 기회를 갖게 된다면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보편적인 감정일 것이다.


나 또한 사람인지라 그렇다. 내 좋은 의도만을 생각하고 몰라주는 상대방이 원망스럽고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내가 하고자 하는 일들이 당연하다 여겼다. 하지만 당연한 건 세상에 없다. 내가 당연하다 여기는 순간 상대방에게 희생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함을 요구하는 순간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제야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영어 가정법 표현 중에 'If I were you'라는 표현이 있다. 이 뜻이 '만약에 내가 너라면'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겠지만 우리나라  한글의 문법에는 없는 이 가정법 과거 표현이 언제 쓰이는지 잊은 분들도 많으리라. 가정법 과거는 바로 '현재 사실의 반대, 현재 또는 미래에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일'을 가정할 때 사용한다. 그리고 우리가 바로 이 사실을 간과하지 않았으면 한다.  '나'는 '네'가 될 수 없다는 사실.  '나'는 1인칭이고 '너'는 2인칭인데 우리는 같길 원하고, 그래서 같을 것을 당연히 여기려 한다.  '나'는 특정 음식에 알레르기가 있지만, '너'는 정성껏 준비한 것이니 맛있게 먹을 것을 당연히 여긴다. '나'는 고소공포증이 있는데 '너'는 놀이공원에 왔으니 당연히 높이 올라가는 놀이기구를 타자 한다. 그러곤 나중에 이렇게 이야기할 것이다. 왜 처음부터 말하지 않았냐고...


당연이라는 가면 뒤에 숨어 희생을 요구하지 말고 서로가  혹은 서로의 상황이 다름을 인정하고 배려하고 감사해 할 수는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지금보다 조금은 더 행복한 세상이 될 수 있을 텐데라는 안타까움이 있다.


그래서 요즘 나는 행복하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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